진작 써야지 하고 사진만 올려두었다가 3주가 거의 다 지나서 글을 써 봅니다.
사진 찍은 날 중간 놀이 시간에 밖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큰 목소리가 들려서 창밖으로 내다보니 올해 있을 지역교육청 학년별 육상경기 대회 연습을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래도 연습하는데 안 가볼 수 없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운동장으로 아이들과 지도하시는 선생님을 뵈러 갔습니다.
운동장에 나서서 보니 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흙 운동장에 그려진 백색 트랙 라인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대부분 천연잔디나 인조잔디 같은 운동장이 대부분이라 흙 운동장도 흔한 풍경은 아닌데 이렇게 흙 운동장에 백색 가루로 트랙 라인을 그려둔 풍경을 보는 일도 정말 흔치 않은 풍경입니다.
정말 예전에는 석회가루를 뿌려서 사실 건강에도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밀가루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썩고 어느 결엔가 사라진다고 하네요.
아마 이 글을 보시는 연배가 좀 있으신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께서는 추억이 떠오르실 듯합니다. 저도 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 연습하는 거 응원하러 갔다가 이 라인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지런하게 그려진 이 라인을 따라 육상 연습을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숨쉬기 운동으로도 벅찬 하루인 제게 운동하는 게 부러운 건 아니었구요, 온 힘을 다해 이 라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결승점이 나오는 그 확실함이 참 부러웠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결승점을 보면서 이 새하얀 라인을 따라 숨이 턱까지 차더라도 최선을 다해 뛰기만 하면 순위에 관계없이 결국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는 일엔 이 라인이 없습니다.
오래전에 연극 리뷰를 쓰면서 막을 바꾸기 위해 무대를 암전 시키면 빛을 내는 형광 테이프 같은 것들이 있어 배우들은 그걸 보고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항상 신이 바뀔 때면 암전이 되는데 그때마다 동선을 표시한 형광 테이프가 보인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 시골길을 아스팔트 바닥에 칠해진 노란색 중앙선을 보고 달리는 느낌을 혹시 아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무슨 꿈을 꾸었든 눈뜬 현실은 사랑하는 그녀 말곤 죄다 시궁창이지만 그렇게 따라 달린 무언가, 가이드가 되어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한 일이 아닌가 싶다.
직업이겠지만 항상 저 형광 테이프로 된 동선(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에 기댄 배우들은 참 심적으로 든든할 것 같다. 암전이 되면 우리에겐 형광 테이프가 없으니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거나 어깨에 기댈수 밖에 없다. 그러니 혼자 가지 말고 꼭 둘이 가라. 그리고 만약에 사는 게 참 지치고 저리고 아프면 이런 연극 한편을 형광 테이프 삼아 좀 걸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이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이지만 이런 공연 한번은 확실하게 진통 효과가 있다. 게다가 내성도 생기지 않으니 더 없이 좋지 않나.
<마리샘 '연극 '5월엔 결혼할 거야' : 오월에 시간 있니?' 리뷰 중>
그때 연극을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을 잘 그려진 백색 트랙 라인을 보며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는 일들은 참으로 막막하기만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들, 아니 오늘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순간들을 하나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자신의 의지대로 없는 길을 만들며 삶을 살아가는 게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 더불어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도 자주 듭니다.
뭔가 익숙지 않은 하루하루, 매일 답을 모르는 문제가 연속되는 일상이 참 어렵기만 합니다. MBTI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사 진지하고, 노력하며, 없는 책임감까지 꺼내 뭔가 해내고 또 타인에게 싫은 소리 못해서 늘 끙끙대는 그런 일상이 어떤 때는 가엾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목석같이 사는 일'을 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게 기쁘지도, 크게 슬프지도 않게 큰 파장 없이, 물결 없이 바람 없는 날의 바다처럼, 산기슭의 안 보이는 바위처럼 그렇게 별다른 일 없이 지내고 싶단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볼 수 없는 '배꼽'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들 하나하나의 삶마다 있을 겁니다. 다 알 순 없지만 요즘 닥쳐오는 많은 일들에 조금씩 버겁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운동장에 그려진 백색 트랙을 따라 힘껏 내달리는 아이들이 오늘따라 더더욱 부러운 건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사는 일에도 백색 트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지대로 사는 삶을 늘 꿈꾸지만 이제는 지나온 시간과 함께 조금씩 내려놓고 모두가 가는 길로도 따라가보려고 노력해 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늘 느껴온 '이질감' 대신 '동질감'에 좀 기대어 보고 싶은 요즘입니다.
<2024년 5월 3일>
*이 글은 네이버블로그 <마리샘>에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