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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 Sep 18. 2020

도시의 그림자

도시의 그림자 (1988)

1988년. 내가 태어나기 11년전에 세상에 등장한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인 "이 어둠의 이 슬픔"이 1986년 강변가요제 금상을 먼저 받았고 이후 독집 앨범이 나왔다. 이 앨범은 가수와 앨범의 이름이 "도시의 그림자"로 같다. 그리고 이 앨범은 말마따나 닉값을 하는 노래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림자는 해가 있는 낮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그림자는 해가 지고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들 하나씩은 지니고 다니지만 숨기고 싶은 그림자를 밤이 되어서야 슬쩍 꺼내보는 탓일까. "도시의 그림자" 앨범은 그런, 어둔 밤에 홀로됨을 오롯히 느끼도록 하는 가사들로 가득 채워져있다. 수록곡들의 제목부터 이 앨범이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잃어버린 것", "떠나가는 것", "밤이라는 시간", "나를 외롭게 하는 그대(타인)"라는 걸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떠나가고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1번 트랙인 "떠나가는 계절"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떠나고, 2번과 4번 트랙인 "도시의 그림자들"과 "도시의 새벽"에서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난 모습을 담는다. 특히 후자의 두 곡은 경쾌한 리듬 아래 그렇지는 못한 고독한 가사를 담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목소리도 그렇고, 술에 취해 알딸딸한 상태에서 모두가 거처로 돌아간 후 텅 빈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은 아니고, 밤의 거리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의 정처없음과 불안감이 느껴진다. 도시가 아니라 그 그림자 속을 고향이라 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속박하는 것도 없어서 그런지 강한 해방감도 느껴진다. 그러나 천국같이 느껴지는 그 거리 역시 오직 나를 담을 뿐인 넓은 공간이라, 이내 청년은 예정된 절망을 마주한다. "타인의 거리"가 담는 서사다.


도시의 새벽을 걸어요 이상한 슬픔이 있어요

새벽의 공기를 마셔요 그리고 뛰어 봐요

시푸른 허공에 흐르는 앙상한 네온을 마셔요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서 잃었던 노래를 불러요

"도시의 새벽"


떠나감이 있다면, 남겨진 자는 언제나 상실감을 느낀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방식으로 발생하는데 대체로 어떤 것의 부재를 자각할 때 우리는 슬퍼진다. 슬픔은 그림자를 직면하게 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3번 트랙인 "이 어둠의 이 슬픔"은 그 두가지를 맞닿도록 한다. 가사 속을 유영하는 '허공', '흔들리는', '흐려지는', '상심', '허무'와 같은 단어들은 아무도 달랠 수 없는 원초적인 상실, 거기서 오는 고독감을 맛보게 해준다. 결국 가사 속의 주인공이 애원하는 것은 오직 그가 특별한 존재였음을 인정받는 일이었다는 점이 자뭇 처절하기도 하다. 하지만 밤만 되면 드리우는 그림자, 알 수 없는 감정들처럼 그 처절함은 우리의 운명이기도 하다.


돌아선 그대 다시 한 번 말을 해주오

오직 나만을 사랑했다고

떠나간 그대 다시 한 번 고백해주오

나 그대만을 사랑했다고

불빛들 머문 젖은 나의 눈빛 허공 속에 뿌려버리고

가슴을 태운 이 어둠의 상실, 허무한 사연이어라

"이 어둠의 이 슬픔"


앨범 후반부의 트랙들("사랑이 머무는 곳에", "무언극", "비를 닮은 그대")은 떠나감이 아니라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로맨틱한 발라드를 노래한다. 고독함, 즉 홀로됨에 대한 해결책이 결국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뻔한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채워주며 함께할 누군가를 찾은 작업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더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에, 더 좋은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이상과 일치하는 누군가를 찾아 평생을 헤매게 된다. 마치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그것이 애초에 나에게 없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장면처럼 환한 밤이 되면

모두 길을 잃은 아이처럼 무엇인가 한참 찾아요

스쳐지나간 사랑을 찾아 헤매나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다니나

우리들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오늘 하루도 덧없이 찾아 헤메이네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도시의 그림자"는 밤의 도시, 그곳의 사람에 대한 뛰어난 고찰을 훌륭한 가사와 리듬으로 풀어낸 앨범이다. 당시 나온 노래들은 고독감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참 많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며 문화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지만, 풍요 위의 첫 세대로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도시공간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X세대의 혼란스러움을 반영한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대상을 받은 "젊음의 노트" 역시 이런 혼란스러움을 가득 반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어둠의 이 슬픔"은 좀 서정적이고 딥다크한데 비해,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결연하고 힘찬 리듬으로 진행되는 "젊음의 노트"가 대학가요제의 느낌과 더 잘 맞아떨어져서 도시의 그림자가 대상까지는 가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 가슴

잡으려면 어느새 사라지는 젊음의 무지개여

커피를 마셔봐도 느낄 수가 없는 나의 빈 가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젊음의 고독이여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써야만 하나

"젊음의 노트"


도시의 그림자는 그들의 이름과 같은 앨범 하나만을 남기고 더이상 앨범을 내지 못했다. 이들의 노래를 탄탄하게 이끌어가는 여자 보컬 김화란의 부모님이 음악 활동을 반대했고, 결국 그녀가 유학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두 사람은 김화란의 느낌을 재현할 새로운 여자 보컬을 영입하려 했으나,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근황도 알 수 없는, 사라진 가수의 목소리가 어쩌면 도시의 그림자의 노래들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더해주는 것만 같다. 그룹이 노래하던 가사가 그들의 운명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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