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텔 Dec 09. 2023

장이머우, 역사적 실험실로서의 영화

<인생>과 <5일의 마중>이 관측하는 현대 중국 역사의 자기장

※영화 <인생>과 <5일의 마중>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이머우는 현대 중국의 어두운 역사가 힘없는 개인을 유린하는 과정에 대해 꾸준히 탐구해 왔다. 장이머우 자신이 문화대혁명 당시 3년간 시골 노동자로 일했던 만큼,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슷한 고초를 당하는 장이머우의 주인공들은 언뜻 감독 자신의 젊음에 대한 헌사처럼 비친다. 어쩌면 이러한 회고적 특성을 반영하듯, 장이머우의 프레임은 역사의 장대한 풍경 대신 주인공 주변의 아주 좁고 개인적인 범위를 담아낸다. 자석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철가루가 자기장의 모습을 시각화하듯이, 시간이라는 공간 (이과 출신에게 다분히 문제적인 표현이지만 넘어가자) 속에서 표류하는 한 개인의 얼굴을 통해 역사의 힘을 실체화한다.


전자기력에 인력과 척력이 작용하듯, 장이머우가 탐구하는 역사의 힘은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인들을 때로는 정방향으로, 때로는 역방향으로 운동하게 한다. 1994년작 <인생>에서 역사는 주인공 푸구이를 단 한 순간도 특정 시간에 머무르게 두지 않는다.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전히 살아내는 푸구이는 불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시대 속에서 그저 다음 장면으로 끝없이 떠밀릴 뿐이다. 반면 2014년작 <5일의 마중>에서 역사는 개인적 시간을 정지시킨다. 문화대혁명이 비가역적으로 파괴한 남편 루옌스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펑완위는 문혁 이전의 루옌스만을 한없이 기다린다. 그녀는 가족의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그저 과거에 묶인 채 매달 5일의 마중을 반복한다. 장이머우의 인물들은 역사적 힘의 작용점일 뿐,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시간축 위를 움직인다.



<인생> - 시대를 따라 달리는 숨 가쁜 마라톤



<인생>은 1940년대의 국공내전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까지 중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푸구이의 시간을 그린다. 이때 시대가 제시하는 모험은 온전히 푸구이의 몫이 된다. 이야기는 푸구이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푸구이가 전쟁에 끌려간 동안 남겨진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비춰주지 않고, 재회한 춘성이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그 흔한 회상씬 한 번 허락하지 않는다. 각 시대는 사회의 원경을 통해 총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다만 한 사람의 좁은 시선으로 관찰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서 경험하듯, 역사는 장중하나 세월은 빠르다.


영화가 곧바로 1940년대의 노름판으로 뛰어드는 것과 달리, 위화의 원작 소설 <인생>은 늙은 푸구이가 지나가던 소설가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원작이 취하는 시선이 이미 지나간 삶의 지난한 장면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관조라면, 영화는 원작의 외화를 벗겨냄으로써 삶의 역동성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는 전략을 택한다. 이른바 망원렌즈에서 핸드헬드로 갈아타는 듯한 효과. 이로써 관객은 푸구이의 이인삼각 러닝메이트이자 취재원이 된다. 카메라는 마라토너의 표정을 담는 일에 집중할 뿐, 풍경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요컨대 대약진운동도, 문화대혁명도, 푸구이의 삶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닌 그저 일련의 사건이다. 역사란 이미 과거가 된 것들에 대해서만 측정할 수 있는 힘이어서, 이를 따라 이동하는 개인들은 그 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전기장의 면을 따라 운동하는 전자는 장의 모양을 알 수 없다.


무작정 달려 나가기만 하는 영화에 리듬을 잡아주는 것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만남의 기쁨 뒤에는 반드시 이별의 슬픔이 찾아오고, 상실의 고통 뒤에는 반드시 극복의 계기가 후행한다. 푸구이는 노름으로 집을 날리고 운 나쁘게 전쟁에 끌려가지만, 덕분에 반동분자로 몰리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벙어리가 된 딸 펑샤는 듬직한 남편을 만나지만 이내 출산 중에 사망한다. 1970년대의 에필로그에 도착한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삼촌을 닮은 만터우의 얼굴을 보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되짚어본다. 그 모든 삶의 파고 중 푸구이의 주체적인 선택은 없었다. 결국 이 리듬 또한 역사가 던져 준 것이나 다름없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유칭을 죽였고 문화대혁명이 펑샤를 앗아갔지만, 푸구이의 눈에 그런 거시적인 담론은 잡히지 않는다.


지난한 흑과 백의 반복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함께 밥을 먹는 평범한 가족만이 있을 뿐. 그렇기에 인생은 변증법적 구원의 여정이 아닌 정과 반의 무한한 순환으로 귀결된다. 이 리듬은 역동적이고, 분명 ‘삶이란 그저 살아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류의 잔잔한 감동을 주지만, 우리는 거칠게 말해 캐리비안베이 파도풀에서 둥실 떠다녔을 뿐이다.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아니 에르노의 말을 옮겨야겠다. “한 개인의 삶에 역사는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그날 그저 행복하거나 불행했다.” (<세월>, 120p)



<5일의 마중> - 과거를 향해 뒤돌아 선 분절된 가족



<인생>이 끝없이 세월의 방향으로 떠밀려가는 민초의 서사였다면, <5일의 마중>은 한없이 과거를 바라보고 선 여인의 이야기이다. 펑완위가 심인성 기억상실에 걸린 명확한 원인은 제시되지 않으나, 아버지를 밀고한 딸 단단에 대한 배신감, 추레한 모습으로 끌려간 루옌스를 목격한 충격, 루옌스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완위의 기억 속 옌스는 여전히 문혁 이전의 젊고 건강한 모습이다. 20년간의 고초를 끝내고 돌아온, 하얗게 머리가 샌 옌스를 완위는 알아보지 못한다. 정확히는 인정하지 못한다. 매월 5일을 기준으로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아가는 완위는 시간의 등 떠밂에 전력으로 저항하는 인물이다. 무빙워크를 거꾸로 걸으니 제자리일 뿐이다.


<5일의 마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멜로드라마답지 않게 결실의 희망을 온전히 분쇄해 버리는 듯한 연출이다. 탈영 후 완위를 찾아가는 옌스의 움직임은 어두운 배경 속의 점프 컷으로 빠르게 전개되고, 이후에도 완위, 옌스, 단단의 시점을 교차편집하며 일면 스릴러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밀고 사회 속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가족 간의 서스펜스는 어색함을 넘어 불안하다. 이들 사이의 단절은 끝없이 이어진다. 방문 뒤를 엿듣는 옌스와 같은 구도에 머지않아 단단이 선다. 완위와 단단의 대화-다툼은 좁은 방을 나누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다. 옌스는 공안에 쫓길 때도 육교 아래였고,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다리 아래의 누추한 단칸방에 머문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의 새로운 챕터로 넘어왔지만, 이전 챕터에서 분쇄되었던 이들의 현실은 흐름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는다. 단절을 통해 미묘한 긴장과 답답함을 극 내내 유지하는 연출이 여전히 과거에 묶여있는 이들의 현재를 주지시킨다.


결정적으로, 카메라는 가족 모두를 한 프레임에 담기를 극도로 주저한다. 잠시간의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극히 드문 몇 장면을 제외하고 인물들은 각자의 외화면에 머무른다. 분절된 공간에서 기거하는 세 명은 점차 ‘재결합해야 할 가족’보다는 ‘새로운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개인들’의 결을 띄게 된다. 결말에 이르러 3인이 오래간만에 함께 스크린에 담길 때, 이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그녀를 돕는 인력거꾼이 있을 뿐. 스스로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옌스를 보며, 어쩌면 그 또한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위가 품는 재회의 희망은 실질적으로 복원의 욕망이기에 불가능하다. “시대가 바뀌었어, 옌스는 이제 무죄야.” 문혁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권력은 모든 것이 본래 자리를 찾았다고 말한다. 그가 다시 무죄가 된들, 도대체 무엇이 제자리로 돌아왔는가. 노화는 세월이 가한 폭력의 상흔으로서 스크린 가득 담긴다. 회복의 희망을 향해 투쟁하는 정신과 너덜너덜해지는 육체 사이의 부조화는 역사가 인물들에게 가하는 고문과도 같다. 결국 역사의 힘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역사의 방향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끝에는 인생이란 수난의 쓸쓸한 잔해만이 남는다. 두 행적 중 무엇이 바람직한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유효한 질문이 아니다. 힘의 주체는 언제나 개인이 아닌 역사이기에.



관조적 역사관의 한계, 그 너머의 예술



장이머우가 문화대혁명을 위시한 마오쩌둥 독재정권의 실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체념의 색을 짙게 띤 장이머우의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소극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개인 사이의 역학관계가 과학법칙의 지위를 갖게 되자 그에 도전하려는 시도에는 재갈이 물린다. 과학법칙은 의심하는 대상이 아닌 전제하는 대상이다. 요컨대 역사의 힘을 거부하지는 못하니,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논리다. 푸구이의 지난한 인생을 몇 장면의 아름다운 유대감으로 자위하려는 시도, 완위와 옌스의 쓸쓸한 결말이 말하는 투쟁의 허망함. 인민들의 험난한 삶에 대해 묵묵한 경의를 표하는 그만의 방식인 것은 알겠으나, 이런 태도는 찝찝하다. 2000년대 들어 친정부 성향이 의심되기 시작한 감독을 가리켜 공산당의 억압과 통제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냐는 극단적인 비판도 존재한다.


이 한계에 대항해 내세울 수 있는 변호인이, 더불어 <인생>과 <5일의 마중> 사이 방향성의 간극을 메우는 가치가 바로 영화 속에서 그가 예술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인생>의 푸구이는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자 인형극으로 평생 생계를 유지해 왔지만, 문화 속 부르주아 잔재를 말살하자는 문화대혁명의 기치 아래 그림자극 장비를 불태운다. 문혁의 문화적 반달리즘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단지 그림자극이 이전 시대 내내 인민의 낙이자 혁명의 역군으로 기능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5일의 마중>에서 등장하는 ‘건전한 예술의 대체재’가 다름 아닌 서양무용 발레에 기초한 프로파간다 연극이라는 점이 모순적 기괴함을 더한다. 장이머우의 시각에서 인간에 대한 역사의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라도, 예술에 대한 폭거는 선명하다. 이 감독은 인간보다 예술이 다치는 것에 더 마음 쓰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화대혁명 시기를 접점으로 삼아 <인생>과 <5일의 마중>을 이어진 하나의 긴 영화로 생각해 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술이고, 플롯은 예술의 인간적 가치가 파괴되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다. 그림자극은 푸구이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민초들에게 잠시의 행복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도맡았다. 쿠건은 엄한 아버지가 밉다가도 사람들을 웃게 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림자극이 금지된 문혁 이후 사람들의 삶은 메말라가고, 문화란 오로지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는 벽화 따위로 매몰된다. 가족은 해체되고, 공동체는 공포와 불신으로 대체된다. 이렇게 황폐화된 시대에 예술이 다시금 인간적 유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루옌스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잠시나마 완위의 추억을 자극하고, 불완전하나 뭉클한 재회를 매개한다. 단단이 부모 앞에서 무용을 보여주는 순간, 세 가족이 잠시나마 함께 프레임에 담긴다. 냉혹한 서사 속에서도 이들의 삶에 예술이 깃드는 순간들은 따뜻한 멜로드라마의 체온을 되찾는다.


예술의 상실은 인간성의 파괴와, 예술의 회복은 재회의 희망과 나란하다. 인간들의 유대 사이에 스며들어 역사의 힘에 대항하는 예술의 힘을 관측한다. 어쩌면 장이머우는 인간이 아닌 예술의 투쟁을, 역사보다 상위의 법칙으로서의 예술을 그리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은 역사 앞에서 분명 무력하더라도, 예술만은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내가 당신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날 선 칼이 아닌 무표정한 카메라를 선택한 건, 그것의 힘을 믿기에 그렇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상실 앞에 선 우리의 미숙한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