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있다면 흡사 이런 모습일까?

그러니까, 직장생활

by 겨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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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 밀지 좀 맙시다!!!

-어어어... 막 밀고 들어오네?

-제가 밀려고 미는 거 아니에요. 뒤에서 밀어서 그래요.

-아이, C8. 그만 좀 태우지.

-어이, 기사양반. 숨도 못 쉬겠고 서있을 데도 없구만 그만 좀 태웁시다.


아침부터 욕설과 고성이 난무한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짜증과 화가 묻어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다. 밥 벌어먹고살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이게 뭔 짓인가 싶기도 하다.

정류장에 정차해 버스문이 열릴 때마다 밀면 민다고 난리, 밀고 싶어서 미냐며 욕설, 그만 좀 태우라며 기사에게 고함, 안쪽으로 좀 들어가지 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다며 욕설, 내려야 되는데 하차문 앞에서 가로막고 비켜주지도 않는다며 내렸다가 다시 타라며 싸우기 일보직전...

정말로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까.


출근길, 버스 안의 풍경은 흡사 전쟁통을 방불케 한다. 전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이것이 전쟁이여.

출근 전쟁을 피해 집에서 조금만 더 일찍 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 쉽지, 아침시간의 십 분은 천금과 맞먹는 귀중한 시간이라 집에서 일찍 나온다는 것은 말 그대로 톰 크루즈만 수행할 수 있는 미션 임파서블과 진배없는 것이다.


또 다른 어느 날의 풍경.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처럼 날마다 반복되는 출근길의 풍경.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버스. 정류장에 정차해 버스기사가 문을 열자 정류장에 서있던 사람들이 물밀듯 밀고 들어온다.

다음 정류장에 정차해 또다시 문을 여는 버스기사에게 타고 있던 승객들이 그만 좀 태우자며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한다. 출입문 바깥에서는 안쪽으로 좀 들어가라며 소리를 지른다.

문 열면 연다고 난리, 안 열면 밖에서 문 두드리며 난리.

환장하겠다. 버스기사도 증말 극한직업이구만... 생각하는 찰나 안쪽에서 누군가 기사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기사양반, 거 좀 너무한 거 아니요?

승객의 항의에 이렇게 응수하는 기사양반!

-어쩔 수 없어요. 문 안 열면 민원 들어와요.

아하,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구만, 우리만 민원 앞에 작아지는 줄 알았더니 여기도 민원에 한없이 작아지는구나.

세상 참, 쉬운 일이 없다. 불현듯 남의 돈 버는 일이 쉬운 줄 아느냐는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이런 전쟁 같은 출근...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임재범님의 목소리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너무 멋있었단 말이지. 단어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런 지긋지긋한 문장이 되다니.


만원 버스 뒤쪽에서 숨도 못 쉬고 꾸역꾸역 끼어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간신히 버스를 탈출한다.

한두 정거장 전부터 내릴 준비를 해야 정류장을 지나치치 않고 무사히 버스에서 하차를 할 수 있지만 유달리 많았던 승객들 탓에 때를 놓치고 급하게 버스를 내린다.

와,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했네... 한숨을 쓸어내리는 순간 뒤통수 근처에서 빨리빨리 좀 내릴 것이지 c8, 하는 남자의 욕설이 들린다. 내 뒤를 이어 떠밀리듯 내리던 두세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그 남자를 향하지만 그뿐, 이내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한다.


아침부터 욕이나 얻어먹고 시작하는 신세라니, 기분 잡치네... 같이 욕이나 퍼부어줄걸 싶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간 후였다.

이것은 절대로 내가 쫄아서 그런 것이 아니여. 버스가 떠나서 그래.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사는 게 팍팍해져서 그런가, 요즘따라 왜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지? 절대로 양보는 안 하려 들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은 참지 못하고 말이지.

어차피 대부분 출근하느라 붐비고 바쁜 시간인데 조금씩만 양보하고 조금씩만 좋은 말로 하면 안 되나?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등등 조금만 좋게 얘기하면 양보하는 사람도 양보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텐데 말이지, 서로 밀고 밀면서 버티고. 서로 참지 않으려고 하면서 몸의 대화만 나누기 바쁘니 서로 빈정만 상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게 당연지사지.


그러고 보니 내가 아침부터 욕먹을 짓을 했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좀 늦게 내렸기로소니 그게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아침댓바람부터 욕먹었는데 내가 너한테 비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이런 내로남불...^^

비록 욕은 먹었지만 만원 버스를 내려 바깥공기를 쐬니 와, 살겠다... 싶은 것도 잠시, 전쟁통 같은 만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한다.

다른 듯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이렇게 지옥버스와 지옥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또 다른 지옥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출근하는데 진을 다 빼고 시작했으니 출근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 퇴근시켜 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지사...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 비록 스치듯 지나갈지언정 작지만 소중한 월급이 너의 손에 주어질 것이니...



덧붙여, 그래도 좋은 날.

어느 날 아침, 버스기사님의 한마디.

오늘도 만원 버스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힘드셨던 만큼 오늘 하루는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절로 미소를 띠며 생각한다. 기사님도 오늘 하루, 착한 승객들만 만나세요...


어느 날의 퇴근길.

언젠가 직장생활을 함께 했던 동료를 우연히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그때 언니가 나 퇴사한다고 초콜릿 세트 선물로 줬었는데... 그때 말은 못 했는데 눈물 날 뻔 했잖어...

-나 혼자 입사해서 적응하느라 어색했는데 니가 잘 챙겨줬었잖아.

지옥버스 속에서 되살아난 작고 소중한 기억들로 인해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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