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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pr 15. 2023

일렁이는 캔버스 아래서

네가 잠긴 물빛 받아 사랑이라 할까.

2023. 03


모네의 구름은 분홍색이다.

분명 꽃의, 들판의, 자연의 표정에 물들었을 테다.

빛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하늘이 땅을 굽어보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을 유혹하는 것처럼.

지상의 빛과 말을 겸허히 담아 비추는 모네의 분홍색 구름을 사랑한다.


임윤찬의 사랑의 꿈을 들으며 오랑주리 전시관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물속 깊이 잠긴 채 뿌옇게 흔들리는 수면 위를 올려다보는 듯했다.

내게 뻗어오는 수련의 뿌리일지, 물결에 일렁이는 구름일지.

퉁퉁 불은 나의 손끝에서 번져가는 꿈일지.

분홍 핀 캔버스 너머는 봄이었다.



2022. 06


그는 증거를 찾으러 왔다. 며칠 전 그는 같은 바다에서 누군가가 버린 핸드폰을 찾았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분명히 찾아내고 말겠다고, 신발끈을 묶으며 그는 다짐한다.

그의 입으로 직접 버리라고 말했던 그 증거품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물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저 끝도 없는 바다를 다 퍼낸다 해도 찾지 못할 테다.

곧 무서운 파도가 밀려와 그를 완전히 무너트리면, 사건은 해결된다. 그전에 그는 바다에서 나올 것이다. 잉크처럼 서서히 물드는 미결의 안개 속에서 편안해지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바다를 찾을 것이다. 바다에게 언제나 발목 높이만 허락할 것이다.

그녀가 잠긴 물빛을 받아 사랑이라 부르며.



2021. 09


"따뜻하다."

나를 비스듬히 껴안고 너는 대답이 없었다. 너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나는 따뜻했다. 바닷바람을 맞는 너의 등이 그리 싸늘하게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너가 일을 안 했더라면 너랑은 안 만났을 거야."

"지금 내가 일이고 학교고 다 때려치운다면 어쩔 거야?"

"내가 먹여 살려야지 뭐."

그런 농담에는 진심 어린 악의뿐이어서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었다. 가끔 겹치던 출근시간, 우리는 모란역 계단 앞까지만 우리였다. 수서역을 지난 분당선 열차의 정차간격이 짧아지듯 각자의 속도로 태엽을 감았다. 선릉에서 먼저 내리며 나는 뒤를 돌아본 적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 압구정로데오까지 너를 배웅해 줄 때도, 7번 출구 맞은편 흡연구역까지가 내게 허락된 세계였다. 우리는 서로의 낮을 알지 못했다. 퇴근 후 소주를 먹으며 일터에서 있었던 일들의 불평을 들을 때는 너의 한국어마저 생경했다. 우리는 매일 술을 먹었다.


너의 바다에 난파된 지 벌써 세 달이 넘었다. 나는 도대체 이 바다의 무엇이 궁금했던 걸까. 나는 원주민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다시 짐을 챙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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