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기억
여자친구와 집을 합쳐 살기로 했다. 다른 직장, 다른 집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나면 서로 만나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싫어하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같이 살 집을 마련했다.
이사를 가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가져갈 물건을 정리하니 이삿짐 상자가 방에 쌓여갔다. 그러다 보니 빈 상자를 채우는 일과 반대로 오래된 상자를 여는 일도 필요했다. 침대 아래에 먼지 쌓인 종이상자가 여러 개 있었고, 그중에서도 작은 종이상자 하나가 눈에 띄어 먼저 꺼내보았다.
작은 종이상자는 노란색 바탕에 하얀색 땡땡이 점으로 가득하고, 빨간색 리본이 십자로 묶여 있어 촌스러워 보였다. 리본을 풀고 먼지를 대충 털어낸 뒤, 뚜껑을 열자 정리되지 않은 전기선이 얼기설기 뭉쳐 있었다. 전기선 옆에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충전기도 함께 들어있었다. '왜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전기선과 충전기를 아무렇게나 끄집어내 바닥에 던져 놓았다. 전기선과 충전기를 모두 꺼내놓았지만 종이상자에 아직 무게감이 느껴져 안을 들여다보니 웬 휴대전화가 하나 나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서 앞뒤로 돌려보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가 이걸 언제 썼더라?"
감탄 어린 혼잣말이 나왔다. 이 오래된 휴대전화의 넘버링은 '7'이었다. 지금 나는 '12'를 꽤 오래 사용하고 있고, 얼마 전부터 거리의 전광판이나 TV광고에서 '16'이 발매되었다는 광고가 줄기차게 나오고 있다는 게 기억이 났다.
언제 사용하던 휴대전화인지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충전기와 세트로 상자에 넣어두었던 것이 분명했다. 오래전 사용하다 보면 손에 잡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지는 '7'을 억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의 잔소리와 등쌀에 새로운 휴대전화로 바꾸었고,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휴대전화를 바꿔 지금은 '12'를 삼 년이 넘어가도록 사용하고 있다. 여러 번 휴대전화를 바꿨으면서도 하필이면 이 '7'을 버리지 않고 종이상자에 담아두었는지, 그리고 이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바닥에 던져둔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은 뒤 '7'에 연결해 두었다. 만약에 켜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버리면 그만이었다.
침대 아래에 있던 다른 상자에서는 특별한 수확이 없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에게 받은 편지, 누구와 같이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 티켓, 옛 연인에게 받았던 선물 따위로 채워진 다른 종이 상자들은 뒤집어 안에 들어있던 물건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잊히는 것도 권리인 시대이다. 우리는 옛 인연을 잊을 의무가 있고, 그들은 모두 버려질 권리가 있다.'라고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멋들어지게 말하던 출연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짐 정리를 위해 마련한 오십 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모든 물건을 쓸어 담아 버렸다.
정리가 끝나갈 때쯤, '7'이 과연 켜지는지 궁금해졌다. 충전기에 꽂혀있던 '7'을 들고 전원버튼을 길게 누르자 익숙한 로고와 함께 하얀 화면이 켜졌다. '7'은 아직 살아 있었다. 로고가 지나친 뒤 켜진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환하게 웃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옛 연인인 그녀가 나와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었다. 이 옛 휴대전화는 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침대 구석으로 옛 휴대전화를 던져버렸다. 버릴 물건은 돌아보지 않고 거침없이 정리해야만 했다.
해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머리맡에 딱딱한 물건이 느껴졌다. 꺼내보니 아까 던져버렸던 '7'이었다. 불현듯 이 휴대전화를 그냥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누가 주워서 안에 내용을 보기라도 하면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떠올렸다. 가능하면 안에 담겨있는 내용을 전부 지우고 나서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7'에 담겨있는 내용을 지우기 위해 휴대전화 앞 버튼을 눌러 화면을 밝히자, 조금 어린 내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사진을 먼저 지워버리고 싶었다. 사진 앱을 찾아 들어가 보니 사진이 무려 2,278장이 있었다. '이걸 언제 다 지우나.' 하고 혼잣말을 하며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둘러봤다.
사진 앱에서 가장 위에 도달한 뒤 사진을 지우려고 손가락으로 두드려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손가락이 멈추고 멍하니 사진 보았다. 휴대전화에 담겨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은 그녀의 모습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책 보기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몰래 찍기라도 한 걸까?'하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여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자 그녀는 똑같은 자세에서 시선만 돌려 나를 보며 짓궂게 웃고 있었다.
"콘셉트 사진인가…. 귀엽네."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다음 사진을 보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 음식을 맛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둘이 손을 맞잡은 사진, 웃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 바다를 배경으로 양손을 펼치고 있는 그녀, 둘이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는 사진, 동물원에서 사자 우리 옆에서 손톱을 세우고 있는 그녀, 아이스크림을 코에 묻힌 채 정신없이 먹고 있는 나, 그리고 멀리서 뛰어오는 그녀를 급하게 찍었는지 흔들린 사진까지. 모두 그녀와 나에 대한 사진뿐이었다.
사진은 시간의 박제이다. 지나간 시간은 이미 죽었지만, 사진으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녀와 나의 인연도 죽어버린 지 오래되었는데 옛 휴대전화 속에서는 다시 살아있듯 생생했다. 지금이라도 이 사진을 그녀에게 공유하며 예전에 우리 이랬는데 하고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전화번호 열한 자리 중 일부도 떠오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그대로 2,278장의 사진을 모두 보았다. 사진 앱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 놓인 사진 속에는 그녀가 갈림길 아래 표지판에서 나를 보고 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그녀와 헤어진 건 아니었다. 불같이 뜨거워지던 '7'을 다른 휴대전화로 바꾸라고 가장 많은 잔소리를 하던 사람은 그녀였다. 새로운 휴대전화를 사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그녀는 헤어졌다. '7'의 다음 휴대전화에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까지의 더 많은 사진이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그 사진들을 확인할 수 없었다. 새로운 휴대전화로 바꾸면서 '7'을 그녀와 함께 노란 종이 상자에 넣어두었던 게 분명했다.
사진 말고도 그녀와 함께 했던 다른 기억이 또 남아있지 않을까 하고 떠올랐다. 사진 속 그녀는 일방적으로 모습을 보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 앱을 아무리 둘러봐도 흔한 영상 하나 찍혀있지 않았다. 어디에서 그녀의 목소리나 움직임은 남아있지 않았고, 그녀와 나누었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이미 죽고 박제된 모습이 아니라 주고받은 대화를 찾아보고 싶었다.
사진 앱에서 빠져나와 그녀와 단둘이서만 사용하던 메신저 앱을 찾아 눌렀다.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메시지를 직접 지우기라도 했으면 후회라도 없었을 텐데 오랜 시간 로그인을 하지 않아서 삭제되었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남기세요!'라고 쓰여있는 가입 버튼이 얄밉게 느껴졌다. 추억을 남겨놓았는데 멋대로 지워놓고서는 새로 가입하라고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조각을 찾아보려 애쓴다. 그녀의 버릇이나 말투가 어렴풋이라도 떠오르면 좋을 텐데, 머릿속 기억은 꿈결처럼 흐릿한 이미지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했던 말을 떠올릴 때, 동굴 속에 메아리쳐 돌아오는 말처럼 들리기라도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소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잊어버렸다.
오래된 기계가 으레 그렇듯, 옛 휴대전화는 손에 들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열을 내다가 이윽고 꺼져버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충전기를 침대 옆 콘센트로 옮겨와 다시 연결했다. 다시 켜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과 달리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7'이 다시 켜졌다.
다시 그녀의 흔적을 찾아본다. 문자메시지, 메모, 캘린더처럼 전부 글씨로 된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동영상이나 녹음과 같이 소리로 들리는 기록은 티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전화 앱을 눌러보니 그녀와의 통화 기록이 잔뜩 남아 있었다. 애칭으로 남아있는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유심히 바라본다.
"공일공, 오팔사육, 이오…."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열한 자리 번호를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생각하기로는 모자라 입으로 말하며 다시 외워보았다. 한때는 당연하게 외우고 있었을 이 번호를 입으로 한 자씩 말해봐야 한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그렇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중얼거리다가 '아직도 같은 번호를 사용하고 있을까? 그러면 혹시….' 하는 미련스러운 생각과 함께 박제되어 있는 그녀가 아닌 현실의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아 나섰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한 손에는 '7'을, 다른 한 손에서는 '12'를 들었다. '7'의 화면에 떠올라있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확인하며 '12'의 전화 앱에서 번호를 옮겨 눌렀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통화버튼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그 순간, '12'에 여자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떠올랐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지금 겨우 퇴근했다며, 피곤하다며,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며, 보고 싶다며, 빨리 이사 가서 같이 밤을 보내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도착 알림 옆에 '바로 답장하기'라고 쓰인 버튼이 나타났지만 누르지 않고 옆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여자친구의 부름을 숨겨버리고 다시 전화 앱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옮겨놓은 전화번호가 맞는지 다시 '7'의 화면과 비교해 가며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 자리에서 그만두고 여자친구에게 메시지 답장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에 '아, 혹시라도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하지?' 따위의 고민을 하고 있는데 통화 연결음이 멈췄다.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긴장하고 있던 찰나,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받을 타이밍을 놓친 걸까. 혹시 아직 내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끊어버린 걸까. 아니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무신경하게 끊어버렸을까. 그 순간 발열로 손을 뜨겁게 달구던 '7'이 또다시 꺼져버렸다. 맥이 풀려버렸다. 역시 옛 휴대전화는 켜보지 말았어야 했고, 옛 인연은 잊었어야만 했다. 그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을 괜히 켜보고서는 죄스러운 마음만 생겼다.
충전기를 콘센트에서 뽑아 옛 휴대전화와 아무렇게나 뭉쳐 들고 쓰레기봉투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놓아 쓰레기봉투로 떨어트리기만 하면 되는데 쉽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노란색 종이 상자에 다시 담아 쓰레기봉투가 아닌 이삿짐 상자 중 하나에 넣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12'의 화면을 켜고 여자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와있다. '무슨 일 있어?'라고 이전에 보낸 말들보다 다소 담백해 보이는 말이 담겨있었다. 무어라고 답장을 해야 이상하게 생겼던 마음을 들키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옛 휴대전화 속 그녀와의 메시지들이 생각났다. 글씨 기록으로만 남는 메시지는 의미가 없었다. 메아리의 흔적도 남지 않고 죽어버리는 글씨가 아닌 목소리가 필요했다. 살아있는 마음을 주고받아야만 했다.
전화 앱을 켜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록을 오른쪽으로 밀어내 지웠다. 그리고 당연하게 외우고 있는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숫자로 누른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는 소리가 멈췄다.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 휴대전화. 다시 쓰려고 고치세요?"
휴대전화를 고치던 수리기사가 물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고쳐보고 싶어서요."
"이상해라. 저야 뭐. 고치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오래된 휴대전화를 굳이 고치러 오시는 분을 보면 궁금하단 말이에요."
휴대전화를 고치던 기구를 잠시 손에서 내려놓은 수리기사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새로운 휴대전화를 쓰고 있는데. 그리고 또, 더 새로운 휴대전화를 다시 살 건데. 옛날 휴대전화를 돈까지 들여가면서 가지고 있으려 하는 그 마음이…."
수리기사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내가 그에게 납득할만한 대답을 하길 바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리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필요해서 고치는 데 문제가 있나요?"
"아이고, 내가 실수를 했네. 그냥 나 혼자 궁금하면 될 일인데.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치는 사람이 계속 있어야 나도 벌어먹고 살지."
말을 마친 수리기사는 팔짱을 풀고 손에 기구를 집어 들며 '7'을 고치는데 다시 집중했다. 지난주 '7'을 고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수리기사는 '오래된 물건이라 부품을 구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려요. 가격도 꽤 나오고. 그래도 고치시게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꼭 해주세요.'라고 대답했고, 시간이 흘러 옛 휴대전화는 새 휴대전화처럼 고쳐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수리기사가 '끙'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7'을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다 고쳤네요. 그래도 부품이 다 리퍼라서 언제 다시 고장 날지 모르겠네. 특히 배터리가."
"고장 나면 또다시 찾아와도 되나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부품을 구하기가 어렵거든. 안에 데이터가 필요했으면 그냥 옮기기만 해도 되는데, 꼭 이게 필요하시다고 하니깐."
건네받은 '7'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나를 보며, 수리기사는 오래된 휴대전화를 꼭 고치려는 내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듯 여전히 의심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심도 없어서 전화도 안 될 텐데. 이거 진짜 다시 쓰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개통은 어떻게 하려고?"
"아니에요. 그냥 이 휴대전화가 필요했어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아무튼 잘 쓰시고."
나는 수리기사의 인사에 대답을 더 하지 않고, 뒤돌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얼마 전 이사를 마치고 이삿짐을 풀던 여자친구가 노란색 종이 상자와 그 안에서 '7'을 찾아냈다. 여자친구는 노란색 종이 상자가 내 물건임을 금방 알아채고 '이 휴대전화는 뭐야? 옛날 휴대전화는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다.
주방에서 다른 이삿짐 풀기에 한창이던 나는 전원이 켜지면 나타나는 첫 화면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고는 '7'을 여자친구에게 빼앗기 위해 달려갔다.
여자친구의 손에서 낚아챈 '7'은 더 이상 켜지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켜지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왜 가지고 있는 거야. 무슨 추억이라도 있어? 그런 거 아니면 얼른 버려.'라고 말하며 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이삿짐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건조하게 그리고 짧게 '알겠어.'라고 대답하고는 옛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으로 얼른 숨겼다.
그리고 지난주, 오래된 휴대전화를 전문적으로 수리한다는 사설수리업체에 방문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오늘이 돼서야 수리된 '7'을 다시 손에 넣었다.
사설수리업체의 문을 나서 몇 걸음 걷다가, 길에 멈춰 서서 옛 휴대전화의 전원을 다시 켜보았다. 로고와 함께 하얀 화면이 떠오르며 휴대전화의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에는 웃고 있는 나와 뺨을 맞대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나타났다.
사설수리업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 출퇴근을 위해 오가던 길과 다른 길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집으로 가는 길을 내비게이션 앱으로 살펴보고는 걸어야 했다. 내비게이션 앱에서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에서 벗어나 한 동네공원의 입구로 들어서는 길에 도달했다.
동네공원은 좁은 산책로와 어린이놀이터, 작은 분수, 그리고 잔디밭과 여러 개의 벤치로 만들어져 있는 처음 보든 동네 공원이었다. 동네공원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예전 그녀의 집 근처에 있던 공원과 비슷한 구조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필이면 오늘 여기를 지나치도록 안내받은 건 다시 고쳐진 '7'이 나를 이끈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공원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도 공원이 하나 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보내던 시간은 둘 사이에서 생긴 안타깝거나 아쉬운 기분을 달래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둘이 앉던 벤치에 다른 누가 앉아있다는 이유로 공원을 다섯 바퀴나 걸었던 기억이나 벤치에 앉아 떠들다가 내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둘 모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날이 기억났다.
'아마 비슷한 위치에 벤치가 있을 텐데.'라고 걷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억 속 벤치와 똑같이 생긴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비어있는 옆자리를 손으로 쓸어 만지자 손에 잡히는 건 먼지뿐이었다. 괜한 아쉬움에 두 손을 비벼 먼지를 털어내고 주머니에서 오늘 완전하게 고쳐진 '7'을 꺼냈다.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켜자 환하게 웃는 나와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혹시라도 수리를 하다가 안에 있는 데이터가 사라지지는 않았을지 하는 불안함에 화면으로 옮기는 손가락이 가볍게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이전에도 가장 먼저 확인했던 사진 앱을 눌어 사진들을 확인해 보았다. 2,278장. 모든 사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언제고 이 멈춰진 시간을 잠시 둘러볼 수 있다면 휴대전화 고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할 이유에 충분했다. 벤치의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 고개를 숙이고서 그녀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둘러보기로 했다.
다음으로 전화 앱을 확인하자 검색 이력에 그녀의 연락처가 나타난다. 이전에 '7'을 처음 다시 발견했을 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친구의 손에서 빼앗은 뒤에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7'은 다시 전원이 켜지지 않아 안에 담겨있던 그녀의 전화번호를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후에 그녀로부터 전화가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로 바뀌었을지도 몰라.'하고 떠올리자 깊은 한숨과 함께 힘이 빠져나가버렸다. 숨이 다 빠져나가느라 굽을 대로 굽어진 등을 다시 펴 벤치의 등받이에 기댔다.
"아니야. 혹시 내 번호가 없어서 전화를 다시 안 해봤을 수도 있어. 모르는 번호에는 다시 전화를 잘 안 걸잖아?"
생각으로만 해도 될 이야기가 혼잣말로 새어 나왔다. 두 번이나 똑같은 번호로 전화가 오면 그녀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전화를 받거나 문자로 답장을 할지도 모른다는 미련한 마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면 연락이 되어 목소리를 들어볼 수도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설레고 떨렸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7'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공일공, 오팔사육, 이오…."
한번 더 그녀의 번호를 확인하면서 '12'에 전화번호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게 과감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설수리업체에서 수리기사가 '7'을 고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만약에 전화를 받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해 두었다. 잘 지내는지.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있는지. 다른 마음이 있어 전화한 게 아니라 정말로 목소리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는 변명까지 생각해 보았다. 모든 변명을 한 번씩 떠올려 본 순간, 통화연결음이 멈췄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
그녀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지 않는 전화를 두 번이나 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세 번째까지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비참한 기분이 들 거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녀이거나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모르는 번호로 세 번이나 전화가 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자기야!!"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행동을 몰래 하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7'을 주머니 속으로 급하게 넣었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여자친구가 나를 보며 신난 표정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떠올리며 내 표정을 숨기기 위해 여자친구를 보며 한껏 웃음을 지었다.
여자친구가 내가 앉아있는 벤치 앞으로 도착할 때까지 손을 흔들고만 있었다. 반가움이 컸다면 나도 일어나 여자친구를 향해 걸어갔을 테지만 반가움보다 어떻게 여자친구가 나를 찾아냈는지 모를 불안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이윽고 내 앞에 도착한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여기는 웬일이야? 오늘 일찍 끝났어?"
"그러게. 나 오늘 일찍 끝났나 봐."
"끝나면 끝난 거지. 끝났나 봐는 무슨 말이야. 여기 공원에서 뭐 하고 있었어?"
"나? 그냥 있는데. 진짜 그냥 있었는데."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에 여자친구가 의심이라도 할까 봐 괜한 걱정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표정이나 대화 주제를 바꿔 상황을 모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아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벤치 옆 빈자리에 앉혔다. 내가 끌어당긴 바람에 '아얏'하고 벤치에 엉덩방아를 찧은 여자친구가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다.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혹시라도 '7'을 켜고 전화번호를 옮기는 나를 보고 있던 건 아닌지 복잡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나저나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여기 공원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응? 아, 나는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여긴데?"
"처음 들어. 저번에 마중 갔을 때는 이쪽으로 안 왔잖아."
"공원을 통과해서 집에 가면 엄청 빠르거든. 자기랑 집에 올 때는 너무 빨리 안 들어가도 되니깐. 동네 산책도 할 겸 돌아 돌아 집에 갔었지. 오늘은 집에 혼자 가니깐 공원 지나가고. 지나가는데 익숙하게 생긴 사람이 멍하게 앉아 있잖아? 맥 빠진 표정이나 하고. 그래서 놀라게 해 주려고 뛰어왔지!"
"그랬구나. 깜짝 놀랐어. 갑자기 나타나서."
항상 혼자 지나치던 길에서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는 이유로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차라리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고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평소의 서로가 되기 위해서 이 동네공원을 빨리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을 해야만 했다.
"왜? 여기서 만나면 안 되는 거야? 혹시 나 여기로 지나다니는 거 알고 나 몰래 이벤트라도 하려고 하셨나? 아니면 뭐, 나 말고 다른 여자라도 여기서 만나기로 하셨나?"
능글거리며 웃는 그녀의 농담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자친구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웃음을 짓고 있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보며 계속 웃고 있다.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가기보다 얼마 전 그녀와 늦은 밤에 동네 산책을 하다가 발견했던 작은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고 말을 꺼냈다.
"나도 오늘 일찍 퇴근했고, 우연히 여기서 만나니깐 기분 좋은데. 집으로 가지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어? 나야 당연히 좋지. 혹시 이걸 계획하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셨나?"
"에이,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
-뚜르르르르르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놀란 마음에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급하게 꺼냈다. 누구에게 전화가 온 건지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보자 휴대전화의 까만 화면만이 보였다. 내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는 '7'이었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12'를 꺼내자 화면에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 열한 자리가 떠있었다. '공일공. 오팔사육. 이오….' 그녀의 전화번호였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여자친구의 번호가 아닌 '7'에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번호가 지금 휴대전화의 화면에 떠 있다.
당황한 나머지 한쪽 손에 '7'을 계속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황급히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여자친구가 내 주머니에서 나온 '7'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가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여자친구가 앉아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침 여자친구도 전화 벨소리가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울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방 속에 손을 넣고 휴대전화를 찾고 있었다.
-뚜르르르르르
"뭐야. 내 건 아닌데. 자기 전화네? 안 받고 뭐 해. 얼른 받아봐."
그녀는 가방 속의 자신의 휴대전화에 온 전화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다.
-뚜르르르르르
나는 전화를 받을 수도, 끊어버릴 수도 없었다. 순간 돌이라도 되어버린 듯 굳어서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안 받고 뭐 해. 얼른 받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