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직장생활
b
고객의 요청사항을 듣고 업무를 처리하는데 1분 20초. 깔끔하군, 끝...인 줄 알았지?
끝인사와 함께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아가씨, 이번에 대통령 누구 찍었어?
갑자기 훅 들어온다.
생뚱맞게 이건 또 뭔소리야? 생각하는 순간 고객을 가장한 상대방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본인의 지역감정과 정치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선생님, 전 지역감정도 정치도 크게 관심이 없다구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차라리 성희롱이나 욕설을 하면 먼저 통화 종료를 하고 팀장한테 보고라도 하지 이건 성희롱도 아니고 욕설도 아니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시추에이션이다. 어쩐지 오전 근무시간 내내 태클 거는 고객이나 진상고객 없이 콜이 금방금방 끝난다 했지. 오늘은 좀 무사히 넘어가나 했다.
잠시 뮤트키를 누르고 한숨을 내쉰다.
콜센터라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리 뮤트키를 눌렀다 해도 통화 중의 이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숨 좀 쉬자,는 생각이 먼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부분의 선량한 고객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는다니까...
생각을 해보자.
내가 어쩌다가 콜센터라는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된 거지?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절대로! 발을 들이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문제의 발단은 그놈의 학자금 대출 때문이었다. 대출은 갚아야 하는데 취직은 안되고 그나마 취업의 문턱이 낮았던 곳이 콜센터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인터넷 홈페이지나 모바일로 거의 모든 업무처리를 할 수 있고 나조차도 카드든 보험이든 은행이든 콜센터에 전화라는 걸 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콜센터에 전화해서 일을 보겠어.
AI상담과 챗봇상담도 안 하는 곳이 없고 향후 10년 안에 사라질 직업군 중 하나가 콜센터 상담원이라는데. 가전제품 AS도 모바일로 입력 두어 개만 하면 간편하게 접수되는 세상에 말이지.
게다가 모집공고에 기재된 대부분의 콜센터 급여는 정부에서 시행하는 기본급과 약간의 인센티브가 전부였고 때문에 한콜 받고 책 좀 읽다가 또 한콜 받고 커피 한잔 마시고,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고... 이렇게 쉽게 생각했던 것이 나의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어마무시한 업무량과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쌓기 위한 공부량,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꼼꼼함과 필요 이상의 공감능력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 지식을 습득하고 이 정도 업무량을 소화하는데 못해도 월 300은 넘게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세금 떼고 실수령 금액 기준으로 말이지... 라든가 학교 다닐 때 이 정도로 공부했으면 서울대는 못 갔어도 고려대나 연세대 정도는 갔을 거야 등등 우리 사이에서만 통하는 농담도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고객들은 종종 당신이 전문가니까 내가 너한테 물어보고 있는 거잖아 류의 말을 쉽게 내뱉곤 한다. 하지만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월급통장을 마주하며 난 오늘도 퇴사를 꿈꾼다...라고 늘 말은 하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은 후 이놈의 콜센터, 내가 다시는 안 들어오나 봐라,를 외치며 호기롭게 회사를 때려치웠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입사를 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콜센터라는 공간에 발을 디딘 후 그곳에 적응해 가는 나의 직장생활 성장기록이라 할 수도, 이곳에서 느끼는 푸념이라 할 수도 있다.
부디 부담 없이 읽어주시고 한 귀로 흘려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