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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Sep 05. 2020

S# 00 서귀포 이야기에 앞서



2020년 서귀포



우리가 아는 서울이 50년 전 서울과 다르듯 현재 서귀포와 과거 서귀포 사이에는 공간의 변화와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제주민들에게 서귀포는 제주의 반쪽인 ‘산남’ 일 수도 있고 서귀포 항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이기도 하다. 행정구역 상 서귀포시는 제주를 한라산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눌 때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면적(870.7 km²)으로 따지면 제주시(977.8 km²) 보다 작고 서울(605.2 km²)보다는 크다. 물론 인구는 18만 9천 명(2020년 9월 기준)으로 서울의 5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서귀포 사람들은 서울 사람보다 60배쯤 넓게 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도시’라고 할 때 ‘서귀포시는 도시인가?’라는 물음에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도시의 정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된 곳으로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이 되는 곳을 말한다. 근대 산업 사회에 들어서며 공업화 따른 인구 집중과 과밀을 통해 형성된 지역으로 농촌이나 교외, 지방 등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서귀포는 구도심과 혁신도시, 중문 관광단지, 대정과 성산 등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농지나 임야, 그 외 중산간과 해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로 보면 서울이 1 km² 당 16,100명임에 반해 서귀포는 217명이니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서귀포시가 특별지방자치도에 속한 행정 구역 상 시市로 구분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인구 규모나 면적으로 볼 때 기초 단체인 군郡단위에 시가 결합된 형태로 보인다.

1981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남제주군(현재 서귀포시에 해당한다)에 속했던 당시 중문면과 서귀읍이 합쳐져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와 함께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와 통합되며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2005년 통계 자료를 보면 남제주군 74,000명, 서귀읍과 중문면이 83,000명으로 총인구는 15만 7천이다. 2020년 현재 인구와 비교하면 15년 사이 무려 약 3만 2천 명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된 요인은 물론 최근 10년간 제주를 휩쓸었던 이주 열풍 때문이다. 1981년 7월 서귀읍과 중문면 통합 당시 인구가 77,117명으로 2005년까지 24년 동안 불과 6,000명의 인구증가를 보인 것과 비교하면 최근의 인구 증가세가 제주 사회에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수치다.


최근 10년간 유입된 인구만큼이나 서귀포시는 외형적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감당했다. 중문과 서귀포 구도심 사이인 서호동에 혁신도시가 들어섰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 등 부동산, 영주권 취득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되었으며 대정 인근에는 영어교육도시가 조성되었다. 강정에는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치르며 해군기지가 들어섰으며 성산 온평리 지역에는 예정된 제주 제2공항 입지 선정은 지역사회에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의 불씨가 되고 있다. 최근 사업이 중단된 중국 화교계 자본이 대거 투입된 예래동 휴양형 주거 단지 건설과 헬스케어 타운 등 대규모 외자유치 사업은 시작하기도 전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자연 발생적인 전통 마을과는 서귀포는 시작부터 다르다. 계획도시로 구상되었고 역사도 짧은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출발해 압축 경제 시대에 가파른 성장을 보였지만 쇠락의 경사도 급격하다. 도시가 시작되었던 항구는 본래 기대했던 역할을 잃고 휘청대며 도시의 근본이 흔들렸다. 관공서와 학교 이전은 도심 공동화를 재촉했다. 70년대 시작된 관광 산업과 최근 제주 이주 열풍마저 서귀포 구도심을 비껴갔다. 밤이면 인적이 끊긴 거리에 모텔 간판 불빛만 적막한 골목을 밝힌다. 집들은 낡았고 문을 닫은 호텔과 병원 터는 10년 넘게 폐허로 버려졌다. 새로 짓는 건물 또한 열 중 아홉은 숙박업소다. 한국 도시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고스란히 서귀포가 압축해서 보여준다.


2013년 제주에 이주한 나는 여기 사람들 말로 ‘육지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대척점에 서있는 이들은 제주 토박이, 여기 말로 ‘갯것’이다. 2019년 서귀포를 지키던 토박이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 속의 서귀포가 빛나던 시절을 들을 수 있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토지 조사원도(1914년)와 해방 직후 항공사진을 통해 기본적인 도시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논과 밭이었던 곳에 집과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넓어졌지만 도시의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항구는 규모가 커졌고 일제강점기 관공서와 학교 등이 자리했던 서귀진성 터가 일부 복원되었다.


서귀포가 변화한 과정을 추적하며 몇 개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120년 전 100명에 불과했던 빈한한 어촌 마을에 도시를 만든 이유와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왜 성장을 멈추고 쇠락의 길로 들어섰을까? 관련 전문 지식이 없는 나에게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물속의 바위처럼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서 해답을 구하는 과정을 담아보면 어떨까?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이 도시에 살거나 잠시 머무는 이들에게 도시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도시 또는 건축 전문가들은 도시 공간을 통해 우리의 가치와 태도, 생활방식, 생각과 욕망을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도시는 삶의 형태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처럼 서귀포라는 도시 공간을 만든 이들이 만든 거리와 건물들, 그 속에 숨은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과 사회를 찾아 첫걸음을 내딛는다.


서귀포 스토리  티저



1960년대 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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