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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Sep 05. 2020

S# 03 성城 위에 도시를 짓다 1

서귀포 구도심을 걷다 보면 그 중심에 작은 동산을 만날 수 있다. 촘촘한 옛 돌벽이 에워싼 야트막한 언덕으로 바다 너머로 문섬이 보인다. 남자 쪽 길로 내려가면 서귀포항이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중섭 거리다. 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퐁낭(팽나무의 제주말)이 성 바깥 에움길에 버티고 있어 한 여름엔 서늘한 그늘을 만들거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마파람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돼주기도 한다. 언덕 빈터 가운데 우물처럼 보이는 돌 구조물만 눈에 띌 뿐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보이는 잔디 공원으로 보인다. 그 흔한 벤치조차 보이지 않지만 정낭 옆 안내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서귀진성西歸鎭城이란 안내판의 제목과 그림은 이 곳의 내력을 설명한다. 조선시대 진지鎭址가 있던 성터란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잔디 동산이지만 이 성터는 서귀포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함께 성城은 폐지되어 관공서나 학교 터로 쓰이다 해방 전후로 하나 둘씩 이전했다. 빈 터에 집들이 들어섰고 옛 성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사라졌다. 그렇게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2009년이 되자 진성터 문화재 유적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2012년 4차례의 조사가 마무리된 후 그나마 돌담이라도 복원해 성터라는 이름값은 하게되었다.


서귀진성은 1590년 이 곳으로 옮겨온 후 약 300년간 제주도 남쪽 해안을 지키는 교두보가 되어오다 1901년 공식 폐지로 역사 속에 이름으로만 남게된다. 일제는 300년간 왜구로부터 제주를 지켜온 성을 허물고 이 자리에 가장 먼저 순사 주재소를 세웠다. 조선의 권력의 상징을 지운 자리에서 근대 도시 서귀포는 시작된다. 이 도시로 떠나는 첫 여정은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은 옛 성터로 가는 길이다.


서귀진성-밝게 음영으로 처리된 부분

1439년 조선조 무신이었던 한승순韓承舜은 제주목사(안무사 겸임) 2년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의정부는 한승순에게 '봉화, 척후 斥候를 엄하게 하고 군軍을 정비하여 왜선倭船이 정박할 요해처要害處를 잘 방어하라' 지시했다. 이에 한승순은 건의하기를 제주 삼읍을 수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요건을 보고해 올렸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한승순의 장계 내용을 요약하면


제주도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이 아뢰기를 …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정의현旌義縣은 서쪽은 서귀포西歸浦요,
동쪽은 수산水山이온데 모두가 왜구가 배를 댈 수 있는 요해지오라,
이전에는 다 방어소를 두었습니다. …
서귀소西歸所의군인은 마·보병 합계 1백24명이고, …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1439년) 윤 2월 4일 임오 2번째 기사


이 실록의 내용은 서귀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 자료에 따르면 '서귀西歸'라는 지명이 언급된 첫 사례다. 그 이전까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는 고려 말 이 지역은 동도東道의 홍로현洪爐縣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홍로라는 지명은 계속 등장한다. 홍로현에 서귀포 또는 소가 포함되는지 아니면 별도의 지역인지 이 실록을 통해서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서귀포라는 지명 또한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그 이전부터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귀포西歸浦에서 '포浦'란 당연히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방어소란 군대가 주둔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한승순 서귀포 외에도 방어소 12개소와 수전소 10개소 설치를 건의한다. 수전소水戰所는 방어소1)와 유사한 개념이나 주로 해상 방어에 초점을 맞춰 전선과 격군, 사수 등을 배치한 방어시설이다. 서귀포에 수전소가 아닌 방어소를 설치했다는 의미는 바다에서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보다 해안 상륙 방어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6세기 초 서귀진에도 수전포가 등장하고 선조 대에는 사후선과 포수 등을 배치한 기록이 있다. 


마, 보병 합계 124명이 있다는 기술로 서귀진 설치 초기에는 주로 육상 방어에 치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진관 체제가 붕괴되며 방군 등 면포로 군역을 대납하는 수가 늘며 정군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든다. 다만 이 당시 군역을 지는 대신 정군의 비용을 책임진 봉족(제주에서는 인록이라 했으며 세조 이후에는 보인으로 불린다)의 수가 언급되지 않아 정확한 마을의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124명의 군역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마을이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이 제주도의 방어에 치중하게 까닭은 한반도를 둘러싼 급격한 국제정세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남부 해안에 왜구들이 창궐한다. 원인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이후 등장한 무로마치 막부는 지방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한 힘이 없었고 규슈와 시코쿠 등 일본 서남부 지역의 영주들은 밀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리는데 왜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 일본에서 발생한 유민들이 대거 왜구로 편입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대륙 또한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앙 권력이 미치지 못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은 집중적으로 왜구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일본에서 중국 남부 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제주는 물, 식량 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공급처였다. 이미 고려 말부터 왜구들은 제주에 침입해 방화, 약탈, 납치, 살인 등을 일삼았다. 고려는 왜구의 약탈을 막기 위해 봉수대를 설치(1302년 충렬왕 28년) 하고 방어에 힘썼으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었다. 조선 초에도 왜구의 난동이 이어지자 조선은 지방군 중심의 진관 체제를 정비하고 제주에는 방어소와 수전소를 설치한다. 이는 이후 제주의 방어 체계인 3읍 9진 25봉수 38연대의 뿌리가 되었다.


한승순 목사는 장계를 통해 이미 방어소가 설치되었으니 성을 쌓자고 건의한다. 4년 후인 세종 25년 (1443년) 한목사의 후임 신처강은 재차 축성 허락을 구한다. 이후 1469년 예종 1년에 또다시제주 출신 관리고택高澤의 상소가 실록에 등장한다. 고택은 자신의 고향이 제주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임금에게 상소하는 내용이다. 내용이 중복이 많아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요약하면 "서귀 등 8개 요해처에 방어소를 설치하고 지방군을 배치하자."는 내용이다.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2월 29일 갑인 1번째 기사) 이에예종은 병조에 시행하라 지시한다. 조선 관리들이 여러 차례 건의하며 축성의 의지를 밝혔으나 실행을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5년(1510년) 드디어 성을 쌓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해 9월 16일 제주 목사濟州牧使장임張琳은 방어절목防禦節目을 조목조목 들며 치계 하기를,


 정의(旌義)의 수산포(水山浦)·서귀포(西歸浦)와 대정(大靜)의 차귀포(遮歸浦)·동해포(東海浦)는 적선이 의지해 정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전에 설치한 방호소(防護所)에 각각 육군(陸軍) 1여(旅)씩을 나눠 보내서 2번(番)으로 나누고 군관(軍官)을 분정(分定)하여 부방(赴防)하게 하였습니다.

수산(水山)·차귀(遮歸)의 두 포구에는 옛성 그대로 수축하고 깊은 구덩이와 가로 막는 말뚝을 설치하였고, 그 밖의 7개소의 포구는 본래 성이 없으므로 지켜 보전하기에 의지할 곳이 없어서 지극히 허소(虛疎)합니다. 그런 까닭에 양계(兩界)의 예에 따라 지금 성을 쌓고 각기 부근의 거민(居民)을 옮겨다가 살게 한 뒤에 출입하면서 농사짓게 하였습니다.

- 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 9월 16일 기사 4번째기사



중종실록에서 제주목사 장임은 당시 수산과 차귀(제주도 동단과 서단)두 포구에 성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유실되었는지 옛 성 그대로 수축하고 서귀포 등 7개 포구는 아예 성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이 기록에서 당시 제주 방어소의 기본적인 구성과 운영방식을 알 수 있다. 

양계兩界란 현재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이지만 전략적으로 취약했다. 진관 체제로 운영된 조선 초기 지방 방어는 양계의 경우 지방군만으로 군사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병사가 서북 지역을 지키기 위해 파견 근무를 했고 이를 '부방赴防'이라 한다. 장임은 제주의 방어소 군관(장교) 파견도 '부방'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군관은 상당수 외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제주는 서북지방과 같이 농지가 부족한 탓에 거주민도 적고 생산량이 부족하여 군량 수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이었지만 비번일 때 병사가 농사일을 하는 것만으로 군량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인근 백성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부족한 군량 수요를 채웠을 것이다. 방어소는1여旅(조선의 군 조직편제는 1오伍는 5졸卒, 1대隊는 5오, 1여旅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 즉125명이 2개 조로 나누어 지켰고 이는 세종 때 한승순의 마, 보병 포함 124인이라는 보고와 일치한다.

세종 대에서부터 필요성이 역설되어 온 축성이 중종 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배경에는 그 해(1510년) 4월 경상도 일대에 큰 피해를 준 삼포왜란이 트리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삼포왜란에 큰 충격을 받은 조선은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를 설치한다.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는 을묘왜란(1555년) 이후 상설 기구화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의정부 보다 실질적인 최고 의결기구가 된다.


서귀방어소에 대한 구체적 규모와 위치에 대한 기록은 중종25년(1530년) 증보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8편 정의현 편에 등장한다.



대수산 방호소성(大水山防護所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4척이고 높이가 26척이다.
서귀포 방호소성(西歸浦防護所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백 61척이고 높이가 5척이다.
...
대수산 방호소(大水山防護所) 현 동쪽 25리에 있다.
서귀포 방호소(西歸浦防護所) 현 서쪽 71리에 있다.
오소포 방호소(吾召浦防護所) 현 동쪽 43리에 있다.
오소포 수전소(吾召浦水戰所)ㆍ서귀포 수전소(西歸浦水戰所).

신증동국여지승람 38권 전라도편


먼저 서귀포 또는 홍로가 현청인 정의현(현재 성산 성읍민속마을)에서 약 70리라는 기록은 다수의 문헌에서 발견되니 덧붙여 설명치 않겠다. 정의현청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진 대수산 방어소성(현재 성산읍 수산리)의 규모는 둘레 약 400m, 높이 9m에 달한다. 이에 비해 서귀포방어소성은 둘레 53m, 높이 2.6m로 대수산방어소성과 비교도 안될 만큼 협소하다. 방어소의 형태를 원형이라 가정할 때 서귀방어소의 면적이 84평방 미터에 불과하다. 크기로 일종의 낯선 배의 접근을 감시하는 해안 감시초소가 아닐까 추측된다. 두 번째 문장에 포함된 '서귀포 수전소'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 수전소는 방어소와 다른 별도의 군사시설이다. 앞서 중종실록을 통해 밝혔듯이 125명이 근무하기에 방어소의 규모가 협소하며 아마도 수전소와 병력을 분산, 역할 분담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귀방어소는 이후 1590년 이옥李沃목사 때 현재 서귀진성터로 옮겨 설치했다.




홍로천(서홍천) 상류 걸매

이설移設전 서귀방어소의 위치와 관련해 관에서 발간한 거의 모든 간행물과 문헌들은 천지연 상류 홍로천 위 '걸매' 인근으로 추정한다. 현재 서귀진성의 위치보다 상당히 북쪽인데다 홍로천(서홍천)이 바다와 만나는 옛 서귀포구와 직선거리로 약 1.1km이상 이다. 포구에서 천지연 폭포 상류인 걸매까지 지형은 급경사에 계곡의 천연 난대림 등 숲도 울창해 지금도 빠른 걸음으로 최소 30분 이상 소요된다. 걸매가 왜구가 침입할 때 해안가의 수전소와 조응하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입지일까? 현재까지 서귀방어소 축성과 관련된 집터나 유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관련 전문가들은 서귀포구와 한참 떨어진 걸매 인근에 서귀방어소가 있었다고 말하는 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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