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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Mar 03. 2023

밝혀져야만 한다면, 과학적으로

현상과 진리, 속세와 신 사이 과학은 어디쯤일까

최근 몇 주간 과학철학을 어설프게나마 들여다보며 읽고 듣고 느낀 것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Nancy Cartwright - No God, No Laws

'신이 없다면,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 속에서 낸시 카트라이트는 어째서 과학법칙, 특히 물리법칙의 정의 자체가 신이라는 초월적 설계자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지를 논한다. 그녀는 과학철학계의 세 가지 대표적 입장에 입각해 법칙의 개념을 규명하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각 시각에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하지 않는 한 가지가 존재하며 이를 설명 내지 가능케 하는 방법은 관측할 수도 없고 규명할 수도 없는 절대자의 존재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다만 이는 유신론적 입장 혹은 지적 설계론을 옹호하려는 시도가 아닌, 도리어 과학에서 물리법칙과 같은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논증이다.


법칙 Laws of Science - 과학법칙이란 단순한 현상의 기술이 아닌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해야 한다. 법칙은 현상을 통치(governance)하는 지위를 가진다. 또한 법칙은 자연의 책(Book of Nature)에 쓰여 있다 - 법칙의 결과가 현실에서 유의미하게 관찰될 수 있어야만 한다.


과학적 경험주의/논리 실증주의 Empiricism - 경험주의자들은 자연에서 관찰되는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거부하며, 현상을 그저 사건의 나열로만 관찰한다 - "하나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일이 일어나야 할 필연성은 없다. 필연성이란 오로지 논리적 필연성뿐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1) 이런 사건들 중 자주, '규칙적으로' 함께 발생하는 특정한 일련의 사건들이 법칙을 통해 기술된다. 이때 경험주의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규칙들이 실제로 사건들의 순차적 나열을 강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왜 규칙적인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인다. 인과성을 도입하지 않고서 법칙의 위상을 해명하기 위해 경험주의자들은 특정 규칙성이 다른 규칙성보다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고, 심지어는 임의의 환경에서 모두 적용되는 '필연적인'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blue-blood empricism의 시각을 견지하기도 한다. (애초에 이러한 전제가 경험론적이지도 못할뿐더러) 카트라이트는 이러한 시도는 모두 과학의 구조에 경험주의적 사고를 끼워 맞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법칙의 진정한 특성을 규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경험론적 시각과 통치주체로서의 법칙의 지위가 양립하려면 '과학법칙은 신의 청사진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에서 관찰하는 일련의 사건은 단순히 규칙적으로 관측될 뿐이고, 이는 신적 존재의 계획 - 법칙 - 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주의 Platonism - 과학적 플라톤주의자들은 현상 뒤의 추상적, 선험적 실체가 존재한다 믿는다. 이러한 추상적 원형의 개념은 법칙의 설명에 있어 긍정적인데, 사실 F=ma 등의 법칙은 힘과 가속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 사이의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이때 blue-blood empricism에서도 제기되었던 '규칙의 필연성'이 해소되는데, 힘이라는 추상적 원형은 F=ma의 관계성을 지니지 않고서는 그 본질이 훼손되기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주장이다. (the abstract quantities force, mass and acceleration must relate in the way we record in ‘f=ma’, otherwise they would not be the very quantities they are.)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추상적 층위에서의 연관성 내지 필연성이 물자체의 세계에서 투영되는지는 여전히 규명하지 못한다. 추상적 층위의 관계는 본질에 대한 논의이며 외부 세계의 역학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개입하는 힘' 또는 '매개하는 힘'이 신의 손이지 않고서야.


도구주의 Instrumentalism - 도구주의자들은 법칙의 권위 자체를 거부한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과학법칙과 공식은 현실에 대한 정밀한 예측과 변용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 그것이 새로운 지식이 되건, 실용적인 공학 발명품이 되건간에 - 데에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과학법칙은 모든 경우에 대해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패러다임과 설명의 층위 내에서만 작동될 수도 있으며, 그때그때 다른 방식으로 법칙을 사용하고 심지어 모르는 것들을 공란으로 두어도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트라이트는 이러한 일종의 다원적 시각에 상당히 흡족해한다. 법칙의 두 번째 특성에 의거해 현실에서 법칙의 결과가 규칙적으로 관측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주 철저하게 통제되고 이상화된 환경 내에서만 근사된다는 점에서다. 거시적 차원에서 법칙이 위배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물체를 법칙의 규칙성이 유지되는 최소 규모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분석하지만, 카트라이트는 이러한 시도에 회의적이다. 물리현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거대한 상호연결성을 띄고 있기에 한 가지 법칙만이 지배하는 영역을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이 때문에 잘 통제된 상황 하에는 여러 규칙의 적확한 작용을 통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녀는 법칙의 성질에 대한 규명에서 회피한 도구주의가 오히려 법칙과 신성 사이의 관계를 더 잘 규명한다고 본다. 신 또한 법칙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규칙성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복잡계에 가까운 현실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측정하는 도구로써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경험론이 가지는 인과성의 문제, 플라톤주의가 가지는 본질의 현현에 관한 문제로써 자유로워지게 한다.


큰 물체들은 (법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운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구성요소들은 그렇다... 혹은 그 요소들의 요소들, 혹은 그보다 작은... 그 끝에 우리는 기본입자의 개념에 도달한다. 기본입자들은 언제나 규칙에 맞춰 운동하고 - 혹은 우리가 그렇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진정한 과학법칙은 기본입자와 관련한 표준모형의 물리학뿐이다. 나는 이러한 이론이 의심스럽다. 왜 이런 핵심적인 규칙성들은 모두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역에서만 존재하는가? 반대로, 내게 있어 확실한 단 한 가지 규칙성은 아주 쉽게 관측할 수 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Large things may not behave in properly regular ways, but their components do…or the components of the components, or… In the end at last we reach the fundamental particles. These do behave regularly – or so we say. In the end the only genuine laws of Nature then are the laws of the physics of fundamental particles. I am suspicious of all this. Why are these very central regularities all just where we cannot see them? By contrast, the one regularity I am really sure of is highly visible: All men are mortal.

- Nancy Cartwright, <No God, No Laws>, pp. 16-17



Hasok Chang - Realism for Realistic People

과학철학자 장하석의 최신 저서이다. 온도계로 대표되는 측정과 단위의 중요성, 물 분자가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식의 당위성 등,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당연한 개념들의 출처에 자주 질문을 던지는 그는 과학지식의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Realism for Realistic People>은 그간 실용주의에 얽힌 많은 오해를 풀어내고, 리얼리티가 아닌 이상만을 좇는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곡해한 리얼리즘의 깃발을 뺏어와 진정한 의미의 과학적 리얼리즘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분량이 많아 다 읽지는 못하였지만, 가볍게 훑으며 파악한 장하석식 'activist realism'의 큰 줄기들을 요약해 본다. 특히 장하석이 낸시 카트라이트를 사사했고 함께 저술활동도 했다는 점을 떠올리며 읽으면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실용주의 Pragmatism - 장하석은 실용주의에 씌워진 온갖 오명을 바로잡고 기타 과학철학관, 특히 과학적 실재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실용주의의 가치를 역설한다. 실용주의가 지식에 있어 절대적/객관적 진실과 진리의 가치를 거부하고 각 개인에게 있어 편리한 체계만을 상대적 진실로 규정한다는 시각은 실용주의에 대한 큰 왜곡이다. 실용주의적 시각에서 객관성을 파악하는 기준이 관측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에 대한 담론이 아닌 실제 현상계에서의 작동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뿐이다. 실용주의가 기술 등 단순히 '실천적인' 지식만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며, 실천은 과학의 전 영역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추상적 이론에 대한 실험적 검증 또한 지식의 실천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실용주의는 과학이 인간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주지 시키는 데에 가장 큰 의의가 있으며, 인간의 감각기관이 보장하는 영역만이 실질적인 지식 추구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결국 실용주의란 경험주의의 극단이며, 인식주체가 현상을 이해 중심 - 명제적 지식 - 이 아닌 행위 중심 - 적극적 지식 - 으로 해석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푸가의 실용주의적 해석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흐의 걸작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의 고양감이다. 이런 곡들이 군인들의 행진에 도움을 준다는 식의 '실천적인' 효용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음악의 진정한 실용주의적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The pragmatist vindication of the fugue is in the experience of elation that countless listeners have felt in hearing Bach’s masterpieces; whether such musical pieces can be put to ‘practical’ uses such as helping soldiers march in step is irrelevant to their pragmatist appreciation.

- Hasok Chang, <Realism for Realistic People>, p.6


Operational Coherence - 이러한 지식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하석은 지식의 가치와 참 거짓의 여부를 'operational coherence'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것을 주장한다. '작동 일관성' 정도로 직역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식간의 논리적 인과성 또는 엄밀성을 따지는 것이 아닌, 특정한 현상 또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해당 지식체계가 조화롭게 작동하는지를 중점으로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이어 고무의 재질에 따라 변화하는 아스팔트 도로와의 마찰계수'이라는 지식은 다른 과학지식들과 조화롭게 맞물려 '자전거의 제동'이라는 행위를 가능케 하고, 이때 해당 지식은 operationally coherent한 지식이 된다. 이는 해당 과학 지식이 실질적으로 현실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현실의 어떠한 부분에서 지식이 활용되는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이에 장하석은 더 많은, 더 좋은 지식에 대한 추구를 더 operationally coherent한, 즉 현실의 더 많은 메커니즘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는 지식체계에 대한 추구로 해석한다. (결국 기본 모형 등 측정할 수 없지만 현실의 작동원리를 규명할 수 있는 지식체계도 이에 해당한다 느껴질 수 있지만, operational coherence의 가장 큰 시사점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만 한다면 논리적으로 충돌할 여지가 있는 여러 지식체계가 양립할 수도 있다는 점, 절대적인 참이 존재하지 않고 참에도 질적 요소 - 어느 정도 참인지 - 가 존재한다는 점이지 않나 싶다.)


Activist Realism, Humanist vision to Knowledge - 적어도 과학철학의 담론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는 그 본질적 빛을 잃고 있다.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려는 목적을 가진 이상 충분히 리얼리즘적인 시각을 견지하지 못한다. 이에 장하석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의 일종으로 그의 관점을 'activist realism'(활동적 사실주의)이라 명명한다. 그의 activist realist 기조에 따르면, 과학의 목적은 현실에 대한 이해를 극대화하고 인간과 현실 사이의 접촉을 최대화하는 데에 있다.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는 1) 어떤 지식이든지 일단 확보하는 것이 인간에게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와 2) 끝없이 발전하려는 욕망 또한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이때 발전은 분명한 목적론적 촉매에 의해 계기되지 않고, 지식의 양적/질적 풍요로움을 위하여 권장된다. 결국 단순한 앎의 즐거움이 가장 이상적인 발전의 동기라는 것이다. 인간이 관측하는 현실의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장하석은 본인의 리얼리즘과 힐러리 퍼트넘의 내재적 리얼리즘 (internal realism)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현실은 각 개인의 기준에서 mind-framed 되어 있지만 mind-controlled 되지 않는다. 즉, 각자가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다르지만, 적어도 각자의 세계들 안에서 각각 성립되는 진실의 체계는 왜곡되지 않는다. 70억 개의 리얼리티에서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체계란 추상적인 절대적 진리의 체계가 아닌, 이 지구 위에서 실제 행동으로 옮겼을 때 작동하는 지식의 체계다. Activist realism이 지극히 다원론적인 사상이지만 동시에 객관성을 상실하지 않는 이유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를 탐구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인식 체계를 방법으로 삼으며, 인간 현실의 개척을 최우선과제로 놓는 장하석의 시도를 가장 인본주의적인 과학철학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여담

과학철학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크게 두 가지인데, 과학기술에 느끼는 회의감을 극복 내지 이해하려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그나마 가장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이 과학철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실패했다. 과학철학의 주요 논쟁이 결국은 논리와 과학적 방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국 나의 숨통을 조였던 것들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 외의 논의들도 많지만, 특히 분석철학에 기반을 둔 영국의 과학철학은 확실히 논리적 접근에 대한 의존이 강하고, 결국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적 사고가 타당한가'라는 논의는 현재의 과학적 사고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논리로 기존 논리를 반박해야 하고, 그 주장의 합불 여부를 다시 논리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나는 답을 위한 끝없는 싸움에 지쳤다. 오히려 내가 그나마 흥미를 느끼는 쪽은 과학기술사회학(STS)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절을 떠나려던 중이 머리 반만 깎고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솔직히 이 글도 왜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시작했으니까 끝은 내야겠고...)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꼴 보기 싫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정말 수치의 나열로 이해되어버릴까봐 두려웠다.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끌어안고 실컷 낮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래도 예술이랑 조금은 더 닮았을 것 같은 과학철학은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엄청나게 순진하고 오만한 건 아니었을까... 제일 섬뜩한 건, 이걸 또 공부하라면 할 수야 있겠다는 것. 지난 몇 년간 해 왔던 것처럼 관성에서 존재근거를 찾는 시지프스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렵다. 아무래도 당분간 과학을 아예 떠나야 할 것 같다. 강물은 생각보다 얕아서, 몸을 완전히 던지지 않으면 물결을 따라 흐를 수 없다.


그래도 나름 재밌는 시간이었고, 나중에 마음이 편해진 후에는 다시 종종 들여다보지 않을까 싶다. 최근 장하석 교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인본주의와 자연과학'이라는 주제였는데, 과학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이 행하는 학문이기에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과 오류가 혼재할 수밖에 없고, 과학의 목표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절대진리에 대한 추구 대신 앎의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동기에 집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의미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앎 자체에 숨이 찬 나에게는 사실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그 순수한 동기가 나한테는 이미 고갈되고 없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렸다. 예술이나 감정 같은 인간의 성역이 과학적으로 규명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그리고 그게 가능할지. 무척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그리고 현재 방법론의 기준으로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하시면서도, 몇 가지 깊은 통찰을 제시해 주시면서 마지막에 덧붙이셨다.


"(인간의 감정 같은 개념들이) 이해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만약 그것들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 방법은 과학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올바른 과학에 대한 신념을 모두 가진 이 멋진 어른의 대답이 나는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다.




(1) 카트라이트가 empiricism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해당 인용을 포함했고, 공격하고 있는 사상적 핵심이 '인과성의 거부'인 점으로 보아 그녀가 지칭하는 empiricism은 좁은 의미에서의 영국 경험주의가 아닌 논리 실증주의 등의 사상적 후손을 모두 포괄한 것이라 본다.


참고 및 인용 출처: No God, No Laws (Nancy Cartwright 저), Realism for Realistic People (Hasok Chang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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