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저항시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수많은 저항시인들께 언제나 깊은 존경과 감사 가득이고, 이분들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것도 절대 아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버겁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자주 읽지는 못 한다. 고등학교 시절, 시어 몇 구절 골라서 적당히 구워낸 후 ‘일제의 억압 아래~’ ‘독재정권의 시대적 상황~’ 등으로 시작하는 반영론적 해석을 듬뿍 발라 내어놓으면 무난한 에세이가 뚝딱 완성되는 시험용 레시피 탓을 하고만 싶다. 아무래도 내 정신이 그분들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란가 보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문학의 순진해 보이는 겉멋에 집착하던 나는 시대상보다는 작가 내면의 소리와 예술성에 천착하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문학을 찾고 싶었다. 속세와 완벽히 결백한 문학이 어딨겠냐만은, 그래도 더러운 세상 따위 버리고 떠난 듯한 이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일이 즐거웠다. 김유정, 이상, 그리고 백석. 암울한 시대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살짝은 흐린 눈을 한 모던보이들을 사랑한다.
저 헤어스타일을 소화해내는 이목구비, 참 잘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통해 백석을 처음 접했다. 흰 눈이 푹푹 나리는 깊은 산골. 나타샤는 나를 사랑함에 틀림없고, 우리를 막는 현실은 저 멀리 버리고 왔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포근한 세상. 시 속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어쩌면 오래 그리워했던 것도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멀리 당나귀 울음소리가 한참이나 메아리쳤다.
그래서 토속적 색채가 진한 그의 다른 시들을 접하고는 살짝 당황했다. 세상 다 싫다던 양반이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사람 냄새 가득한 동네 풍경을 그리고 있는 건 또 무슨 일인가. 그래도 그 말맛이 참 좋았다.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모두 모여 '선득선득하니 찬'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를 먹는… 어느 가족의 모습을 그저 담담히 읊기만 하는 백석의 시선에 잔잔히 녹아들어 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세계도, 어쩐지 그리워지고는 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
백석이 집중한 풍경에는 가난하더라도 가족 이웃 간 정이 가득하고 귀신과 인간과 짐승과 음식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종의 경계선들이 마구 그어지기 이전의 전근대적 공동체가 남아있다. 누구보다 도시적인 세련미에 민감했다는 그가 그리워했던 건 흙먼지 날리는 시골마을 자체보다 그 안에 살아있는 공존의 가치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백석은 단순히 돌아가자 외치지 않는다. 그는 변해가는 세상의 최전선을 살면서도 과거의 가치를 더듬어가며 기억하려 했고,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 후에는 차라리 모두 버리고자 한다. 그저 한없이 바라보는 타자의 흐린 눈매. 백석에 대해 김기림이 논한 ‘향토주의와 명백히 구별되는 모더니티’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소래섭 교수의 <백석의 맛>은 백석의 시 속 풍부한 음식의 모티프를 탐구한다. 음식과 감각에 관한 신선하고 흥미로운 해석들 중, 모든 재료를 한데 넣어 끓이는 '무이징게국'의 냄새, 소수림왕을 떠올리게 하는 '모밀국수' 등 음식의 향과 맛을 통해 공동체의 역사와 정신, 더 나아가 총체성의 세계를 향수한다는 해석에 집중해본다. 창공에 빛나던 길잡이별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세계, 백석은 흐린 눈으로 저 먼 수평선 끝을 음미한다. 근대성이 짓밟고 간 그 무언가가, 그의 정다운 친구 가재미가 살던 바다 깊은 곳에는 아직 남아 있다는 듯이.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p.245 작가의 말 중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김연수 작가는 한없이 순수한 풍경을 품은 사내가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찬바람을 견뎌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쇼스타코비치의 노래에 약음기를 물렸듯, 조선로동당 작가동맹은 기행의 언어를 재단한다. 잉태하지 못하는 시작(詩作), 마음 놓고 그리워할 수도 없는 통영 바다를 떠올리는 기행의 눈빛은 흐리다. 흐린 눈이어야 멀리, 더 멀리 볼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묵묵히 시대의 소음을 들으며 흐릿한 표정의 자아를 시간에 새겼다. 기행에게 러시아어 작품 번역이 그러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한' 삶, 마구간에서 얼어죽은 시어를 껴안고 끝없는 밤을 견뎌내는 삶. 결사만이 투쟁의 방식은 아님을 나타샤는 알고 있을 터이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나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백석, 고향(故鄕)
마지막으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 가지고 올 책을 고르고 고르다 두꺼운 백석 정본을 캐리어에 힘들게 끼워 넣었다. 벌써 깊게 박힌 미간의 주름,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던 들판에 사슴 한 마리 풀어놓고 싶었을까. 아무렴, 그때는 기행에게도 꿈이 있었으니까.
어떤 사슴 들으세요? 뉴진스 디토요
인용 출처: 백석 정본 (백석 저 / 고형진 편), 백석의 맛 (소래섭 저),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저)
사진 출처: 매일경제, H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