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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Oct 17. 2023

아이폰15 언박싱하고 쓴 글

아이폰15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저번 주 단편 원고 하나를 제출했다. 완성했다기보다는 눈 떠보니 마감일이길래 제출했다. 마감 한 달쯤 전부터 이제는 정말 쓰기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분량은 마지막 일주일에 뭐에 씐 사람처럼 휘갈겼던 문장들로 채워졌다. 역시 글은 엉덩이가 쓰는 게 아니라 마감이 쓰는 법이다. 충분히 퇴고할 시간도 당연히 없었다. 아주아주아주 구린 글이 아주아주 구린 글이 될 정도로만 손보고, 한글 오피스도 없는 탓에 피시방을 급히 찾아 겨우 제출하고 나니 오후 10시였다. 정말이지 이런 글도 공모전에 내는 사람이 있다, 연락처만 알았다면 다른 참가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브런치도 독서도 멀리 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글을 쓸 의지는 있었는지가 의문인 것이, 지난 한 달간 맨 정신인 날보다 술을 먹은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글이 가장 잘 써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활패턴을 바로잡으려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새벽 네시까지 술을 먹다 잠들고, 운 좋으면 정오쯤에 눈을 떴다. 숙취에 붕붕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한강진역에 있는 어느 카페를 찾아, 예열을 좀 해야 한다며 현대음악에 관한 책을 좀 들쑤셔보다가 (겨우 300페이지 남짓한 책을 아직도 다 못 끝냈다) 아 정말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하며 몇백 자를 겨우 쓰고는 이만하면 노력했다, 다시 술 먹으러. 그 몇백 자는 다음날 백스페이스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이 안 풀리니 (이 화상은 뻔뻔하게도 일이라는 말을 쓴다) 브런치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의지를 짜내서 몇 개쯤 써보려 할 무렵, 영화 <거미집>에서 튀어나온 ‘평론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 자의 예술에 대한 복수’라는 대사에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이 대사에 찔렸다고 하기도 웃긴 것이, 애초에 내가 브런치에 투박하게나마 평론이라 참칭할 만큼 정갈하고 균형 잡힌 글을 쓴 적이 있던가. 그만큼 투철한 직업의식과 야망과 자의식에 기반해 셔젤을 변호하고 엄태화에 박수치고 양산형 상업영화 돌려까기에 심혈을 기울였던가. 근데 이 신호 대 잡음비 극악의 매체에서, 평론과 리뷰의 개념적 정의 사이에는 애초에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그럼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내 브런치는 평론가가 되지 못한 자의 평론에 대한 복수라고.


박살 난 하루들로 점철된 몇 주를 보내고, 턱살이 두툼하게 자리 잡은 면상을 거울 너머에서 발견할 때면 나는 으레 (그렇다, 이런 일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조소를 떠올린다.


모든 것이 게으름뱅이의 핑계다. 실제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괴로움도 수치심도 없다. 도대체 왜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이냐? 실은 몸뚱어리가 다소 이상해서 그렇다는 둥 엉뚱하고 어처구니없는 고백을 하기도 하는데, 하루에 엽궐련을 쉰 대나 피워 없애고, 술을 들이키려 들면 한 되 이상 거뜬히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그다음에 차를 석 잔이나 마시다니, 도대체 이런 병신이 있는가······.

다자이 오사무, <나태의 가루타>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류의 작가들을 믿지 않는다. 삶이란 것에는 별 대단한 의미도 없다고, 뭐 하러 현실의 자잘한 떡밥들에 낚여 지리멸렬하게 투쟁하냐고 하는 사람들. 데카당스한 일상을 낭만화하거나 인생의 대의를 부정하는 작자들이 작품 뒤에서는 제일 열심히 사는 인간들인 걸 안다. 성공할 때까지 부지런히 동반자살에 도전한 다자이라던지, 망명자의 수고로움을 40년씩이나 굳이 고집한 쿤데라라던지. 이런 우버멘쉬들의 겸양을 보고 있자면 당신들 소설처럼 사는 머저리가 세상에 진짜 있다고 증명해내고 싶은 욕심이 든다.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간 쌓아온 걸 전부 내던진 척했지만 실은 그저 소설 속 인물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부지런한 어느 작가가 알아서 플롯을 완성시켜 주기를 기다리며.


단편 마감 다음 날 하우스콘서트 1000회 공연이 있었다. 네 자리 숫자는, 21년이란 시간은, 그 긴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한 의지의 존재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니지,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니 나를 불편하게 한다. 공연의 지속가능성에도, 연주자의 성장에도, 긴 호흡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요즘 많이 듣는다. 정말 한 치 앞만 보고 살자고 마음먹은 지 채 반년이 안 될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장편소설 속 한 번의 쉼표처럼 어느 페이지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존재가 아닐지, 그런 존재로 남는 것이 온전히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닐지 하는 의심에 나는 매주 월요일을 향한 사랑을 억지로 절제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아니 되도록 빨리 그리고 최대한 많이, 이 과분하게 아름다운 순간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그럴만한 긴 호흡이 내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도 흡연량이 늘어버린 통에.


이런 맥락 없이 개인적인 감상은 브런치에 올리면 안 된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도 글쓰기 플랫폼인 만큼, 작가정신을 가지고 정제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본인 맘에도 안 드는 그 따위 원고를 홀라당 공모전에 내 버린 나한테 더 이상 남은 체면은 없다. 글은 엉덩이가 쓰는 것도, 마감이 쓰는 것도 아니고, 얼굴에 깐 철판이 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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