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elpaert & Sperwer
이 섬의 네 번째 정박지는 해안 남쪽 시가지에 위치한다. 부근의 후퍼 섬(새섬)과 마주하고 있다. 이 정박지는 범선이 임시로 정박하는 곳이지만 서쪽에서 남동쪽까지 전체가 트여있다. 또한 좁아서 여기에 정박하는 배에 풍랑이 갑자기 일어날 때가 있다. 이 정박지는 돛을 달고 출항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로 위험한 정박지다.
『중국 해수로지 4권 The China Sea Directory, Vol.4 Hydrographic office of the British Admiralty』2장 86p
1894년 영국 왕립 해군 소속 배 한 척이 동남아시아를 지나 조선반도로 접근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남중국해를 거쳐 일본, 오호츠크 해에 이르기까지 중국해 안과 동아시아 지역의 해안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 배는 당시 그들이 퀠파트Quelpart라 불렀던 섬에 도착한다. 조류 간만의 차와 수심을 재고 지형과 지질, 해안을 측량하고 이 섬에 사는 사람들과 주요 생산물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배를 댈 수 있는 항구 네 곳을 『중국 해수로지The China Sea Directory, Vol.4 Hydrographic office of the British Admiralty』를 통해 소개한다.
섬의 네 번째 정박지는 서귀포였다. 이때 조선은 영국 배가 자국 해안 조사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해안 측량권 넘겨 준지 오래니 영국 배가 해안을 뒤지고 다녀도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부산과 원산, 제물포 등 3곳의 항구가 일본에 의해 이미 강제로 열렸다. 조선이 그나마 의지했던 청나라 또한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무력하게 패배해 항구를 열고 홍콩 섬도 영국에 내준 판이었다. 그 해 조선은 더욱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해 음력 1월 전라도 고부를 시작으로 동학 농민군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무능하고 부패했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일본과 일전을 불사한 청나라는 또다시 무릎을 꿇고 조선반도에서도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청이 일본에 패할 무렵 영군 해군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에 맞서기 위해 오호츠크 해 연안부터 일본 그리고 조선의 해안과 해로, 지형, 섬들의 위치 지명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탐색에 나선다. 제주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구세계는 제주도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영국 해군이 발행한 중국해수로지를 열심히 뒤져보면 '제주'라는 지명은 찾을 수 없고‘퀠파트Quelpart’라는 이상한 이름만 등장한다. 당시 그들에게 한반 남쪽의 이 섬은 '제주'가 아니라 '퀠파트'였다. 제주가 서구세계에 '퀠파트'로 알려지게 된 공의 반쯤은 핸드릭 하멜 Handrik Hamel에게 있다.
1653년 제주에 표착한 하멜은 조선에서 13년 간 억류 생활을 하다 1666년 탈출했다.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 나가사키에서 1년을 머문 후 본국인 네덜란드로 귀국한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 신분이었던 하멜은 그가 조선에서 보낸 13년이란 시간을 보상받고자『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퀠파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하멜 표류기의 원제목이다)라는 아주 길고 긴 제목의 일종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1687년 하멜의 보고서가 출판되고 난 뒤 당시 서구 유럽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남쪽 섬을‘퀠파트’라 부르게 된다. 제주라는 이름이 뻔히 알고 있음에도‘퀠파트’란 이름으로 말한 하멜의 표현의 다소 의아하지만 하멜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하멜 이전에 제주도가 이미 ‘퀠파트’란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멜이 제주에 표착하기 약 10년 전인 1642년 동인도 회사 소속 갤리선 '퀠파트 드 브락 Galjodt’t Quelpeart de Brack'은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를 하다 우연히 제주를 발견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한다. 1648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퀠파트 호의 이름을 그대로 섬 이름으로 쓴다. 1687년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하멜의 보고서가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제주는 서구 세계에서 '퀠파트'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주는 퀠파트 이외에 '펑마Fungma', '도이 Doi'라는 다른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여기서 매우 불운했던 사내가 또 하나 등장한다. 박연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조선에서 생을 마친 네덜란드인 얀 벨테브레이 Jan J. Weltevree 다. 벨테브레이는 하멜보다 무려 26년 전 우베르케르크Quwekereck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에 난파했다. 벨테브레이는 하멜과 달리 조선에 귀화해 조선 여인을 얻고 훈련도감 소속으로 벼슬까지 받는다. 모국어도 잊으며 귀향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을 무렵 하멜이 같은 제주에 표류해 온 것이다. 낯선 서구 이방인이 제주에 표착했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벨테브레이, 박연을 제주에 파견한다. 모국인인 하멜은 만난 벨테브레이는 잊혀가던 모국어로 하멜과 이야기를 나누며 옷깃이 젖을 때까지 울었다고 전한다. 하멜 표류기에도 벨테브레이는 언급된다. 만약 벨테브레이가 조선을 탈출해 네덜란드에 돌아갔다면 아마 제주는 '퀠파트'가 '우베르케르크' 또는 '벨테브레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제주는 17세기 중반부터 일제 강제 피탈기까지 약 250년간 엉뚱한 이름으로 서구세계에 알려졌다. 외부 세력이 조선의 영토를 어떻게 부르든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할 수도 있지만 국제 사회가 '독도'를 '다케시마'로 '동해'를 '일본해'란 명칭을 사용한다면 국가의 영토 주권은 심각하게 침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찬가지 이유로 제주를 '퀠파트'로 이름 짓는 순간 제주는 마치 특정 국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 지역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실제 제주에 표착해 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었던 하멜조차 제주가 일본의 영토인 것처럼 서술하는 부분-원래 Tymatte(대마도의 네덜란드어음차)은 조선의 일부였으나 일본과의 전쟁 이후 Quelpaert와 교환하는 대가로 일본에게 빼앗겼다고 한다-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조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게 만든 조선 정부의 무능도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 잇따른 전란으로 인한 전쟁 후유증으로 최악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제주도는 다행히 직접적인 전쟁은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전례 없었던 가뭄과 기근, 관리들의 무자비한 탐학에 예외는 아니었다. 기근과 가혹한 징세를 피하기 위해 섬을 탈출하기 위한 엑소더스가 이어졌고 인조는 결국 섬을 봉쇄하는 극단적 조치를 내린다. 조선 중기에서 대한제국 설립기 약 250년간 제주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던 ‘출륙금지령’이다. 육지에서 제주에 이주하는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와 겨우 참형을 면한 대역죄인들 뿐이었고 섬에 갇힌 제주인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당했다.
하멜 이후 제주 해안에 몇 차례 서구에서 온 배들이 교역을 시도했으나 당시 조선의 철저한 고립주의 정책에 따라 접근 자체를 거부당하거나 외면당했다.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마다 인근 해안 상륙해 난동을 부리거나 위협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의 서구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일제의 조선 강제 피탈 전까지 제주가 서구인들에게‘퀠파트’또는‘펑마’, ‘도이’로 인식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