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1994)
EP01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가끔, 한눈에 내가 많이 좋아할 것임을 알게되는 것들이 있다. 사람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나는 그런 경우엔 주로 오래오래 감정을 묵혀둔다.
사실 미련한 일이다. 너무 커진 기대를 채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열지않을, 열지 못할 통조림을 계속 사서 모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깡통들은 문득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열어본다. 어떤 것들은 오히려 썩지 않고 잘 숙성되어 그땐 그랬지, 잠깐 맛보고 흘려보낼 정도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고, 혀 끝에서 아릿한 맛이 감돌 때 쯤 작별한다.
EP02 California Dreamin'
아무리 촬영지인 '청킹맨션'과 홍콩섬의 음식점에서 이름을 따와서 붙였다지만 "Chungking Express"라는 이름은 타국의 관객 입장에선 낭만의 치사량 초과가 아닌가 싶다. 지금 당장 홍콩으로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그야말로 급행열차에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 인파가 우거진 도심삼림에서 공유하는 시간을 조금 늘이기도 했다가 서로의 공간의 넘나들기도 하는 게 퍽 로맨틱하기도 하다.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은 곧 수많은 만남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수많은 이별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일단 눈이 마주쳤다면, 후자는 머릿속에서 잊혀버린다.
663의 동선과 행동패턴을 기억하고 마주치면 수줍은 새침떼기처럼 구는 페이의 모습이 귀엽다. 누군가의 마음은 저렇게 전달되고, 저렇게 구멍을 메우고, 끝내는 저렇게 닿는구나.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좋아하는 글
좋은 음악을 찾느라 밤을 꼬박 새운 고등학교 시절. 날이 밝고 학교 친구에게 좋아하는 곡을 알려줬다. 며칠 뒤 친구는 내게 그 곡을 아껴듣는다고 했다. 너무 좋아서 너무 많이 들으면 질릴까 봐 겁나서.
... 나는 음악으로 사람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은 이런 음악을 들었지, 이 곡을 함께 들었지, 이 앨범 하면 딱 그 애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이 그가 자주 입던 옷과 말투 표정만큼이나 아니 것보다 더 크게 마음에 남는다.
킬리만매거진 2021.01.07
Your 2020 Playback 음악 에디터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