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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May 17. 2018

내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뭘까?

고등학교 때 부터 지금까지 시간 돌아보기

요즘처럼 배우는 일의 속성에 대해서 한 발 떨어져서 고민한 적이 있었나 싶다. 왜냐하면 요즘 N잡러의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바로 학교와 일을 병행하는 중이다. 물론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많이 한다. 지금 나의 일은 '알바'로 정의되는 일이 아닌 내가 바라는 조직에서 내가 원하던 일을 하면서 학교에서의 배움이 일터에서 영향을 끼치고, 일터에서의 배움이 학교에서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일을 하는 시간에도 내가 무엇을 하고 거기서 어떤 배움을 얻어야 하는 지 좀 더 고민하게 되고 학교에서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내가 뭘 배우고 싶어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고 싶어졌다.


고등학교의 나

고등학교 때의 배움은 나 밖의 영역에 있는 '성적'으로 평가되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호기심, 인간에 대한 호기심보다 당장 눈앞의 텍스트, 눈 앞의 점수에 항상 목을 매었다. 당시에도 내가 정말 이 지식들을 '배웠다' 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당장 암기해서 봐야 하는 시험들은 더했다. 내가 좋아했다고 생각한 수학과 과학은 성적과 경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오히려 즐거운 것은 언어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암기'가 들어가야 하는 과목들은 항상 내 발목을 잡았고 내가 정말 효능감을 느끼는 배움에 집착하던 나에게 돌아온 것은 선생들의 냉소와 부모님의 질책이었다. 그 때 억지로 밀어넣었던 지식 중에 7,8년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은 정말 없다.


고등학교 밖의 나

나의 고등학교 시간 중 특이했던 배움의 시간은 '학교 밖'의 배움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전부터 공부해 왔던 학교 밖의 영역인 '컴퓨터'를 혼자 공부했고 이것은 나에게 학교 안의 배움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었다. 직접 작동하는 프로그램의 원리를 정말 느렸지만 조금씩 더듬어서, 내 손으로 만들어 보는 일. 혹은 대회에 나가서 객관적인 지표인 상으로도 항상 내게 돌아왔다. 거기다 더해서 '기업가 정신' 을 배우는 포스텍 영재기업인에서의 교육은 학교에서 배움의 방향과 전혀 달랐는데, 교육원에서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깨닫기', 공동의 목표 정해보기', (비록 창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받았지만)'내가 나중에 뭘 하고 싶은 지 고민하기' 등등 이었다. (요즘은 이런 형태의 고민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공교육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는듯 한데, 여전히 서울/지방의 격차는 커 보인다) 나는 계속 학교 밖 배움에 더 즐거움을 느꼈고 당시 내가 즐겁게 시도했던 실험들은 여전히 몸에 남아서 더 나아진 형태로 내 안에 있다.


대학에 와서

모르면 용감하다고 나는 대학에 와서 이전에 '학교 밖'에서 추구했던 배움을 '학교 안'에서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을 녹록치 않았다. 교수들은 우리를 마치 고등학생 처럼 취급했으며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의 관성으로 학교 공부에 임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와 같이 학교 공부에서 배움을 느끼지 못했다. 교수들은 틈만 나면 우리보고 여전히 고등학생 같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것은 '수업을 대충 하기 위한' 교수들의 지배논리였을 뿐이지 좋은 학습자료와 커리큘럼이 주어진다면 나는 학생들이 보다 나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대학에서는 강의 말고도 학교 안에서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것들이 많았고 동아리, 기자단, 봉사활동, 강연회 뭐가 엄청 많았다. 거의 다 돈도 들지 않았고 지방에서 이런 행사들에 목이 말랐던 나는 죄다 신청해서 참석했다. (패기롭게 왜 수업을 째고 어떤 컨퍼런스 갔는지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 그래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학과를 잘못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생활 몇년은 재수도 하기 싫고 장학금도 받아서 무턱대고 왔고 이전부터 컴퓨터를 즐거움 반 / 성적에 대한 압박 반으로 해 왔어서 이것이 정말 재미있는 나의 배움이 될 지 실험하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교양 과목, 특히 인문학 예술/사회/역사 과목에서 느끼는 배움의 즐거움은 전공 과목에서 느낀 즐거움은 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즐거웠다. 당연하게도, 즐겁게 공부한 과목들의 학점은 높았다. 전공 과목에서 즐겁지 않은데 학점이 높았던 과목은 이전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던 과목 밖에 없고 대부분 즐겁지 않았다. 재미있었던 과목은 팀 프로젝트로 팀원들과 내가 설계를 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배우는 과목들이었다. 


휴학을 하면서

군생활을 마치고 학과생활 1년은 여러모로 예측대로 배우기 힘든 해였는데, 패기만 앞섰던 나는 생각보다 멍청했고 전공과목에서 배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던 관성은 여전해서 본격적인 3학년 전공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친구의 추천으로 듣게 된 유럽의 이해 과목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학과 정치학에 입문하기 시작했고 이후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학을 했다. 나는 당시 느끼던 나의 절망감을 설명할 나의 언어가 필요했고 그 뒤로 계속해서 발견했던 것은 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나의 언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인문학에 대한 배움과 배움에 대한 즐거움은 나 자신을 이루고 있던 요소들을 개념화하고 언어로 만들어내는 일에 있었다. 나는 나와 타인, 그리고 권력에 생각보다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고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와 지식들을 '배움'이라고 느꼈고 직업을 위한 기술과 같은 지식들은 항상 2순위였다. 휴학을 하면서는 학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강의, 책, 친구들 가리지 않고 배움을 찾아 다녔다. 조심스럽게 돌아보면, 학교 밖에서의 작년 1년은 학교에서의 그 어떤 해보다 많이 배웠다. 내가 배우고 싶은 곳을 찾아다녔고 내가 배우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다. 학교 밖에 있으면서 비로소 '학교'라는 곳의 한계를 절감하고 또 장점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올해 들어서

그런 각오로 학교로 돌아왔는데, 만만치 않은 건 여전했다. 과목별로 수시로 터져 나오는 과제들은 여전했고 그나마 부담이 덜한 과목이라고 생각한 과목들도 일과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마침내 학점과 내가 원하지 않는 배움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구분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학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과목을 듣고 있는데 4년간의 학교 생활 중에 가장 많이 배우고 있는 과목이다. 정말 내 삶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있다. 작년부터 나의 배움을 관통하는 학문은 바로 '사회학'이었고 이전에 내가 그냥 '인문학' 이라고 퉁치던 학문들도 사회학을 공부하기 위한 기초적인 단계였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학 전공했으면 아마 4년 내내 배움에 푹 빠져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컴퓨터에 대해서 내가 뭘 배웠을까에 대한 질문도 일을 하게 되면서 계속 하게 되는데, 생각보다 가랑비에 옷젖듯이 배우긴 했구나 싶다. 내가 부족했던 배움은 이전에 '재미없음' 으로 포장했던 날카로움과 끈기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경험을 일을 할 때에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일인데, 사회학 공부가 바로 그렇다. 지금 빠띠에서 바라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가는데 학교가 도움을 주고 있다. 또, 빠띠에서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얻은 프로젝트에 대한 감각은 학교에서 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 명확히 도움이 된다.


또다른 실험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만의 배움을 쫓아갈 수 있는 것 또한 특권이라는 것을 부단히 의식하고 있다. 계급에 따라서 대학생이라는 같은 신분에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학교를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들 각자의 계급과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또 내가 어떤 것들을 잘 선택할 지, 선택해야 하는지 약간의 자신감을 얻는다. 여태 이런 배움에 대한 고민도 가끔씩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데 딱히 명쾌한 결론이 나 본 적이 없다. 각자가 이렇게 예민하게 실험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지금은 내가 원하던 배움과 여전히 방황하는 배움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고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배울지 이전보다는 선명하게 보인다. 확실한 것은 가능하다면 내 마음 속의 배움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나중에 내 안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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