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본가에 내려갈 때면 한 번씩 책장을 뒤진다. 누렇게 빛바랜 격자들 속에는 내 학창 시절이 그대로 있어서 꼭 해리 포터에 나오는 펜시브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삼국지를 열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인가 하는 별 이상한 말에 오기로 10회독을 다 채웠던 이문열 평역 삼국지(알고 보니 삼국지 열 번 읽은 사람은 위험한 오타쿠이니 피하라는 뜻이라던), 중2 소년의 알 수 없는 감수성으로 읽어 내려가 지금은 내용도 가물가물한 하루키의 소설들. 심심한 밤에 한 권씩 꺼내 훑다 보면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감상과 해석이 떠오르는 통에 원래 이런 책이었던가 놀라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하다.
그중 가장 소중한 자료들은 책상 밑 깊숙이 작은 선반 속에 보관한다. 책상 그림자에 가려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는 너덜너덜한 악보 몇 묶음과 어린 내가 글을 썼던 공책들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 경찰수첩 모양 표지의 노트에 아무렇게나 쓰다 말았던 추리소설 한 권. 과학학원에서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숙제로 써 갔던 과학일기 네 권. 중학교 시절 아랫집 선생님 댁에서 논술 수업을 받으며 이런저런 에세이와 사설을 썼던 공책 두 권.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비문들도 당연히 많지만,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오는 구절들도 있다. 어린 나는 그런 글을 쓰고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고, 그런 글을 쓰고도 더 좋은 표현에 대한 욕심이 나곤 했다. 매일 브런치를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는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필력과 담력을 좀 빌려오고 싶은 심정이다. 순수함과 엉뚱함이라는, 누구에게나 딱 한 시절만 허락되는 재능을 가지고 글을 쓰던 그때가, 많이 그립고 질투 난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도.
<부지런한 사랑>을 읽으며 몇 번이나 눈물을 참아야 했던 것도 비슷한 그리움에서 일까. 여덟 살 소년부터 열여덟 청소년까지, 작은 사람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며 이슬아 작가는 그들의 글에서 발견했던 수많은 반짝임들을 기록한다. 우아한 친구를 보고 난 그냥 시끄럽게 살아야겠다 다짐했다는 글에 담긴 자기애와 당당함을 사랑하게 된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두 왠지 모르게 야하게 느껴진다는 아이에게는 그 악의 없는 호기심과 편견에 의외로 깊게 고민하게 된다. 남자애들은 다 바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볼까 하다가 조용히 웃음으로 답한다.
문법적으로도 서투르고 세련되지도 않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글들에서 오랫동안 맡아보지 못한 향기가 난다. 논리는 이곳저곳에서 점프하고 왜 굳이 이 단어인지 모를 선택들이 남발하지만 대번에 이해되고 만다. 투명하고 담백한 솔직함에 설득될 때도 있고, “티백처럼 손쉽게 건져진 뒤 물기를 쫙 빼서 곶감처럼 말려진 느낌”이라는 표현에 혀를 내두를 때도 있다. 본인도 졸필인지라 기술적으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마음 속에 오래 남을 문장들이다.
책의 후반부에 전문적인 글쓰기에 대한 값진 고민이 이어지지만 어쩐지 깊게 이입하지 못했다. 팔아야 하는 글, 좋은 글은 분명 객관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논리적이어야 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아이들의 미숙한 글들을 더 읽고 싶었다. 어쩌다 한 번 시집 속에서 참신한 표현을 발견하는 귀한 경험이 이 아이들의 작품에서는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 오른다. 보통 말하는 기술적으로 좋은 글이 어쩌면 소중한 무언가를 결여시키는 작법이라는 생각이 들 때, 어째서 이슬아 작가가 아이들의 실수 가득한 원고지에 많은 교정작업을 하지 않았는지, 어쩌면 교정하는 손이 머뭇거려지지는 않았을지 공감하게 된다.
언어적 표현의 실험실로서 글쓰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란 결국 모두의 유년기가 아닐지 생각한다. 언어의 의미 체계가 일반적 사고의 틀에 맞춰 재단되기 이전의, 개념과 낱말이 아직 느슨하게만 연결되어 모든 표현이 모두 옳았던 시절의 언어를 되살리는 것이 곧 시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른들의 머릿속엔 이제 견고한 국어사전이 하나씩 있고, 내용은 대부분 비슷해서 세상을 표현하는 방식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우리와 같은 한국어로 말하는 것 같지만 이들이 구사하는 것은 실은 전혀 다른 언어다. 그들의 말을 내가 가진 사전으로는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었고, 그게 서러워서 자꾸 울컥했다.
좋은 글은 그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기술적으로 좋은 글과 마음에 남는 글. 논리적이고 균형 잡히고 읽기 쉬운, 기술적으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우리는 지금껏 공부했고 그 연습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너머에 닿기 위해서는 체득한 기술 중 몇 가지를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충동에 맡겨 단어를 선택하기, 가끔은 쓸데없는 형용사를 마구 남발하기, 반복과 주술호응 같은 건 일단 신경쓰지 말고 써보기. 그런 불편한 의외성만이 끝에는 가장 인간적인 글, 끝까지 살아남는 글을 낳는다 믿는다. GPT 같은 인공지능 언어모델은 이전 단어들 이후에 배치될 확률이 가장 높은 단어로 문장을 이어나가지만, 그렇기에 아직까지 요약이나 보통의 대화 같은 객관적 작문 능력에만 국한된 것처럼.
이슬아 작가는 “내가 모르는 걸 가르쳐줘서”, “몰랐던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고 써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아이들에게 답한다. 그들의 느슨하고 유연한 틀로 사유하고 글 쓰는 일, 무엇이든 미워할 수 있고 그러다 또 과감히 껴안을 수 있는 마음. 그런 자세라면 분명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부지런히 글을 쓴다. 서툴러서 더 아름다운 문장들을 닮고 싶어 고민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제나 뒤로 걷는 작업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알 수 없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당당했던 책상 밑 나의 글방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