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타임 투 다이 (202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 타임 투 다이>를 보면서 엄마가 울었다.
엄마의 지난 15년이 끝나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빠는 베스퍼 묘비에 적힌 2006년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8살에서 23살이 됐다.
<카지노로얄>부터, 우리 가족은 <퀀텀 오브 솔러스>를 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를 모두 같이 봤다. 아직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남았고 James Bond will Return 이라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던 어렸을 때부터 뇌리에 박혀있던 쌔끈한 수트 액션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거다.
007에서 제임스 본드로
<스카이폴>부터 <스펙터>, <노 타임 투 다이>는 사실상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든 트릴로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세 편으로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007 요원이 아닌 '제임스 본드'가 된다. <스카이폴>은 논외로 두고, 나머지 두 편은 정말로 "요원도 사람이잖아요"같은 생각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션 이외의 가치들에 관심을 가지고 지킬 것이 많아진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프닝 곡들에서도 그 고뇌의 깊이와 복잡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Skyfall은 무너지고 드러남을, Writings on the Wall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리고 No Time to Die는 마들렌 스완에게 보내는 말을 담는다.
<노 타임 투 다이>에는 이미 은퇴한 double-O 요원인 007이 마주하는 여러 상황들이 등장한다. 가장 단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은 그를 대체해버린 새로운 007이다. 한때는 내 이름과도 같았던 것에 다른 사람이 응답하는 꼴, 그리고 그 광경 속에서 어린애같이 분노를 드러내는 제임스 본드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좋지는 못하다. 그가 떠난 자리에 누구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잊어야 한다", "떠난다"라는 단어들도 유독 귀에 많이 박혔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 제임스 본드는 감정 표현이 잦다. <카지노로얄>에서 포커나 치고, 미인계로 정보를 얻어내고, M을 속 썩이던 막내아들 같던 뺀질이 007은 없고, 인간적인 감정으로 속이 꽉 찬 제임스 본드가 서있다.
그러나 이제야 원하는 삶을 쟁취하고 싶어진 '인간 007'은 딜레마를 겪는다. 요원 007과 인간 제임스 본드의 삶의 괴리가 주는 딜레마다. 룻지퍼 사핀은 제임스 본드에게 이것저것 많은 말을 하는데, 그중에서도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둘 다 사람을 죽이지. 하지만 내 방식이 조금 더 깔끔해." 그는 결과주의 입장에서 그와 제임스 본드가 요원으로서 저지르는 일들은 결국 다르지 않은 것이라 얘기한다. 물론 궤변이지만 제임스 본드에겐 007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고뇌의 허를 찌른 질문이 된다. 마들렌 스완도, 제임스 본드도 죽음으로 죽음을 갚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 그에게는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이유도 있고,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이유에서든 저질러진 살인이 그의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여지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노 타임 투 다이>라는 제목은 그런 제임스 본드의 다짐을 보여준다.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 M의 인용구는 요원 007을 향한다. 그가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언제나 살아남기 위해서(survive)였는데, 이제는 살아야(live) 하기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못하다. 요원은 수단이고, 언제나 존재를 확인받는다. 그에게는 "살아간다"는 것보다 "살아있다"는 확인이 언제나 더 중시됐다. 그래서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딜레마를 풀어버리면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은퇴시킨다. 살아가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그 끝은 죽음이다. 결국 이래저래 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죽음으로 그의 두 가지 삶을 통합시킨다.
제임스 본드에서 마들렌 스완으로
그러나 분명히, 시리즈를 보내는데 이것이 최선이었는가?라는 질문에 영화는 떳떳하지 못하다. <스펙터>에서는 그나마 제임스 본드만에 초점을 맞춰 그의 과거와 관련 있는 한 거대한 조직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스카이폴>부터 이어지는 그의 트라우마 깨기가 이어지는데, <노타임 투 다이>에서 영화는 제임스 본드의 중요한 가치로 마들렌 스완을 올려버리면서 마들렌 스완이라는 인물에 무게를 싣는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의 미션은 사실상 그와 운명적으로 얽힌 비밀스러운 여자인 마들렌 스완의 트라우마를 깨는 쪽에 더 가깝다. 첩보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중요한 것이 빌런과 미션일 텐데, 이 두 가지 모두 마들렌 스완에 집중되고 제임스 본드는 이 큰 플롯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따름이다. 사실 <스펙터>에서 마들렌 스완과 제임스 본드의 사랑도 급작스럽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마들렌 스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고, 그녀를 위해 고독하게 전장으로 나아가는 제임스 본드의 마음가짐에 공감이 되지 않는 것도 영화에 대한 실망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이래저래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후에 다른 007이 나온다거나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았던 007 시리즈를 회고해볼 때 그의 007은 진부하지만 단순한 요원이 아니라 인간다운 매력이 있었던 제임스 본드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냉전의 산물인 첩보영화를 "너무나 20세기스러운" 장르라고 표현한 기사를 봤다. 그래서 20세기에 시작된 이 시리즈가 21세기, 새로운 본드와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던 것은 큰 숙제였을 거다. 이제 다원화된 정치세계에서, 첩보영화에는 뚜렷하게 맞설 적이 없다. 그래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는 자신의 요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싸우고, 사랑을 위해 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이 끝마쳐지지 못하고 죽죽 늘어지고 있는 것처럼, 아무래도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고, 오랜 시간 함께한 시리즈와의 작별은 쉽지 않다.
You know my name,
Bond,
James B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