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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May 22. 2017

공산당선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 이진우 옮김

책세상문고의 '공산당선언'


요즈음 일상은 당연한 가정들에 질문을 던지는 일의 연속이다. 마르크스를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여기서부터 질문은 시작한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면 나는 언젠가부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이루어진 사회에 동의하고, 항상 그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한 사회의 규칙이 학교에서 배운대로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사회 구조.  그렇게 생겨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 최저임금으로 일한 만큼 임금을 받아도 생계를 유지하기에 빠듯한 최저임금. 그렇지만 입버릇처럼 들려오는 말,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과연 개인이 노력이 부족해서 살기 힘든 것일까? 나는 이것이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동의했지만 동의한 적 없는 바로 이 자본주의. 이것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에 따르면 지금의 사회 문제들은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원리는 돈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는 경쟁조건을 만들어준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종북이라는 유령이. 심지어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기 이전에 나는 종북이라는 유령을 접했다.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우스갯소리로 쓰이기도 하지만, 지난 오랜 세월동안 누군가의 자유를 훼손해 왔던 색깔론 덕분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공산주의'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북한의 체제와 같다. 공산주의 사상을 옹호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와 전쟁을 치렀던 '주적'인 북한의 사상을 옹호하는 '나쁜 짓'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무지한 삼단논법임에 틀림없다. 북한의 체제는 민주 국가 껍질을 뒤집어 쓴 일당 독재, 3대 세습 왕권 체제이고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적국의 사상 혹은 이념을 공부하거나 지향하는 것이 곧 적국 자체를 지지하거나 북한에서 온 스파이인 것은 아니다. 이런 편견에 기대어 수많은 분들이 희생당했다.(이런 생각은 영화 "자백"에 근거한다) 나는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거니와 지금 당장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체제에 의문이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법적인 정의는 지난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에 머물러 있고 또 이 결과를 많은 시민들이 존중한다. 민주주의 내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지는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틀림없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정의한다. 여러 시대를 거쳐 현재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어느 한쪽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의 발전 단계마다 이 단계와 일치하는 정치적 진보를 병행했다. 부르주아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 가치로 용해시켰고, 그 전까지의 막연한 믿음들(종교,신념,사랑 등등)을 모두 하나의 금전 관계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 프롤레타리아의 소유는 마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그림의  떡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현재의 착취가 계속된다면 결국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지적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을 없애고 모든 소유를 공동의 소유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특히 생산 수단을 공동의 소유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지난 겨울 광장의 추억. 우리는 사유화한 권력의 시민의 것으로 되찾아왔다.


마르크스는 진리를 정해 놓고 그것에 현상을 짜맞추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 진리를 찾으며 변하지 않는 고정된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공산당 선언, 공산주의 원칙, 공산단선언의 중판 및 여러 번역본들의 서문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공산당 선언은 굉장히 짧다. 세 부분을 모두 합쳐도 170쪽 남짓 된다.


책에서 메모한 몇 구절들을 옮겨 적는다.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국가는 추상적인 것이다. 민중만이 구체적인 것이다."


각 절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공산주의가 결코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오히려 "영원한 진리들을 폐지한다"라고 마르크스는 단언한다. 공산주의는 도덕과 종교를 새롭게 형성하는 대신 그것들을 폐지하는데, 과거의 도덕과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지 않은가?


공산주의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규제적 이념으로 압축된다.


'생산 수단의 공유'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념이 모더니즘의 산물이라면, 주어진 현실 속에서 '자유로운 연대'의 조건을 모색하는 공산주의 운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호를 달고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목표가 '주어졌다'기 보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인간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삶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르크스를 무력하게 만든 것인가? 마르크스의 비판이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 체제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여전히 타당한데도 경직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마르크스의 본 뜻이 왜곡된 것인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소유"에 대한 개념이다. 개인의 사적 소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는 순간 수많은 비인간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적 소유가 작용하지 말아야 할 순간을 수없이 보았고 이것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서 패배감과 무력감, 우울을 가져온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르크스는 그래서 사유재산과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니라 "연합"의 것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런 마르크스의 주장은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연구되었고 정당의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다. 또 그런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계속되어 현대의 정치 경제 및 권력구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매번 하늘을 바라보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책의 글자 수는 많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나의 인식의 뿌리부터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언론이나 미디어 혹은 막연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그저 무지에서 온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거워서 읽는 데에 2달은 걸린 듯 싶다. 이제 한 번 읽었을 뿐이라서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렇지만 덕분에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뿌리부터 다른 형태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함을 들어낸 것이 가장 큰 배움이 아닐까 한다.


다음 도전은 아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될 것 같다.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 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 - 공산당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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