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의 빌런들

그러니까, 직장생활

by 겨울아이


-3년 넘게 사귀기도 했고 때가 돼서 결혼을 하게 되면 그냥 얘하고 하는 거지 얘를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살아서 하는 건 아니잖아. 근데 그딴 소리나 듣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있니?


사연은 이렇다.

2살 연하의 예비신랑과 결혼을 확정 지은 후 예비 시어머니로부터 빨리 애기부터 만들어야지 식 올리고 바로 낳아도 노산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 이후로도 예비 신랑과 예비 시누이들 이야기, 예식장과 혼수문제, 집 장만은 친정 근처로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려는지 등등 30분 가까이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좀 있으면 내려야 되는데 결말은 언제 나는 거야? 마음이 조급해진다. 절친이 결혼할 때에도 이런 디테일한 스토리는 못 들었거늘...

오해하지 마시라. 이것은 내 친구도, 친척도, 지인도 아닌 생판 모르는 사람의 하소연이다.


어느 날 퇴근길의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구구절절 본인의 결혼 비하인드 스토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단막극을 듣는 기분이 이런 걸까?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니들은 쳐다봐라, 나는 떠든다... 결코 작은 목소리도 아니고 붐비는 퇴근길의 버스에서 앞쪽까지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개인적인 사생활 오픈하기 있기 없기?

세상 참, 요지경 속이다.


-지금 끝나서 버스 탔다고 몇 번을 얘기해? 영상통화해?

역시 퇴근길의 버스 안, 앞 좌석에 앉은 남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추고 있지만 짜증스러움을 숨길 수는 없다.

-영상통화 할 수 있으면 해 봐

반면 휴대폰 건너편의 여자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이건 또 뭐지?

-얘기하잖아. 회의가 있었는데 취소돼서 동료들이랑 저녁 먹고 가는 거라니까? 당신,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남자의 변명 아닌 변병이 신호탄이 되어 휴대폰을 사이에 두고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그야말로 팝콘각이군. 진짜 의부증인가? 여자 쪽을 탓하며 다음날, 직장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와이프가 의부증일 수도 있지만 남편이 그 동안 사고를 하도 쳐서 의심을 안 할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걸 수도 있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아하, 그럴 수도... 역시 하나의 사건이라도 이 생각, 저 생각, 다양한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누가 봐도 만삭의 임산부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요지인즉슨 나이 먹은 사람이 탔으면 젊은이가 자리 양보를 해야지 왜 노약자석에 앉아서 멀뚱히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느냐는 것.

와, 하다 하다 진짜 별꼴을 다 보는구나. 할배, 진짜 나잇값 좀...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 싫어하는 거예요...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참을 험한 소리 듣고 있던 임산부. 할아버지, 지금 저도 힘들어서 앉아있는 거예요... 한마디를 뱉어보지만 이미 고삐 풀린 할배, 아랑곳하지 않는다.

보다 못한 다른 승객이 할배를 만류하며 자리를 양보해 보지만 할배의 궁시렁과 호통은 멈추질 않는다. 결국 보다 못한 어느 아주머니가 소리를 빽 지른다.

-아이고, 할아버지. 그만하면 됐으니까 적당히 해요. 아가씨 지금 만삭인 거 안 보여요?

아주머니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할아버지를 욕하는 수군거림이 터져 나온다. 일대다수가 된 것을 느낀 할배, 그제야 입을 다문다.

내가 증말 미챠.

나이 먹은 대접을 받고 싶었으면 나잇값을 먼저 하셨어야지.

어디선가 화장품 냄새가 강하게 풍겨온다. 버스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더군다나 사람도 많은데 풍겨오는 화장품 냄새라니, 역하다.

IC 누구야...

입안에 욕지거리부터 맴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에서 젊은 여자아이가 화장을 하고 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출근길의 만원 버스에서 심지어 앉은 것도 아니고 서있는 상태에서 핸드백을 뒤져가며 로션을 바르고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팩트를 두드린다. 그것도 모자라 마스카라를 칠하고 뷰러까지 짚는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긴 버스가 움직이면 손잡이 잡으랴 버스가 정차하는 틈틈이 손거울 보면서 변신하랴 남들 시선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겠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던 것도 잠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뷰러까지 짚는 너의 고난도 스킬에 경례를! 과거 김연아 선수의 점프와 스핀 기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한 기술이다.



또 다른 어느 날의 출근길. 강한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향수 좀 작작 뿌리지. 저 정도면 뿌린 게 아니라 들이부운 거 아니야? 향수하고 무슨 원수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나마 다른 계절에는 눈 딱 감고 참아주겠지만 주변의 땀냄새와 섞이는 여름에는 아주 환장하겠단 말이지. 땀냄새가 신경 쓰여 더 강하게 뿌리는 거라면 오판 중의 큰 오판이다.


천천히 버스에 탑승한 할머니. 대놓고 버스 안을 둘러보더니 앉아있는 승객 중 젊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티 나게 바짝 다가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양보할 기미가 없자 '학생, 내가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자리 양보 좀 해주면 안 될까?' 아예 대놓고 자리양보를 강요한다. 자리에 앉아있던 젊은이, 들은 척도 안 하며 갑자기 가방을 뒤져 이어폰을 꺼내 착용한다.

오올, 세게 나오는데? 흥미진진... 역시나 팝콘각이다.

대놓고 얘기하는 것도 먹히지 않자 앞자리에 앉은 다른 사람에게 죽는시늉을 하며 자리양보를 요구한다. 앞에 앉아있던 젊은이, 전 임산분데... 말꼬리를 흐리며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양보한다. 임산부이거나 말거나 냉큼 자리를 차지하는 할머니. 불행 중 다행인지 할머니에게는 양보를 하지 않던 젊은 친구가 임산부에게는 자리를 양보한다.

과연 여기서 제일 진상은 누구일까?

임산부 제외, 이어폰 젊은이와 할머니의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하다.



환자복을 입고 깁스를 한 한쪽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젊은 아이. 한 승객이 안쪽으로 들어가려다 깁스를 하고 있는 다리를 건드리자 소리를 빽 지른다.

-아프다고! 눈깔이 삐었어?

이건 뭐지?그렇지 않아도 붐비는 퇴근길의 버스가 더욱 혼잡해진다.

미친년. 저 정도면 택시를 타던가... 버스를 내리며 소심하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만다.


어느 날 아침. 아직은 먹거리를 들고 버스를 타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사발면을 먹고 있던 학생이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자 사발면을 든 채로 버스에 탑승한다. 저걸 들고 타면 어쩌자는 거지? 생각이 드는 찰나 버스 안 기둥을 붙잡고 선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불안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

앞에 앉아있던 아주머니, 편하게 먹으라며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요즘 아이들이 무서워서 피한 건 아닐거라 믿고 싶지만 나 같아도 양보를 핑계 삼아 자리를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방예의지국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


역시 출근길의 어느 아침.

버스노선 중 고등학교가 있어 학기 중에는 자주 보게 되는 교복 입은 아이들. 젊으니 좋다... 생각한 것도 잠시, 정류장의 한쪽에서 서너 명의 교복 입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숨어서 피우는 것도 아닌, 너무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라며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서둘러 눈을 피하도록 하자.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편하게 태우십시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늘 다짐하게 되는 한 문장.

역시 폭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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