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무덤을 찾아다니냐면요
※덕질 전문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덕질이 집요한 노력과 변태적인 열정을 요하는 일이지만, 클래식 음악 덕질은 그중에서도 좀 특이한 편이다. 동시대의 연주자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아니고서는 (이것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닌 것이,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협연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11월 내한공연의 제일 싼 자리 가격이 10만원, VIP석은 무려 55만원이다. 55만원, 아니 55만원이 무슨 예당 앞 동네 개 이름도 아니고) 클덕들의 덕질 대상이 대부분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짧으면 몇십 년, 길면 삼백 년 전 죽은 사람들이다 보니 새로 풀리는 떡밥도 많지가 않다. 슈만 부부와 브람스의 미묘한 관계나, 쇼스타코비치가 정말 스탈린에 저항한 문화투사였는지 같은 고전 떡밥이 여전히 메이저한 망붕 대상인 가운데, 진짜 고인물들은 네다섯 시간짜리 바그너 오페라를 듣거나 돈 주고 리게티며 루이지 노노를 들으러 가는 기행에 빠진다. 아이돌 덕질하는 동료들이 데뷔 몇 주년 공구를 진행할 때 우리는 서거 몇백 주기 특별 공연을 예매하고, 생일카페 대신 묘지와 기념관을 찾아가고…….
그중에서도 내 주변 많은 머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무덤 투어다. 클래식 음악가들뿐만이 아니라 좋아하고 기억에 남는 인물들의 묘가 근처에 있다 하면 애써 시간을 내 찾아가본다. 볼 것 먹을 것 많은 여행지에 가서 굳이 공동묘지를 찾고, 심하면 그 사람 무덤 하나 보겠다고 여행지를 선정하는 기괴함에 동행하려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지난 여행들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로 묘지 방문을 꼽는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른 묘지의 분위기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이국적인 경험이 있다. 이 시대의 것이 아닌 이름들, 차가운 석판들 사이에서의 산책만이 주는 반짝임이 있다. 내가 올해 찾았던 묘지 몇 곳을 돌아보며 묘지가 생각보다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것과, 몇백년의 시차를 두고 벌이는 지독한 덕질에 대한 변호를 적어보려 한다.
처음 가 보는 파리, 기대 가득했던 3월의 여행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꼽았던 장소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담에 지독하게 감겨 겨울 한 철을 났던 터라 쇼팽의 무덤을 거치지 않는 파리 여행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여행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뤽상부르 공원 앞 숙소에서 파리 20구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까지 50분을 이동했다.
파리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이자 세계 최초의 공원식 묘지인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는 440만 제곱미터의 넓은 부지 위에 근교 공원 같은 분위기로 조성되어 있다. 키 큰 나무로 둘러싸인 오솔길과 언덕 위의 작은 성당으로 향하는 산책로는 정말 동네 수목원에 운동하러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는 내부에 추모 공간이 있는 석실이나 조형물의 형태를 띤 아름다운 묘지들이 많다. 봉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덕인지 공동무덤을 걷는다는 느낌이 덜했고, 오히려 잘 꾸며진 야외 전시실이나 기념관을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입구에서 쇼팽의 무덤 위치를 확인하고 지도를 끈 후 발라드 1번을 들으며 무작정 걸었는데, 역시나 길을 잃고 언덕 꼭대기까지 오르고 말았다. 20분을 더 헤맨 끝에 겨우 쇼팽으로 가는 길을 찾았지만, 덕분에 마르셀 프루스트나 조르주 비제 같은 다른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다른 쇼팽의 무덤은 웅장하다기보단 그의 음악처럼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끈적한 무언가가 가슴께에 얹힌 느낌으로 한참을 서성였다. 쇼팽의 오른쪽에는 재즈 피아니스트 미셸 페트루치아니가 묻혀 있었다. 상상도 못 해본 조합이지만 제법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도 낭만을 직조해 내는구나, 역시 낭만에 미친 나라, 혹은 내가 미쳤거나.
오솔길 양 옆에 즐비한 석탑들에는 제각기 추모객들이 놓고 간 꽃이 놓여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화단에는 들꽃이 하나둘 피고 있었다.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둘이 어쩌면 잔디 덮인 봉분보다 더 뚜렷하게 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 키보다 조금 높은 돌 건축물 사이는 돌담길을 걷는 듯이 아늑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오래된 도시였다. 수많은 백골이 묻혀있다는 사실보다, 묘한 반가움으로 거리를 내어주는 이국적인 공간 자체에 더 마음이 머무르게 하는. 순간 묘지에 묻힌 수많은 명사들이 아닌 내가 단독 주인공인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숙소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는 것과 작곡가 카미유 생상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간 곳이다. 파리 일정 마지막 날 아침, 좋아하던 카페에서 라떼를 테이크아웃해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를 산책한 후 돌아와 체크아웃하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지만, 늦잠자서 커피고 뭐고 뛰어갔다.
먼지 쌓이고 녹슬어 조금은 쓸쓸해 보이던 생상의 묘보다 기억에 남은 건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함께 묻힌 묘,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의 묘였다.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의 비석에는 키치한 낙서와 키스자국이 가득했다. 보들레르의 묘에는 역시 수많은 키스자국과 함께 돌을 얹어놓은 파리 지하철 티켓으로 뒤덮여 있었다. 시대도 사조도 꽤나 다른 두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추모하는 방식이 비슷하게 격렬한 것이 재밌었다. 한 시인은 19세기 낭만주의 열정의 정점으로, 두 사상가는 마지막 자유의 물결이던 68혁명의 상징적인 존재로, 프랑스인들의 정신과 자부심으로 남았을 테다. 사랑에 부끄러움이 없는 이들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 잠시 부러워졌다. 그들의 정신적 뿌리에 여전히 큰 자긍심을 가지고 계승해 나가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나머지 감상은 몇 달 전에 썼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대한 글로 갈음하려 한다.
시내에 더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지 몽파르나스는 페르 라셰즈보다 더 아담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 주변 학생들이 등하교하는 지름길로 뛰어다닐 것 같은, 동네 공원의 친숙한 분위기. (실제로 사르트르가 살던 몽파르나스 대로의 집에서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가 내려다 보였다 한다)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그곳에 묻힌 사람들의 개성에서 나오는 것일지, 단순히 지리적 특성에서 생긴 것일지 궁금해진다. 적어도 사르트르는 그곳에서 단 하루도 지루할 틈이 없을 테다. 어쩌면 너무 시끄러워서 좀 쉬고 싶다고, 페르 라셰즈로 옮겨달라고 불평하고 있을지도.
클래식 덕후가 빈에 왔다면 중앙묘지를 빼놓을 수가 없다. 가히 올스타급 라인업 -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쇤베르크, 리게티 - 을 자랑하는 이곳은 빈 시내에서 역시 40분 정도 이동해야 하는 외곽에 위치해 있다. 동행인을 이끌고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를 들으며 중앙묘지의 음악가 구역을 한 바퀴 돌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억에 남는 묘지는 아니었다.
베토벤의 비석 앞에 섰을 때나 바로 옆 슈베르트의 무덤을 바라보며 느낀 감동이야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사람과 역사에 대한 감동이었을 뿐이지 공간이 주는 특별한 매력은 찾지 못했다. 2.4 제곱킬로미터의 광활한 평지를 채우기 위해서인지 도로는 큼직하게 잘 깔린 자갈길이었고, 잘 정리된 구획마다 명사들이 뚜렷한 콘셉트에 맞추어 매장되어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걸어도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밤에 가면 귀신이 튀어나올까 무서울 법한 다른 공원형 공동묘지보다 빈 중앙묘지가 내게는 더 스산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이는 어쩌면 내가 빈이라는 도시에 느낀 묘한 반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착했을 때는 세상에 여기가 빈이야 모차르트가 있었고 베토벤이 슈베르트가 어쩌구 저쩌구 세상 모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 도시가 선전하는 역사의 고압감에 나는 곧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랑할 만한 것이 그들이 살았다는 사실밖에 없다는 듯이 어디를 가도 여러 음악가와 미술가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고, 심지어 내 호텔 방의 이름은 ‘프란츠 리스트’였다(리스트가 빈에서 그렇게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낭만에도 분명한 치사량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예술에 미친 그 도시에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불평해 보자면, 빈은 박물관으로 먹고 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과연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슈베르트가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 학생 4유로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슈베르트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아노와 자필 악보 몇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 나와 내 동행인은 4유로=1슈베르트 라는 화폐단위를 만들어 남은 여행 내내 죄 없는 불쌍한 프란츠를 조리돌림하다…… 그만하자.
여튼, 다른 묘지들에는 살아있는 방문객들을 위한 힐링 요소들이 숨어 있다면, 빈 공동묘지는 죽은 자들의 이름만이 지배하는 황량한 벌판 같았다. 큰 도로와 잘 정비된 공원으로 치장해 놓았어도 상상 속의 묘지들보다 더 싸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건 아마 도시 전반에 그 이름들의 모티프가 반복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빈의 매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나의 악의적인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 전체가 하나의 화려한 영묘와 같이 느껴졌다. 무지크페라인의 황금빛 야경도, 벨베데레 궁전의 웅장한 정원도 어쩐지 찝찝하고 우울했다. 건강한 덕질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시간.
이번 여름 내내 영월에 가고 싶었다. 어린 왕 단종의 유배지와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를 꼭 보고 싶었고, 간 김에 나도 한동안 유배당하고 싶었다. 역시 같이 가겠다 나서는 동료는 많지 않았고, 여러 번의 설득과 조정 끝에 9월 초가 되어서야 당일치기로 다녀오게 되었다. 왜 갑자기 영월이고 김삿갓이냐면, 글쎄…….
김삿갓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이문열의 소설 <시인>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은사님께서는 문학 수업에서 다룰 작품으로 <시인>을 들고 오셨다. 이 범상치 않은 큐레이션에 갸웃하던 나는 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출세하기 위해 조부를 부정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평생 팔도를 유랑하며 동시대 서민의 삶을 시에 담은 김삿갓. 그가 내적 침잠의 시기에서 적극적인 사회 비판으로, 풍자와 해학에서 언어를 넘어선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궤적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담은 문학의 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무덤 이야기로 돌아와서, 김삿갓의 묘는 김삿갓계곡이라 이름 붙여진 영월 산골짜기의 계곡 위에 위치해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계곡이 보이고, 뒤로는 푸른 산이 버티는 고즈넉한 풀밭에 자리한 그의 봉분은 꼭 그 계곡을 지키는 신선의 자리 같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보던 묘의 모습이어서 반가우면서도, 유럽에서 봤던 화려한 묘들과 비교해서 다소 밋밋한 느낌도 들었다. 비석에 흐릿하게 남은 한자를 읽지 못한다면 그곳이 조선 최고 민중시인의 묘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죽어 묻히고 싶은 땅을 고르라면 나는 고민 없이 영월을 고를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내려다보며 내 났던 땅 속으로 겸허히 돌아가는 일, 생전의 나를 과시하지 않고 남겨두지 않으며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그저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만을 선물해 주는 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낀다. 동서양 묘의 이러한 차이는 슬픔에 대한 서로 다른 방식의 치유로 이어진다. 파리의 묘지가 일상 가까운 곳에 떠난 이를 추억할할 수 있는 여유롭고 따뜻한 공간을 열어준다면, 영월의 언덕은 세상만사에서 초월한 절대적인 평온함을 안겨 주는 듯하다. 슬퍼할 일도, 후회할 일도 없으며, 깊고 거대한 자연 앞에 우리의 현재는 언제나 가볍고 겸허해야 한다는 듯이.
코 앞에 누워 있을 쇼팽을 보들레르를 슈베르트를 김삿갓을 상상하며 그들은 자신이 이곳에 누울 것을 알았을까 생각해 본다. 망자의 생물학적 흔적은 가장 짙게 남아 있지만, 오히려 그의 산 숨결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곳. 돌아보면 무덤은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 이후의 장소여서, 그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무덤에 가는 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이 했던 말조차 그곳에는 없기에. 그곳에 전시된 것은 그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망자의 삶에서 압축해 낸 가치들이다.
그렇기에 묘지는 분명 산 자들을 위한 장소일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우리는 잠시 현실의 고민들을 잊는다. 더 이상 말이 없는, 이제는 두꺼운 돌 밑에 깔려 잠든 사람들을 보며 티끌같은 생존의 순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실감한다. 그 무거운 돌 같은 운명을 넘어 그럼에도 땅 위로 솟아오른 생의 흔적들을 본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세운 비석과 석실과 조각상과 풍경을 보며,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남는 가치들을 떠올린다. 영원히 남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게 된다. 파리에서는 바쁜 도시의 순간들 사이의 멈춤으로, 빈에서는 불멸의 질량을 지닌 비석으로, 영월에서는 한없이 고요하고 깊은 자연으로 주지되는 것들. 이곳을 찾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새 생명을 얻어 또 몇십 년을 이어갈 장면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실망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덕질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사고를 친 연예인에 눈물을 머금고 탈덕할 일도, 취향에 맞지 않는 최애의 신보에 스스로가 막귀가 아닌지 의심할 일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영원히 박제된 그들의 한때, 그것이 내 시선에서 재해석된 2차 창작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이 부재한 지금에야 나는 마침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쇼팽이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는 쇼팽이자 내가 사랑하는 쇼팽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의 진실이 나를 실망시킬 수도 없고, 나의 왜곡이 그를 실망시킬 수도 없으니.
영원히 남는 것들은 영원히 변화한다. 그 삶과 예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수천수만 가지 버전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가며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나간다. 그래서 클덕은 행복하다! 공연장에서 새로운 해석을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덕통사고를 당하는, 무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재생될 떡밥에 갇힌 덕생이란. 그러다 가끔 꽃 한 송이 들고 페르 라셰즈의 언덕을 오르는 거다. 당신의 시대와는 조금 다를지언정 당신이 여전히 이 안에 살아있다고, 그게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