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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 Sep 11. 2020

눈을 마주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2003)

사람은 다른 사람을 쳐다볼 때 눈이 아니라 주로 콧등 언저리나 인중을 바라본다고 한다. 초점을 맞춘 곳에 상관없이 그 주변도 모조리 시야가 되니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려 마주할 때 굳이 눈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기게 됐다. 신기한 건, 눈을 바라보면 어떤 의도로 대화를 하든 적어도 진실과 거짓의 깊이는 대충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굳이 판단하려 애쓰지 않아도, 일단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기 때문이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이 특별한 이유도 시선 때문이다. 그림 속의 소녀는 관람객을 응시한다. 가장 신기한 건, 저 소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함에 따라 소녀의 표정이 담은 의미가 달라보인다는 점이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은데, 도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득 다시보면 허무해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이 그림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다름아닌 모델이다. 아무도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 모른다. 수수한 옷차림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진주귀걸이를 했다는 점,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소설 하나를 낳았다. 그 소설을 영상작품으로 옮긴 영화가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영화에서는 '그리트(스칼렛 요한슨)'를 그 베일에 싸인 소녀로 설정했다. 영화 속 그리트는 실제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을 그린 화가 요하네스(얀) 베르메르 집의 하녀로 들어가 살며 일을 하게 된다. 미움도 받고, 경계심을 내비치는 그 집 사람들에 그리트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베르메르에게는 센스있는 하녀로 인정받고 이내 그의 그림작업을 도우며 베르메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리트에게 완벽하게 초점이 맞춰진 영화임에도 이 영화가 신기한 이유는, 나를 그리트가 아닌 화가 메르베르에 이입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치 미술관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 된 것처럼, 영화 장면들을 마주하는 나는 그리트와 마주보게 된다. 영화 속 그리트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칼이 보이지 않도록 두건을 단단히 두르고, 시기를 받아도 꾹 참고야 마는 그녀는, 신기하게도 말로써 표현하지 않아 답답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신비로운 인물처럼 비친다. 카메라가 끊임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눈, 세밀한 얼굴 표정을 계속해서 보여줘서 그런걸까,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그리트를 계속 보고있자면, 마치 내가 화가 베르메르가 된 것처럼 그리트를 마주하게 되고 그녀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더 많은 시선이 얽힌다. 그림을 보자마자 외설적이라며 소리지르는 베르메르 부인, 완성된 그림을 받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림을 응시하는 반 라위번. 순진무구해보이는 소녀의 표정을 과연 그들은 어떻게 해석한 것일까? 그녀를 질투하고 분명히 자신의 남편과 무슨 일이 있을거라 생각한 부인의 눈에는 소녀가 도발하는 것처럼 유혹적으로 비쳤을 것이고, 그리트의 아름다움을 탐하며 그녀를 범하려 한 반 라위번의 눈에는 자신에게 저항하던 그리트의 모습이 함께 보였을 것이다. 두 인물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그리트를 그 자체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재생산해낸 그리트의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상상은 곧 그들이 그리트의 그림을 마주하는 시선이 되어, 숨겨오던 그들 자신의 생각을 분출시켜버렸다.


마우리츠하위스의 갤러리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

나는 실제로 네덜란드 덴 하그(헤이그)에 위치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그림을 봤다. 내가 이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느낀 재미있는 점은, 저 소녀와는 절대 눈싸움을 해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인물이 액자 밖을 쳐다보는 시선을 담은 그림은 많은데, 유독 이 소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벌린 입, 호기심 가득해보이는 눈 때문인지 계속 쳐다보게 됐다. 눈을 마주하며 타인을 대하려는 나지만, 이 소녀 앞에서는 고해성사라도 해야할 것같은 마음이었다. 그림 속 소녀는 절대 눈을 먼저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없이 바라봐야만 내가 진실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작 내가 마주하는 그 소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화가의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한참을 바라보다 눈을 피하고 갤러리를 나오는데, 비밀도 없으면서 엄청난 비밀을 가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르메르가 그리트에 대해 숨긴 감정이 그림에 담겨 오롯히 전해졌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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