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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pr 09. 2023

침묵을 선택하는 마음

<작별의 의식> - 사르트르의 마지막 선택, 그 너머의 보부아르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 장 폴 사르트르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국문학 에세이를 마무리짓던 나의 룸메이트에게는 (인턴 합격 축하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채점자의 기선을 제압할 기깔나는 첫 문장이 필요했다. 권위 있는 명언을 찾아 함께 인터넷을 뒤지다, 이름은 들어 본 적 있는 한 철학자의 어록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에세이 주제도 주인공의 선택에 관한 분석인지라 냉큼 빌려다 썼고, 저 문장 덕은 아니었겠지만 좋은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꽤 성공적인 선택, 나와 사르트르의 첫 만남이었다. 사실 출처도 불분명한 이 인용문이 정말 사르트르의 말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부끄럽지만 그 후 4년간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그의 이름을 그저 실존주의의 거두, 삶 자체는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나 매 순간의 치열한 선택을 통해 개인 나름의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사상으로 막연히 뭉뚱그려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오랫동안 사르트르에 대해 두 가지 큰 오해를 했다. 첫째는 그가 선택하지 못하는 두 가지 - 탄생과 죽음 -, 특히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것. 둘째는, 분명 계약결혼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고리타분한 편견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의 삶에서 사랑이 가지는 무게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 결과적으로 둘 다 틀렸다. 그의 영원한 사랑이 고백하는 그의 죽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맹렬히 반증한다.



보부아르가 기록한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은 위태롭고 안쓰럽다. <구토>의 로캉탱에게 목격했던, 무의미한 실존의 아이러니를 예술을 통해 극복해 내는 거인의 풍채는,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 빛이 예전만 못하다. 점차 흐려지는 눈, 망가지는 심장. 삶의 완성이 절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키듯, 가장 행복한 순간마다 그는 쓰러진다. “늙으면, 그런 게 대수롭지 않소.” 애써 담담하게 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임박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숨길 수 없다. 그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발견하고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줄이야,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글쓰기의 신경증(la névrose de l'écriture)" - 그에게 글쓰기란 존재의 의미 자체였다. 그는 철학을 넘어 문학으로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자 했고, 작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자랑스러워했다. 긴 세월 동안 치열한 선택과 투쟁을 통해 쌓아 올린 현생의 의미를, 바로 그 세월이 하나씩 뺏어간다. 틀니를 끼게 될 때에는 연설과 토론을 제대로 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하고, 눈이 어두워지자 더 이상 본인의 눈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육신은 앙상해지고, 영혼은 좁은 소도 속에서 힘들게 호흡한다. 파괴에 대한 관음증적 욕구를 형체화한 젠가처럼, 하나씩 빠져나간다. 아주 무너지지 않도록, 천천히.


“사르트르는 언제나 미래를 향해 긴장하며 살았다. 다르게는 살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현재에만 놓여 있으니,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늙고, 육체가 위태로워지고, 반실명의 상태였던 그에게는 미래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용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 빅토르를 의심하는 것, 그것은 곧 후대의 심판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그 스스로 이러한 생을 연장시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반발에도 불구하고, 빅토르를 믿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작별의 의식>


사르트르는 발버둥친다. 그의 기존 사상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그로부터의 전환 - 개인의 언술이 아닌 공동의, 복수의 언술로 - 을 꾀하며, 오랫동안 거부하던 텔레비전 출연을 결심하기도 하고, 그의 비서 빅토르와의 대담의 구조를 취한 책을 집필하기도 한다. 사실 성공적인 선택은 아니었는데, 빅토르가 사르트르의 기존 사상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집필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직접 읽을 수 없기에 결과물의 뉘앙스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영향도 있겠지만, 사르트르는 분명 참을 수 없는 변화의 욕구를 느꼈기에 그 과정을 용인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스스로와 반목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에 서고 싶다는, 다시 젊음을 찾고 싶다는 욕망에게 펜을 내어 준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에 그는 당황하고 실망한다. 세상은 명성 속 그의 모습만을 필요로 하고, 변절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명성은, 결국은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의 생 마지막 선택이 씁쓸한 뒷맛만을 남긴 채, 이후는 운명의 몫, 그리고 남겨질 한 사람의 몫이었다. 최후의 선택 너머의 시간에서, 그를 대신해 또 다른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보부아르가 있다. 사르트르의 시간을 누구보다 오래, 누구보다 가까이서 함께 만들어간 사람. 그녀의 간결한 문장에서는 사르트르를 향한 깊은 이해와 존중, 애정과 연민이 듬뿍 묻어 나온다. 이들의 사랑은 단순한 남녀간의 에로스적 사랑만이 아닌, 수십 년간 서로의 저작을 검토해주며 생긴 동지애, 친구간의 깊은 우정, 그 모든 믿음과 존중의 관계를 아우르는 전인적 사랑과 같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보부아르의 글을 읽으며 사르트르를 애인으로도, 친구로도, 동료로도, 그 모든 것으로도 대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고통만큼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보부아르의 손을 꼭 잡고 1970년대의 파리를 걷는다.


그토록 거칠고 낯선 시간을 항해하는 와중에도 둘은 이전처럼 끝없이 여행하고 독서하고 대화한다. 그들의 영혼의 동반자로서의 관계성에 조금의 먼지라도 묻게 하지 않으려는 듯, 그런 세월이 분명 영원에 이를 것이라는 듯, 충실한 일상의 행복을 이어나간다. 이는 각자 또 함께 내린 선택이다. 그녀와 그의 선택은 별개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에서의 선택은 복선의 선로를 조작하는 일, 상호간의 삶에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보부아르의 ‘작별의 의식’은 자신과 사르트르의 작별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사르트르와 세상과의 작별을 위함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비와 아를레트와 함께 생폴드방스를 향해 떠났다. 거기에서 우리는 1년 전과 거의 같은 생활을 했다. 책을 읽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 산책을 하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프랑스 뮤지크를 들었다. 우리는 카뉴에, 그리고 마그 재단 미술관에 다시 갔다. 사르트르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작별의 의식>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에게 최후의 순간을 고지하지 않는 보부아르의 선택은 사실 사르트르 본인의 선택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자유의지가 무용해지는 운명론적 순간에도, 분명 그는 선택한다. 보부아르에게 그 선택의 버튼을 쥐여줌으로써. 이것은 생전에 사르트르가 본인의 죽음의 순간을 알고자 했던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들의 계약결혼의 규칙 중 하나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었다고 한다. 거짓말 없이 서로의 나약함을 배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침묵이다. 사르트르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그는 보부아르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죽음과 사르트르의 오랜 힘겨루기 끝에 그가 이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사랑이 승리한다. 맞닿아 나아가는 시간 속 같은 선택의 순간을 맞으며, 그 선택이 서로에게 의미하는 바를 아무 말 없이도 분명히 느끼고, 최후의 순간에 그 선택의 버튼을 대신 눌러줄 수 있는 조용하고 용감한 마음, 이를 사랑 말고 달리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사랑에게 자신의 목줄을 넘겨주며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정말, 사랑이 너를 자유롭게 할지도.


“그는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명과 불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짓누르고 있던 위협은, 그가 그것을 더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그의 마지막 몇 해를 우울하게 만들기만 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도 그처럼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침묵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작별의 의식>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함께 묻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묘를 보고 왔다. 기나긴 작별의 의식이 끝난 후에도, 그들 사이를 여전히 흰 천이 갈라놓고 있을 것이다. 보부아르의 위대한 철학을 사르트르와의 관계에 한정 지어 논한다는 건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사상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은 것보다, 둘의 이름이 영원히 나란히 불릴 것이라는 사실에 그들이 더 행복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보부아르, 사르트르, 사르트르, 보부아르... 이미 죽은 그들을 직접 떠나보내지 않아도 되는, 몇 겹의 대리석과 몇십 년의 시간에 가로막힌 내가 저편의 그들에게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정도뿐이다.





지난 10월의 끝자락, 나는 <구토>를 읽고 있었다. 쉬운 책이었다. 책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 날카로운 구토의 감각을, 그날 내가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또다시 부재로 실존을 반추하는 겨울을 나야만 했다.


죽음 앞에 우연성과 필연성을 따지는 것은, 적어도 주변인에게는 무의미하다. 구원의 가능성은 선택의 버튼을 쥔 한 사람 - 혹은 두 사람, 혹은 너무 잔인하게도 그 누구도 아닌 - 에게만 열려 있다.


사르트르는 끝까지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다. 내시경으로 본 내 위벽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 선홍빛 줄이 몇 가닥 그어져 있었다. 그건 그리 용감하지 못한 자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나는 자유로울 테다. 결국 한데 모일 길을 기꺼이 헤매며 도착 전에는 잠들지 못할 테다. 한 쌍의 버튼을 양손에 쥔 채로.


“나는 정원들에 둘러싸인 이 하얀 도시에서 혼자다. 혼자고 자유다. 하지만 이 자유는 조금은 죽음과 비슷하다.”

-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인용 출처: 작별의 의식 (시몬 드 보부아르 저, 함정임 역) / 구토 (장 폴 사르트르 저, 임호경 역)

사진 출처: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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