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호 Sep 05. 2020

S# 01 두 개의 폭포를 가진 도시


서귀포항


동쪽과 서쪽에서 강이라기엔 조금은 애매한 두 개의 내가 도시를 감싸듯 남쪽 바다를 향해 흐른다. 차갑고 따뜻하거나, 무겁고 가볍거나, 빛나고 어둡거나, 성질은 같지만 밀도는 다른 물질이 만나는 강의 하구는 대개 그렇듯 경계가 불투명하다. 강의 소멸은 그렇게 어둑하고 대개는 고요하다. 그러나 이 도시의 강 끝은 우리가 기대하는 강의 하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소란스럽고 거칠며 선명한 그 끝에 서면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의 잠재된 운명 따위를 느낄 수도 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두 개의 폭포를 가진 도시는 흔치 않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어떤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는 내 덕분이다. 서쪽은 솜반내, 폭포 바깥에 있다고 해서 연외천淵外川 또는 서홍천西烘川으로 불린다. 동쪽의 내는 정방천 또는 동홍천烘川이다. 이들 하천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땅속에서 물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되는 물의 원천을 용출수湧出水 라 한다. 앞서 강이라기에 조금은 애매하다고 한 이유는 두 하천 모두 폭이 기껏해야 10m 남짓하고 얕은 곳은 바짓단을 걷고 건널 수도 있어서다. 어쩌면 소박한 내에 비하면 폭포는 근육질인 편이고 제법 괜찮은 박력을 가졌다.


폭포는 강과 바다의 가파른 경계가 만든다. 바다에서 보는 도시의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지만 실재 해안에서 도심으로 걷다 보면 숨이 만만찮게 차오른다. 지도로 보면 등고선이 제법 촘촘하다. 도시의 양쪽에 병풍처럼 펼쳐진 해안 절벽을 보면 이 도시가 만만찮은 입지를 가졌구나 금방 깨닫게 된다. 절벽으로 동서로 늘어선 움푹한 만에 자리하고 있어 거센 바람을 피하는 것으로는 쓸모가 있으나 정작 바다로 나가는 뱃길은 그닥 수월치 않다. 새섬, 범섬, 문섬이 바다로 나가는 길목을 버티고 있고 자칫 물속에 잠긴 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물 때에 따라 보이기도 한다)라도 만나는 날이면 어지간한 배 따위는 풍비박산을 면치 못한다.


역사 기록에는 '원나라로 가는 배의 후풍처(바람을 피하는 곳)'-고려 충열왕 1300년-라고 처음 등장한다. 그 당시의 이 도시의 이름은 홍로洪爐다. '서홍천'이나 '동홍천'의 근거를 짐작할 수 있다. '서귀西歸'라는 지명은 그 후로도 한참 후인 1439년 세종 왕조실록에서 비로소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고려 시대 '홍로'라는 마을의 역사 기록은 더 찾아보기 어렵지만 추측하건대 1270년 제주에서 항전하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후 원 간섭기에 들어 말 등을 교역하는 무역항이거나 작은 포구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홍로는 해안보다는 좀 더 섬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이 도시가 제주시만큼이나 제법 오래된 도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주 남부권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이고 제법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동쪽으로 정의현(현재 성산지역)이나 서쪽의 대정현(현재 모슬포 지역)에 비교하면 한미한 마을에 불과했다.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건 100년 남짓하다. 제주시나 예전 현청이 자리했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옛 도심을 걷다 보면 젊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쓸쓸한 노년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제 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시들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때는 빛나던 도시의 뒷골목을 걸으며 처음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의 꿈을 상상해본다. 길은 어떻게 닦았고 어디에 어떻게 집을 지었으며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어떤 건물을 짓고 누가 그곳에 살았는지 궁금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 도시를 보다 깊이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S# 00 서귀포 이야기에 앞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