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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Mar 19. 2023

포격과 항복

그새 까먹었던,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음악을 하며 정말 많은 시간을 연습실에서 보내왔다. 하루에 짧으면 30분, 최고 기록은 열한 시간, 오늘도 네 시간 조금 안 되게... 물론 연습을 안 한 날이 더 많지만, 지금까지 적어도 6000시간은 거뜬히 넘길 것 같다. 다만 노력이 악기 두 개에 나눠 들어간 것도 아쉽고, 지금 실력을 생각하면 그 시간을 다른 데 썼다면 물질적으로는 더 행복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외롭고 고독해질 때가 많다. 안 그래도 고집이 센 나는 자연스럽게 남과 대화하는 법을 잊어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음악하는 친구를 만들라고, 재즈는 합주를 해야 실력이 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법도 잊어가게 되었다.


연습에는 큰 함정이 있는데, 단순히 기술적인 연습에 노력을 쏟는 것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 치기 위해서 죽어라 손가락을 돌리다 보면 어깨는 무거워지고 손목은 뻐근해진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연습실을 걸어 나올 때면 아, 오늘 연습 진짜 찢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연히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건 모든 사람이 안다. 하지만 애써 시간을 내서 하는 연습인데, 이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감에 눌린 나를 육체적 고통이라는 전리품이 자꾸만 유혹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증거가 남아야 안심하는 법이다.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는 연습을 많은 시간 해 왔다.


음악 실력은 계단식으로 늘어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좀처럼 늘지 않던 실력이, 딱 한 가지 사소한 깨달음을 얻자마자 갑자기 늘어있는 경우를 많이 접한다. 이 깨달음은 보통 테크닉이랑은 거리가 멀다. 내가 얼터드 스케일을 얼마나 빠르게 치고 펜타토닉 릭을 몇 개를 외우고 있나 보다, 윈튼 켈리를 카피하다 느낀 찰나의 완벽한 스윙감이나 바흐 연습 중 양손 멜로디의 카운터포인트가 자아내는 짧은 마법의 순간을 들을 때, 심지어는 연습 째고 보러 갔던 영화의 감동이 그 알 수 없는 벽을 넘게 해 준다.


다행히 요즘 나는 연습실에서 그 마법의 순간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 시간낭비는 아닐까 싶어 몇 달 동안 고민만 하던 모차르트 소나타를 처음 연습한 날, 딱 여덟 마디를 친 후 이 곡이 나에게 무언가를 선물해 줄 것을 알았다. 지금껏 내가 연습하며 집중했던 모든 것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피아노를 바라보게 되었다. 재즈와 클래식의 차이라기에는 그냥 내 시야가 좁았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즉흥연주를 할 때 내게 항상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의 밋밋한 모차르트를 통해 즉각 알 수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여서 그런지, 악보와 내가 동의하는 이상적인 터치 하나 셈여림 하나까지 재현해내고 싶었다. 덕분에 나는 "저 요즘 피아노랑 연애해요"라고 말하고 다니던 시기의 두근거림을 오래간만에 연습실에서 느끼고 있다.


어찌 보면 연습이 혼자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착각이다. 곡의 주장을 귀 기울여 듣고, 이런 느낌은 어때 하며 말도 건네보고, 서로 싸우고 화해하면서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는, 끝없는 대화의 과정이다.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하는 나'를 위해서 연습하는 것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위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들리지만, 반복적으로 연습실을 오고 가다 보면 정말 잊기 쉬운 일이다. 애초에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 길고 험난한 수련의 시간을 선택한 건데, 처음의 설렘은 금방 사라지고 건조한 연습실 안에서는 새로움을 찾을 수 없다. 언제나 연습실에 함께 있었던 내 영원한 이상형의 목소리가 문득 스칠 때,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건반에 손을 내민다. 그때서야 내 음악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음악이 시작된다.


이 음악을, 이 책을, 이 사람을 왜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 곧바로 정확한 이유를 대는 건 쉽지 않다. 모든 감정은 세상에 대해 내가 스스로 생성한 해석이지만, 사랑만은 내가 주체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유일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분석할 때, 머리 한켠에서는 그 대상을 어떻게든 내 사고 체계에 끼워 맞추고 입맛에 맞게 오독하려는 이기심이 속삭인다. 더 이상 대상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 솔직해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완전히 잊을 때만 가능하다. 조금이라도 나의 욕망이 우리의 대화에 참견하는 순간, 너는 나의 목적이 되고 너의 형체는 즉시 나의 가장 큰 두려움으로 변한다.


난 그래서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 솔직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다. 고백건대 글을 쓰며 나는 사랑하는 것들의 목에 줄을 걸고 서로 묶어 매달아 놓았다. 튼튼하게 이어진 자기위로적 혐오의 매듭에 핏기를 잃어가는 너희들을 보며, 이래서 내가 너희들을 좋아한다고, 내 목에 걸 다음 고리를 묶으면서 말했다. 너희를 먼저 생각했다면 분명 솔직할 수 있었을 글이 나를 먼저 생각했기에 넋두리가 되었다. 사실 직전 글을 쓰며 나는 채만식에게 죄스러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쓰려했는데, 그 글을 쓰는 데에는 2주가 걸렸다. 정확히는, 더 쓰는 일을 멈추는 데에 2주가 걸렸다. 목적지를 잃어 멈출 수 없는 글, 쓰는 게 그새 재미없어졌다.


창 밖에 비가 온다. 지긋지긋한 영국의 비마저도 미친 듯 사랑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던 계절이 있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 글을 퇴고하는 지금, 내 마음은 다시 사랑으로 가득하다.


썸네일로 쓸 사진 찾으려고 폰 뒤지다가 나타난 포격. 불과 며칠 전 읽었던 구절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너에게도 내가 목줄을 매달 뻔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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