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 불과 물, 발화와 진화의 도식
※영화 <어파이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레온과 예술학교 지망생 펠릭스는 발트해 연안 마을의 별장으로 향한다. 다가오는 마감에 불안해하는 레온과 달리 펠릭스는 포트폴리오 작업보다 여가를 즐기고 싶어 한다. 별장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아이스크림 판매원 나디아와 인명구조원 데비트, 그리고 펠릭스가 구가하는 여름날의 즐거움에서 레온은 점점 소외되고, 멀리서 시작된 산불은 점점 별장을 둘러싸기 시작한다.
레온은 온갖 종류의 편견과 열등감에 시달려 나머지 등장인물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는 영화 초반부터 분명하게 제시되는데, 자신의 집이 아닌데도 외부인과 공유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는 레온과 달리 집주인인 펠릭스는 동거인들에게 기꺼이 공간을 내어준다. 위층의 소음에 대응하는 레온의 반응이 거부와 면역이라면, 펠릭스의 그것은 호기심과 포용에 더 가깝다. 이에 레온의 시선을 끈질기게 좇는 카메라와 세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점점 멀어진다. 특히 나디아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숏에서 레온은 창틀 너머로 또는 먼 거리에서 그녀를 훔쳐본다. 레온에게 언제나 투명하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나디아와 대조적이다. 관객이 영화 초반 레온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따라가며 그에 대한 불쾌감을 느낀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화면을 명확히 마주 보는 나디아의 시선에 위축되고 만다.
세 등장인물은 레온이 가지지 못하는 세 가지 매력을 발산한다. 매일 수영하고 사람들과 노닥거리다 대충 찍은 사진으로도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내는 펠릭스에게서는 재능의 매력을, 인명구조원으로 일할만큼 신체적으로 건장하고 친화력이 좋은 데비트에게서는 육체적 능동성의 매력을, 레온이 묘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나디아에게서는 이성애에 기반한 관능적 매력을 발견하는 레온은 곧 이에 대한 질투심에 빠진다. 이는 작가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레온은 항상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지만 실제로는 작업에 제대로 착수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것을 제대로 된 일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데비트의 직업을 비하하는 심술로 이어지고, 뛰어난 글을 쓰지 못하는 부족한 재능에 대한 부끄러움은 펠릭스와의 관계를 악화시킨다.
수영을 좋아하는 펠릭스와 데비트의 세계는 물과 바다의 세계이다. 그에 비해 절대 몸을 물에 담그지 않는 레온의 세계는 불 또는 산으로 대비될 수 있겠다. 다가오는 산불은 레온의 세계를 절삭하며 별장이라는 타자의 공간에 감금된 레온을 더욱 극심한 고립감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원하면 언제든 바다로 떠날 수 있는 이들과 달리, 레온은 언제나 쓸쓸하게 별장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수영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음에도 스스로 선택한 고집으로 내적 공간의 압축을 겪어야만 하는 레온은 질투와 분노에 은은히 불타는 산을 닮았다.
두 세계의 중간자적인 위치에 나디아가 자리 잡는다. 나디아는 근본적으로는 펠릭스와 데비트와 닮은 자유롭고 솔직하며 사교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레온과 가장 적극적으로 소통하게 되는 인물이다. 페촐트 감독의 전작 <운디네>에서 파괴적인 물의 정령을 현현한 파울라 베어는 <어파이어>에서 다시 한번 물의 사람이 되어, 그러나 이번에는 더 유연한 방식으로 레온을 물의 세계로 이끄려 한다. 이와 반대로 레온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휩싸인 채 스스로가 나디아보다 우월함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우월성을 지닌 두 남성과 달리, 아이스크림 판매원인 나디아의 능력은 레온에게는 일견 힘없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레온이 나디아에게만 원고를 보여준 이유이며, 어쩌면 레온이 나디아에게 느끼는 연심의 불순한 발착점일지도 모른다.
나디아에 대한 레온의 관심은 데비트에게 느끼는 질투를 극복하려는 시도로도 파악된다. 나디아와 헬무트는 관계를 가졌음에도 연애 관계로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세 사람은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친구로서 자유로운 일상을 보낸다. 그럼에도 레온은 끊임없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관점으로 나디아를 관찰하며 헬무트를 나디아의 남자친구로 규정한다. 위층의 야릇한 소음이 다시 들려오고, 자신의 옆 침대에 남은 사람이 펠릭스가 아니라 나디아임을 발견하는 어느 밤, 레온의 시선이 내포하는 젠더적 편견이 낱낱이 폭로된다. 레온이 쓰는 소설이 여성의 시점에서 모성적 감수성을 내포하려는 것이 이와 대비되는 아이러니이며 동시에 그가 좋은 글을 쓰지 못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레온은 바다라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숲 속에서 헤매는, 그의 꿈과도 같은 목격담 속에 나오는 불붙은 멧돼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 이때 외부의 세계, 산불에 휩싸인 공간에서 불씨를 가지고 별장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출판사 사장 헬무트이다. 나디아가 사실은 문학 박사생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게 만들고 레온의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헬무트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맡은 지극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이에 별장 근처까지 산불이 번지고, 고장 난 차를 견인하러 갔던 펠릭스와 데비트는 서로를 껴안은 채로 불에 타 죽는다. 물의 인물이 불 속으로 뛰어들고 산의 인물이 물가로 밀려나는 공간적 역전은 어찌 보면 물을 뿌려 - 펠릭스와 데비트를 던져 넣어 - 불이 꺼지는 단순한 화학적 도식과도 닮아 있다. 이는 상실 뒤에야 비로소 그 대상과 화해할 용기를 갖추게 되는 레온의 아이러니를 환기한다.
협소해지는 레온의 심리적 상태와 유한한 공간을 조정하는 불의 이미지는 서로 협응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일견 공감하기 어려운 인물의 심리를 훌륭하게 시각화한다. 레온의 자격지심에서 발화된 분노가 친구를 죽였다는 식의 인과적 관계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산불은 레온을 바닷가, 즉 물의 세계로 내몰며, 다른 인물들이 말하곤 했던 밤바다의 빛을 그제야 확인하게 만든다. 이때 바다를 홀로 바라보는 레온의 시점은 펠릭스가 찍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진의 구도와 닮아 있다. 펠릭스가 죽은 이후에야 레온은 그의 피사체가 될 준비를 마친다. 산이 전부 타 버린 후에야 레온은 바다를 만난다.
예민함과 괴팍함은 예술가의 훈장과도 같은 스테레오타입이다. 이에 따라오는 자기 고립과 침잠은 그의 위치를 세계의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로 한정하며, 세상을 겪지 못하는 그는 절대 세상의 진실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 바뀌기 쉽지 않듯 이 고독을 벗어나는 것 또한 쉽지 않으며 엄청난 에너지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디아가 암송하는 하이네의 시 <아스라>처럼, 노예는 공주를 사랑할수록 수척해질 수밖에 없다. 해결책은 체제를, 세계를 전복시키는 것뿐이다, 거대한 산불 같은 힘으로. 때로는 자신의 세계를 모두 불태운 뒤에야 그곳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레온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이 영화가 던지는 쓸쓸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진 출처: 다음영화, SR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