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bo Sep 11. 2020

눈을 마주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003)

사람은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 눈이 아니라 주로 콧등 언저리나 인중을 바라본다고 한다. 초점을 맞춘 곳에 상관없이 그 주변도 모조리 시야가 되니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려 마주할 때 굳이 눈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기게 됐다. 신기한 건, 눈을 바라보면 어떤 의도로 대화를 하든 적어도 진실과 거짓의 깊이는 대충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굳이 판단하려 애쓰지 않아도, 일단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기 때문이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이 특별한 이유도 시선 때문이다. 그림 속의 소녀는 관람객을 응시한다. 가장 신기한 건, 저 소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함에 따라 소녀의 표정이 담은 의미가 달라보인다는 점이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은데, 도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득 다시보면 허무해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이 그림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다름아닌 모델이다. 아무도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 모른다. 수수한 옷차림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진주귀걸이를 했다는 점,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소설 하나를 낳았다. 그 소설을 영상작품으로 옮긴 영화가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영화에서는 '그리트(스칼렛 요한슨)'를 그 베일에 싸인 소녀로 설정했다. 영화 속 그리트는 실제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을 그린 화가 요하네스(얀) 베르메르 집의 하녀로 들어가 살며 일을 하게 된다. 미움도 받고, 경계심을 내비치는 그 집 사람들에 그리트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베르메르에게는 센스있는 하녀로 인정받고 이내 그의 그림작업을 도우며 베르메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리트에게 완벽하게 초점이 맞춰진 영화임에도 이 영화가 신기한 이유는, 나를 그리트가 아닌 화가 메르베르에 이입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치 미술관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 된 것처럼, 영화 장면들을 마주하는 나는 그리트와 마주보게 된다. 영화 속 그리트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칼이 보이지 않도록 두건을 단단히 두르고, 시기를 받아도 꾹 참고야 마는 그녀는, 신기하게도 말로써 표현하지 않아 답답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신비로운 인물처럼 비친다. 카메라가 끊임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눈, 세밀한 얼굴 표정을 계속해서 보여줘서 그런걸까,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그리트를 계속 보고있자면, 마치 내가 화가 베르메르가 된 것처럼 그리트를 마주하게 되고 그녀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더 많은 시선이 얽힌다. 그림을 보자마자 외설적이라며 소리지르는 베르메르 부인, 완성된 그림을 받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림을 응시하는 반 라위번. 순진무구해보이는 소녀의 표정을 과연 그들은 어떻게 해석한 것일까? 그녀를 질투하고 분명히 자신의 남편과 무슨 일이 있을거라 생각한 부인의 눈에는 소녀가 도발하는 것처럼 유혹적으로 비쳤을 것이고, 그리트의 아름다움을 탐하며 그녀를 범하려 한 반 라위번의 눈에는 자신에게 저항하던 그리트의 모습이 함께 보였을 것이다. 두 인물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그리트를 그 자체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재생산해낸 그리트의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상상은 곧 그들이 그리트의 그림을 마주하는 시선이 되어, 숨겨오던 그들 자신의 생각을 분출시켜버렸다.


마우리츠하위스의 갤러리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

나는 실제로 네덜란드 덴 하그(헤이그)에 위치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그림을 봤다. 내가 이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느낀 재미있는 점은, 저 소녀와는 절대 눈싸움을 해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인물이 액자 밖을 쳐다보는 시선을 담은 그림은 많은데, 유독 이 소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벌린 입, 호기심 가득해보이는 눈 때문인지 계속 쳐다보게 됐다. 눈을 마주하며 타인을 대하려는 나지만, 이 소녀 앞에서는 고해성사라도 해야할 것같은 마음이었다. 그림 속 소녀는 절대 눈을 먼저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없이 바라봐야만 내가 진실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작 내가 마주하는 그 소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한참을 바라보다 눈을 피하고 갤러리를 나오는데, 비밀도 없으면서 엄청난 비밀을 가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르메르가 그리트에 대해 숨긴 감정이 그림에 담겨 오롯히 전해졌던 탓일까?

작가의 이전글 나태함을 패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