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 집중과 변주로 버무린 스페셜 비빔밥
※영화 <30일>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0일>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지 어제로 17일째다. 10월 3일 개봉 이래 박스오피스 순위 꼭대기를 한 번도 내주고 있지 않는 이 작품의 조용한 질주는 앞으로 일주일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 본다. 올 추석 연휴를 둘러싼 개봉 경쟁의 숨겨진 승자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래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수정 - 넘겨도 한참 넘겨서 200만을 향해 가고 계신다, 정소민 만세), 한국영화의 무덤이나 다름없어진 최근 극장산업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성과로 보인다. 내 돈 아니라고 지나치게 낙천적인 걸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빅 3’라 불리던 영화들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1947 보스톤>, <거미집>)이 연휴 전날인 9월 27일 와르르 개봉한 것과 달리, 가족 영화와는 결이 다른 로맨틱 코미디 <30일>은 대기업과의 혼전을 피해 안전한 뒤쪽 포지션을 확보했다. 덕분에 명절 대목에서 떨어져 나온 콩고물 같은 중소규모 관객들을 착실히 쓸어 담으며 이른바 ‘빈집털이’, 대박은 아니더라도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장르의 타깃을 정확히 파악하는 집중과 연휴 뒷문을 공략하는 변주, 남녀 주인공 투톱을 확실하게 밀어주는 닥공 전술은 여러모로 9월의 한가운데에 개봉한 <잠>의 흥행도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외적 요소인 배급 전략의 핵심이었던 ‘집중과 변주’는 로맨틱 코미디로서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기억도, 로맨스도 날리고 웃음만 잡았다’는 캐치프레이즈처럼 <30일>은 리얼리즘보다 코미디에 방점을 찍는다. 악몽과도 같았던 노정열과 홍나라의 결혼생활도, 기억을 잃은 후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30일간의 조정기간도 다소 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한 공감을 포기하는 대신, 극단적이더라도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관객에게 의심할 틈을 내어 주지 않는다. '사이가 멀어진 연인이 기억상실 후 다시 사랑에 빠진다'라는 익숙하면서도 가벼운 판타지성이 있는 소재를 딱 그만큼 판타지적인 서사를 통해 정면 돌파하는 셈이다. 진부하지만 역시 안전한 선택이다. 적어도 내가 관람했던 회차에서는 웃음의 타율도 나쁘지 않았다.
큰 줄기에서는 보험과도 같은 안정적인 소재를 충실하게 활용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세부적으로는 여러 장면의 클리셰를 뒤트는 변주가 감초 역할을 한다. 시작부터 식장을 뛰쳐나오는 신부 홍나라 역의 정소민은 시종일관 과감하게 망가지는 공격수의 포지션을 놓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터지는 밈의 재활용과 진지함을 거부하는 클리셰 비틀기 덕분에 K-신파로 향할 것만 같은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고, 결말에 이르러서도 둘 사이의 교감을 한 박자 비틀며 익숙한 억지 감동을 피해 간다. 후술하듯 과한 스텝이 몰입을 방해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무거움을 경계하는 경쾌한 리듬감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츤데레 오작교 역할을 하는 나라 엄마 도보배 역의 조민수가 돋보인다. 그간의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며 영화에 신선한 웃음을 불어넣는다.
다만 너무 웃음에만 집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작위적인 장치들이 산발한다는 점이 아쉽다. 요즘 세대한테는 얼굴만 봐도 웃긴 개그맨인 숏박스의 엄지윤, 코믹 릴리프에 확실한 강점이 있는 윤경호와 이상진 등 주변인물의 캐스팅에서는 분명한 의도가 보였지만, 이들의 캐릭터는 웃음 세트플레이를 위해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소비된다. 정소민-강하늘이라는 검증된 로코 조합에게 힘을 몰아주는 전술로는 성공이지만, 앙상블의 매력은 반감된다. 지나친 변주 역시 패턴화되니 조금은 피곤해진다. 감정선이 고조되는 장면마다 등장하는 개그 포인트, 웃기지 않고 그냥 짜증나는 동생 나미의 개입 등은 관객이 설렘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서사를 방해한다. 내내 폰만 잡고 있어 불안했던 탁호가 결국 제4의 벽을 넘을 때는 한숨이 나왔다. 야구에서 3할 타율이면 준수하다 하지만, 나머지 7번의 스윙에 아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점심식사로 동네 맛집의 육회비빔밥을 먹은 느낌이다. 더 신선하고 정갈한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준비했지만, 막상 먹어보면 결국 알던 비빔밥 맛이고, 그렇다고 맛이 없다는 것도 아닌. 강점과 약점이 일맥상통하는 영화였지만 역시 코미디는 즐거웠으면 됐다. 무엇보다 강하늘과 정소민의 완벽한 케미스트리는 스뎅그릇과 돌솥 정도의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의 만족스러운 가심비를 제공하는 영화에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역시 욕심이다. 아무리 마라가 유행이고 수제버거 전쟁이 벌어진대도, 비빔밥과 제육볶음이 스테디셀러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