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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Feb 23. 2023

울면 안 돼!

...하지만 나는 자주 울었고, 그래서 자주 오해했다

그리 멀지는 않은 옛날, 집에서 치르는 장례를 온 마을이 나서 돕던 시절에는 상이 치러지는 내내 곡소리가 끊어지면 안 되는 예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상주가 내내 곡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변 사람들이 돌아가며 곡을 해주는 대곡(代哭) 문화가 자리 잡았고, 대곡의 순서와 시간을 명문화한 예법의 기록도 남아있다. 절차만 수개월이 걸리는 궁중 장례나 3년상 중 반복하여 곡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곡을 전담하는 노비인 곡비(哭婢)를 고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남을 위해 울어주는 직업. 생전 망자와 아는 사이도 아니었을 테니, 이는 필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울어주는 것이다. 망자를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 슬퍼했다고. 망자를 위해 울다 지쳐 쓰러졌다고. 그러니 우리는 마음의 짐을 덜어도 된다고. 생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상주에게 지어진 슬픔의 책임을 함께 들어준다. 썩 근사한 직업이다.


울음소리와 슬픔의 농도가 비례한다 믿었던 시절. 몇 달을 새워 신나게 울었다. 감정도 소모품인 터라, 마음의 상처는 생각보다 빨리, 흉터자국 하나 없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서만 울어도 되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를 달래느라 주변 사람들은 대곡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나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깊었을 각자의 슬픔을 토해내고 싶어서라도 나서서 곡을 했을 사람들이다. 나는 나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로서 슬픔을 나눴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기적이게도 혼자서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권리를 챙겼다. 깨끗한 내 가슴팍이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 걸 좋아한다. 생각을 정리할 때면 집에서 나와서 무작정 걷던 게 습관이 되었는지 가장 값진 생각들은 길 위에서 떠오르곤 한다. 영국의 올 겨울은 비도 오지 않고 그다지 춥지 않아 걷기에 참 좋다. 짧으면 30분, 길면 두 시간씩, 무작정 걷는 일도 많다. 여정 내내 같은 노래를 반복 재생으로 틀어놓고, 가사 한 줄 한 줄을 깊게 곱씹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음악이 자연의 사운드트랙이 되기도, 풍경이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되기도 하며 일상의 시간이 마음속에 기록된다. 흔한 말이지만, 아끼는 음악은 추억의 책갈피처럼 그때 걷던 거리의 분홍 노을, 신경 쓰이던 구절들이 간지럽히며 지나간 마음 한켠, 신발 밑창에 가볍게 눌어붙은 비의 향기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어느 여성 아티스트의 목소리에 깊게 잠긴 2월이었다. 입춘의 밤, 이런저런 라이브 영상을 뒤적거리다 한 무대를 우연히 마주쳤다. 로맨스였을지도 모를, 진심으로 대해주지 못하고 떠나간 어떤 관계를 떠올리며, 이젠 잃을 게 없으니 너를 더 안아줄 걸 그랬다며 후회 가득한 눈을 돌린다. 한없이 가슴이 설레고 붕 떠오르는 기분에 잠겨 해 뜰 때까지 같은 노래만 계속해서 들었다. 정신없이 행복한, 동시에 미칠 듯 버거운 이 고양감의 정체가 무엇인가 생각하던 끝에, 오래 참은 듯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울음소리 비슷한 걸 입으로 흘리고 나서야, 심한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물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웃긴 몸상태가 떠올랐다. 물증 없는 슬픔의 몽타주를 보고서야 이해했다. 슬픔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정서라는 것을. 우리는 사랑의 서주에 울고 이별의 코다에 웃는다. 정해진 결말을 알기에 사랑의 시작부터 슬픔을 연습하는 것인지, 난연한 계절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기에 마지막까지 빈틈없이 사랑하려는 것인지, 둘 중 무엇이 본질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번지지 않는 눈물, 마르지 않는 수채화로 2월은 남는다.




무대 뒤, 객석, 연습실, 레슨실, 뒤풀이... 많은 곳에서 울어봤지만 그럼에도 공연과 얽힌 눈물을 떠올리면 딱 두 장면이 떠오른다. 첫째는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공연. 더 이상 내가 설 무대가 없다는 절망감, 오케스트라를 더 잘 이끌지 못했다는 무력감, 고생한 솔리스트를 향한 미안함이 한데 섞여, 선생님을 붙잡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둘째는 당신의 첫 전국투어 청주 공연. 오래 동경했던 당신의 음악과 무대에 대한 경외심, 부러움, 질투, 질투, 불타는 질투가 엉겨 붙어 공연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도 많은 눈물이 오고 갔지만, 내 무대의 커튼을 내린 공연과 다시 젖혀 올려 준 공연의 감정을 이기지는 못한다. 아직도 음원 하나 못 낸 채 음악가를 참칭하고 있는 나지만, 당신이 나에게 백스테이지의 낭만을 상기시켜 준 그날을 내 2막의 시작으로, 그것도 꽤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4년이 흘렀다. 나의 예쁜 여름밤 별자리였던 그 솔리스트는 철이 돌아오기도 전에 무심히 떠났다. 지독한 짝사랑에 지친 당신은 친절히 가면을 벗어주었고, 일방적인 싸움과 화해의 끝에 이제는 눈을 마주치기도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 나이에 당신은 1집을 냈더라. 당신을 처음 만난 그 곡이 들어있는, 강남역 4번출구 뒤편 술냄새 나는 거리가 떠오르는 명반이었지. 이제는 당신의 공연도 가지 않는다. 나의 피리부는 사나이였던 당신이 기억 속에 언제나 넓은 어깨의 영웅으로 남아야 하는 탓이다. 당신 말고도 난 눈물로 존경을 표할 수많은 멋진 예술가들을 안다. 어제도 좀 울었다. 당신보다 젊고 귀여운 피아니스트의 대관식 무대를 끌어안고 간만에 실컷 울었다. 근데 어째 우리의 2019년이 자꾸만 떠오르더라. 아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도 부끄럽지 않던 그때로 자꾸만 돌아가고 싶더라. 그리운 시간들이 가고 남은 미지근한 겨울밤, 참으로 볼품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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