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그만 두거나
2 April 월 : 4일째
날씨 맑음. // CS고도 1523m
Mt. Laguna Campground 66.7km ~ Sunrise Trail Head CS 95.7km // 이동거리 29km
밤새 바람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오래 자서인지 걱정한 것 보다는 몸이 덜 아프다. 어른들 말마따나 잠이 보약인가보다. 오늘 아침에는 다들 Mt. Laguna Camp Ground 식료품점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출발한다. 원래라면 하이커 아저씨의 의견대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가려 했는데 영업 시작 시간이 늦어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배낭을 다 풀러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없으니 스토어에 들러 간단한 요기거리들을 구입하기로한 것이다.
우체국도 있어서 소포를 보내거나 픽업할 수 있다. 샌디에고 트레일 앤젤 하우스에서 만났던 제리 부부. 의외로 나이가 있는 외국인도 많았다. 사실 이런 길에서의 시간들이 나이 어린 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어제 오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세 사람.
어제까지만해도 보지 못 했던 하이커들이 오늘도 여지없이 나를 추월해 지나간다. 아마도 나보다 하루 늦게 출발한, 빠른 하이커들일게다.
뙤약볕에서 PCT 길만 바라보며 걷고있다. 멀리까지 이어진 그 길을 보고 있으면 가끔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 언제 저기까지 가지...
첫날 LA 공항에 도착해서 유니온 스테이션 이동 중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니 하늘엔 한눈에 비행기가 서너 대씩 들어오고 멀리 산에는 할리우드 간판이 보여 ‘멀리도 날아왔네, 바다 건너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샌디에이고에서 밴쿠버까지는 비행기 타면 금방인데,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영화도 보여주는 이 편한 세상에서 참 나, 굳이 걸어서 그 길을 가겠다고 차곡차곡 준비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먹거리, 잠자리, 마실 물까지 다 등에 짊어지고 말이다. 지칠 땐 고개조차 들지 못 한채 땅만 보며 걷는다.
중간에 만난 피크닉 에리어에서 잠깐 배낭을 내려놓고 발에 바람도 쐬어주고 간식도 먹으며 휴식 시간을 갖는다. 독일에서 온 리사는 어려 보이는데 체격도 나보다 좋고 여간 잘 걷는게 아니다.
이 길에서 내 집과 식량이 되어줄 것을 담은 배낭.
오늘의 길은 왜 이렇게 끝나질 않는 것인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응원해 준 정성들에 부끄러워서라도 포기 못 하지 싶다가도 또 지리산 종주를 갈 것을 왜 타지에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걸어야 한다. 걸어야 오늘이 끝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끝내고자 아픈 발을 이끌고, 이 악문 채 걷는다. 다들 첫날부터 그런 생각을 한다는데 난 나흘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양호한 편인가?
오늘 하루 머물러 갈 썬라이즈 트레일 헤드에 겨우 도착했다. 갈림길에서 리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쳐서 큰일 날 뻔 했다. 같이 걷는 하이커들과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다음 물까지 가기 전 해가 져 버렸을 테니까.
하이커들이 이 곳을 하루 묵어갈 쉼터로 삼는 이유는 하나다. 물이 있으니까. 저 커다란 드럼통 같은 곳에 물이 있어서 자신의 물통에 옮겨담아 정수 한 뒤 요리에 쓰거나 마실 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발이 더 아팠다. 도착 직전 리사가 '발이 너무 아파'라며 울먹이는 것을 보니 잘 가는 이들도 다리가 아픈가 보다. 나만 그럴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다들 너무 잘 가기에 이들 사이에서 나만큼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발다리의 먼지를 닦아낸 뒤 가져간 맨소래담 크림으로 발과 다리를 꼼꼼히 맛사지 해 주는데 만질 때 마다 통증이 더하다. 발가락 사이사이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다.
3 April 화 : 5일째
날씨 맑음. // CS고도 720m
Sunrise Trail Head CS 95.7km ~ Stagecoach Trails RV Park 122.8km // 이동거리 27.1km
다음날 아침.
여지없이 해는 떳고, 부스럭 부스럭 다들 준비를 한다. 이미 텐트 흔적이 사라진 이들도 있는 것을 보니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이들도 있는가보다.
어제 하루 신세를 진 선라이즈 트레일헤드.
나보다 늦게 준비를 하는 하이커들도 있지만 오늘도 그들은 나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 할 것이다. 성큼성큼 잘 걸어 갈 테니까.
노란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길에서 알록달록 꽃을 보면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반짝 하는 것 같다. 너희나 나나.. 이 살기 힘든 환경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구나. 난 그래도 걷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나무 덤불처럼 보이는 것들 대부분이 선인장이라 어디 하나 편하게 드러 눕기도 조심스럽다.
10시가 안 된 시간, 100km 지점을 넘어섰다. 속도가 비슷해 같이 걷고 있는 하이커중 한 명의 트레일 네임은’ 라 스트라다’ 라고 한다. 작년에 이 길을 걸었지만, 폭설구간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으며 그늘에 앉아서 배낭 내팽개치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됐다. 며칠동안 물이 있을 것 같은 곳에 물이 있음에, 쉴 곳에 그늘과 바람이 있음에, 사소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타난 멋진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감탄한다. 삶이 단순해졌다.
더불어 걷는 내내 캐나다 국경의 끝 지점이 아니라 오늘 저녁 배낭 내리고 텐트 펼쳐서 잘 곳만 생각하게 되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못가더라도 케네디 메도우까지 가자, 거기에 보내놓은 장비값이 얼마냐 등 가까이 보고 힘내고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버프로 고정시켜 두었다. 도로와 만나는 곳이 가까워질 무렵 배도 고픈데다 시원한 그늘이 보여 쉬고 있는데 라 스트라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나더러 왜 이걸 하느냐고 묻는다. 나도 알고 싶네요. 했더니 웃으면서 자기도 그렇단다. 그것도 두 번째나… 그러니까요. 대단하셔요. 다들 왜 이걸 하고 있을까? 이 길의 어떤 매력이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당겼을까?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이 길을 다 걸으면 알게 될까? 알게 된다면 이 길을 끝낼까? 그렇게 오늘 하루, 다음 마을, 이번 구간... 그렇게 하나하나라도 끝내기 위해, 안 아픈곳이 없지만 ‘어쩔수 없어. 아프더라도 가야 해. 오늘을 끝내야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걷기 시작한 지 닷새째다. 5일 내내 100km 넘게 걸었으니 이제 쉴 법도 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은 같이 걷는 하이커들과 함께 Stagecoach RV Park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원래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녁때 들어가서 숙소를 잡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다수의 의견으로 캠핑장에서 하루 묵고 내일 마을로 들어가 제로데이(Zero Day: 걷지 않고 마을이나 캠핑장에서 하루 쉬면서 재충전 하는 날)를 갖기로 했다.
Stagecoach RV Park로 들어가는 도로와 만나는 갈림길에 도착하자 깨끗한 물과 진통제가 있는 트레일 매직을 만났다. 리사를 기다리며 먼저 도착한 라 스트라다 아저씨와 다른 하이커, 나 이렇게 셋이서 수다를 떨었다. 더불어 오늘 저녁엔 Stagecoach RV Park에서 텐트 쳐 놓고 맛있는 거 먹고 샤워, 세탁, 수영도 가능하단다. 수영이라고? 오기 전에 배워놓긴 했으니 빠져 죽진 않겠지. 그나저나 수영복이 없는데 어쩌지? 트레일에서 벗어났다고 벌써부터 쓸 데 없는 걱정이다. 어디가 되었든 빨리 씻고 쉬고 싶을 뿐이다.
걷다가 시간이 됐든 그늘이 됐든 상황만 된다면 양말을 벗고 발에 바람을 쐬어주고 있다. 그럴 때 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살면서 내 발이 이렇게 더러워 보인 적이 있었나?
쿠션 좋은 두터운 양말을 신었음에도 발은 늘 흙먼지 투성이다. 사막에서 걸을 때 마다 펄펄 흩날리는 모래 먼지들이 고스란히 발톱 틈까지 들어앉은것이다.
도로에서 리사를 기다리는데 반대방향으로 가던 차가 멈춰 서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조수석에는 제리 아저씨가 타고 있었다. 우린 당신과 반대 방향이라며 목적지를 말하곤 마음만은 고맙다고 했더니 갑자기 차를 돌리더니 태워 주겠단다. 어차피 집이 근처라 상관 없다면서. 마침 도착한 리사와 사라, 구스타프, 라스트라다 아저씨까지 다섯이라 두 번 왔다갔다 하겠단다.
어찌 이런 친절이 길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거지? 알수록 미국은 신기한 나라다.
하지만 아쉽게도 20분 차이로 스토어는 문을 닫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5:20분이었다.
나는 피자나 버거에 큰 마음이 없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스트라다 아저씨는 무척이나 실망한 기색이다.
스토어가 닫혀있어 음식을 못 먹게 되자 의견이 나뉘었다. 마을로 들어갈지 이곳에서 머물지.
구스타프와 라스트라다 아저씨가 안쪽을 둘러보고 오더니 샤워와 수영장, 캠핑은 있는데 나머진 없다고 알려준다.
오늘 숙박료 아껴서 내일 마을에서 맛있는 것 사 먹자고 의견을 모은뒤 PCT 하이커들을 위해 마련된 구역으로 가서 텐트를 쳤다.
뷰가 멋진 수영장도 있고, 온수가 나오는 샤워실도 있다.
왼쪽은 수영장에서 나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외부 샤워장이라 사용 해 보지 않았지만 오른쪽의 실내 사워장은 따듯한 물이 나왔고 누군가 두고간 비누도 있었다.
화장실도 무척 깨끗했고 샤워실 앞에 의자도 있어 소지품을 놓을 수 있기까지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이에 근처 RV에 있던 부부와 대화를 나누던 스트라이다 아저씨 덕분에 고기 스튜를 얻어먹게 됐다. 빵과 덜어 먹을 그릇까지 주셔서 각자 먹을 만큼 나눠서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자기 전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하면서 인터넷을 써 보려고 했는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직원이 없으니 사용법을 알 수가 있나....
주변에 빛이 없어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체력이 떨어져 금방 추워져서 별 감상은 뒤로 미루고 다들 각자 텐트에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도 서로 내일 마을 들어가면 뭘 먹을지 잠깐잠깐 수다도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