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랜드> - 올바른 연대를 위한 고통의 과정
※영화 <조이랜드>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유란 사치재이다. 다이아몬드나 향신료와 같은 사치품의 가치가 각 지역의 매장량과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지듯, 자유 또한 사회문화적 지형에 따라 그 시세가 급격하게 변동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군가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억압받는 다수는 손톱만한 총량의 자유를 두고 싸운다. <조이랜드>가 다루는 파키스탄 사회가 특히나 그렇다. 4대 3 비율로 펼쳐지는 좁디좁은 스크린은 마치 여타 사회보다 적게 주어진 자유의 총량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속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한다.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류의 인간으로서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더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관객에게 비바와 뭄타즈는 하이더르의 여정에 협력하는 동료로 인식된다. 애석하게도 자유라는 부표는 작고, 누군가가 올라서면 누군가는 가라앉아야 한다. 사임 사디크 감독은 하이더르를 살리기 위해 나머지를 바다로 던진다. 이상한 일이다. 남성이 살고 여성이 죽는 이러한 구도는 - 단순한 분류로도,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 주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조이랜드>는 여전히 고전적 위계의 힘이 작용하는 세상 속 약자들의 생존 경쟁을 그린다. 그러면서 강변한다. 세상의 규칙이 변하지 않고서는, 개인적 차원의 분투는 그저 개싸움에 불과하다고.
주인공 하이더르는 남성이지만 주류의 의미로서의 남성은 아니다. 아버지의 독단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삶의 현장에서 강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보유하지 못한 하이더르는 끊임없이 겉돈다. 일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그가 급하게 찾은 직업은 드랙퀸의 백댄서인데, 오히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구원의 도구로 작용한다. 정전된 공연장에서 공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하이더르는 처음으로 대책을 제시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선다. 암전된 무대 앞, 관객들이 켜는 휴대폰 플래시의 빛이 댄서들의 반짝이 옷 위로 난반사된다. 이때 하이더르와 비바는 마치 스스로 은은히 발광하는 존재들처럼 난연하다. 내리쬐는 조명 아래에서 그저 쇼의 먹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원하는 관객들의 지지를 받는 듯한 이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가부장의 정의와도 같은 하이더르의 집 지붕에 우뚝 선 비바의 등신대는 이들이 사회에 맞서 이루어낸 잠시의 통쾌한 복수와도 같이 느껴진다. 비바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텅 빈 밤길을 질주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요구하는 전형적 남성성에서 탈주하는 여정을 통해 하이더르는 진정 본연해진다. 해방감과 자기 효능감이 흘러넘친다.
하이더르의 시선을 따라가며 관객은 그의 표면적 성취에 감응하기 쉽다. 그러나 비전통적 남성으로서 하이더르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행위인 댄서 활동은 사실 가부장적 체제에서 남성의 우위를 상징하는 경제 활동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하이더르는 전통적인 규격 속에서 비전형적인 자아를 지탱하는 독특한 존재가 된다. 덕분에 하이더르는 자유를 향한 경쟁에서 우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 인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스로가 서 있는 가부장적 위계가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탈규범적 이상을 향유하도록 도와준다는 아이러니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하이더르는 자유를 갈구하는 약자들의 희망을 가로채는 일종의 ‘금수저’가 되기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체제의 관성에게 몰수당하고 마는 유약한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이중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야기는 관객을 최대한 오래 하이더르의 시선 속에 붙잡아 놓는다. 결말에 이르러 그가 얼떨결에 저지른 참상이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에도, 그가 타자와 교감하고자 애쓴 흔적들을 모아 항변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도록.
비바와의 연애담 속에는 하이더르의 이중적 면모가 그대로 녹아 있다. 보수적인 가족 문화 속에서 성장한 후 정략결혼을 한 하이더르는 이성애 바깥의 세계를 경험할 수조차 없었다. 수술을 완벽히 마치지 않은 트랜스젠더 비바와의 관계는 그에게 다른 형태의 성애를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이더르에게 비바라는 존재는 온전히 나다운 정체성을 긍정하는 세계의 대리인과도 같으며, 비바와 함께하는 동안 그는 자유와 사랑을 추구하는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지 지향성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미 답답한 비율의 프레임보다 더 좁은 공간 속에 이들을 밀어 넣어야 한다는 듯이, 사임 사디크 감독은 벽 사이 좁은 틈 속에서 속삭이는 이들을 담는다. 이들의 사랑은 은밀하게, 세상의 변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째서인가? 비바는 이미 자신의 모습 그대로 양지를 살아간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의 호기심과 멸시와 비난을 밑천 삼아 당찬 생을 이어나가는 그녀이다. 원색적인 성적 모욕을 이어가는 댄서 동료들의 놀림에 단호히 반박하는 인물, 남녀가 구분된 지하철 칸에 당당히 균열을 일으키는 인물 또한 비바다. 반면 하이더르의 행동에서는 여전한 망설임과 두려움이 엿보인다. 댄서 동료들 앞에서 그저 침묵을 지키고, 지하철에서도 조용히 비바 옆자리를 지키는 데에 만족한다. 음지로, 침묵과 수동적 인내의 세계로 향하는 건 하이더르다.
사디크 감독의 예리한 시선은 비이성애에 대한 피상적 존중이 몰이해보다 더한 폭력으로 변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하이더르의 동성애적 성향은 비바에게 아직 남근을 보유한 현재의 ‘불완전한’ 형태로 남기를 요구한다. 인간 비바에 대한 존중에 앞서 오직 관능적 대상으로 비바의 육체를 대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이성애적 규격을 벗어난 관계에서도 여전히 남성성의 폭력이 자행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결국 하이더르는 비바의 세계에서 추방당한다. 하이더르가 그 세계에 ‘속할 자격이 없는 자’인지, ‘속할 자격을 박탈당한 자’인지는 모호하다. 하이더르의 몰이해가 저지른 모든 폭력에도, 관습의 잔향을 온전히 씻어낼 수 없는 힘없는 개인을 단순히 비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바와의 로맨스가 하이더르에게 진심 어린 사랑이기도 하고, 연민과 호기심 사이의 오만한 무언가이기도 하며, 동시에 두 가지 모두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이더르가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가치들의 희생이 요구된다. 그 결과로 가장 먼저 방치되는 대상은 아내 뭄타즈이다. 뭄타즈는 대를 이을 손자를 요구하는 시아버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직업을 포기한다. 애초에 하이더르가 결혼을 앞둔 뭄타즈에게 일할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말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전업주부로 전락한 뭄타즈를 하이더르가 배신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하이더르를 따르는 카메라는 교묘하게 뭄타즈로부터의 정서적 유착을 제거하는 칼날을 들이민다. 옥상에서 뭄타즈가 하이더르의 특수한 직업을 독려하는 장면, 성적 긴장감이 부재한 침실 공간의 묘사를 통해 하이더르가 인식하는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 아닌 동료애와 비슷한 질감으로 그려진다. 가족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의 소극적인 연대보다 한없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비바와의 관능적 사랑이다. 즉 비바와의 사랑은 하이더르에게 자아실현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며, 세상에 의해 함께 억압받는 동료인 뭄타즈가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실제로 뭄타즈는 저항하지 않는다. 직업을 포기해야 했던 날에도, 하이더르가 침대를 빠져나간 밤에도 뭄타즈는 그저 침묵을 지킨다. 더 정확히, 그녀에게는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은 밤에 애인을 보러 뛰쳐나가고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위를 해도 안전하지만, 여성에게는 잠시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도 가장의 결재가 요구되는 사회. 그녀는 도망치기 위해 버스 터미널을 찾지만, 이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밴 유부녀 혼자 도대체 파키스탄 속 어디로 갈 것인가. 뭄타즈의 실패한 도망과 결혼 전 뭄타즈를 찾아가는 하이더르의 모습은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통해 교차한다. 하이더르는 너무 쉽게 버스를 타고, 너무 쉽게 남의 집을 찾아가며, 너무 안전하게 집에 돌아온다. 때문에 영화는 뭄타즈에게 직업의 자유를 약속하는 하이더르의 순수함에 감응하기보다, 그러한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해 주는 하이더르의 사회적 안전성에 질문을 던진다.
이런 연출 속 관객은 갈피를 잡기 쉽지 않다. 하이더르가 천하의 죽일놈처럼 보이다가도 그들이 분명히 목격한 하이더르의 순수성과 비교적 진취적인 자아를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때맞춰 영화는 다시 하이더르가 눈감은 구조적 폭력의 이면을 들춰낸다. 이런 반동적 감상의 최고치를 이루는 장면이 바로 만삭의 뭄타즈가 조카들과 벌이는 술래잡기다. 자유를 갈구하는 그녀를 지지하는 체 하던 관객에게 카메라는 둥근 그녀의 복부와 호쾌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끈질기게 들이민다. 당신은 둘 중에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그 질문이 이 작은 여체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폭로한다. 태아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던 관객들에게 순간의 깨달음과 부끄러움을 선사하는,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영화적 체험이다. 어쩌면 사디크는 올바른 죄책감과 문제의식을 위해서는 그만한 억울함과 공범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이더르와 관객이 함께 손에 묻혀야만 하는 일정량의 피, 체험해야만 하는 양가적 감정은 그들이 진정한 연대에 다가서기 위한 "설레지만 슬픈" 통과의례처럼 다가온다.
요컨대 <조이랜드>가 역설하는 것은 사회의 억압이 드리운 어둠 속 피아식별의 불가능성이다. 좁은 화면의 오른쪽 경계선에 가려 오직 반 쪽만 드러나는 그네의 왕복운동처럼, 이 좁은 운신의 폭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오직 반틈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절반의 연대와 절반의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이정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실은 변함없이 엄혹한 세계라는 암실 속에서 서로를 할퀴고 때릴 뿐이다. 때문에 사디크는 영화가 관객에게 잠시간의 오락적 체험을 제공하는 테마 파크 ‘조이랜드’로 남지 않도록 노력한다. 하이더르를 비난하는 것은 손쉬운 선택이지만 우리는 그가 최선을 다했음 또한 알고 있다. 결국 마음보다는 행동이다. 하이더르에게 진정한 이해의 순간은 너무 늦게, 조이랜드에서 일하며 인형탈을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찾아온다. 그제서야 조이랜드를 지난한 삶의 현장으로 삼는 사람과, 이미 죽고 없지만, 조이랜드가 쉽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품이었던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있다.
우리가 형식적인 감응과 지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사랑에 진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세계 속에서 여전히 타자이기 때문이다. 하이더르와 우리가 충분히 억울해하고 항변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사치스러운 발작 후에야 우리가 밟고 올라섰던 부조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다. 모두 같은 눈높이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부족한 자유를 놓고 경쟁하는 타인이 아닌 태초에 자유를 앗아간 저 어둠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적확한 의제 설정에 실패한 나머지 동지간의 극단적 혐오에 빠져버린 ‘자칭 선진국’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파키스탄이 건네는 가르침을 마주하는 감정이 그래서 다시금 양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