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는 옛날에 홍로내[洪爐川] 위에 있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옥(李沃)때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쌓았다. 성의 둘레는 500자이며 높이가 6자이다. 서문(西門)·남문(南門)도 개의 문이 있다.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성 아래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왔다
-김상헌金尙憲,『남사록 南槎錄』 卷之三, 十月 十五日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김윤식이 연기했던 김상헌의 모습은 강렬했다. 최명길(이병헌 분)과 비교해 강단 있게 끝까지 청에 굴복을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와는 달리 김상헌은 목을 매다가 다른 이들의 제지에 실패했고 주전론을 펼친 대가로 청에 끌려갔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그가 청으로 유배 가며 읊은 한 대목이다. 그는 몰라도 이 시조는 누구나 안다.
약관 스물에 진사 급제한 그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엘리트였다. 예조 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 좌랑·시강원 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 노른자위 벼슬들을 두루 거쳤다. 32세 나이에 역모 사건으로 뒤숭숭했던 제주의 민심을 수습차 안무어사로 6개월간 제주에 파견된다.『남사록南槎錄』은 제주 파견 6개월을 기록한 여행 일지다.
김상헌은 남사록에 '이옥李沃목사가 홍로천 위에 있던 방어소를 현재의 자리에 옮겼으며 그 규모는 둘레가 190m, 높이 2m 우물과 두 개의 문이 있다'라고 썼다. 성 이설移設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옥은 1589년 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592년 3월 교체되었다. 이 시기 중 성을 옮겼으니 김상헌이 남사록을 짓기 불과 10년 전 일이기 때문에 공식 문서는 아니지만 상당히 신뢰할만하다. 성의 이설에 관한 기록은 약 200년 후 다시 등장한다.
서귀진西歸鎭 【본래 해변에 있는 홍로천烘爐川 위에 있었다.
선조 11년 (1578년) 경인년에 목사 이옥李沃이 이곳에 이설하였다.】
- 이원조李源祚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秋·冬)』(1842년)
헌종 7년 1841년 1월부터 1843년 7월까지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이원조李源祚목사가 쓴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秋·冬)』(1842년)에 실린 내용이다. 이원조 목사는 선조 23년(1590년)을 선조11년(1578년)으로 잘못 기술했으나 단순 착오로 보인다. 이옥 목사의 재임 시기에 해당하는 경인년(1590년) 이설 시기는 김상헌의 『남사록』과 일치한다.
대다수의 문헌들은 앞에서 소개한 김상헌과 이원조의 기록을 서귀진성 이설의 근거로 제시한다. 두 기록 모두 '홍로천 위에洪爐川上'로 옛 방어소의 위치를 표현했다. 하지만 이 기록만으로 옛 방어소의 구체적 위치를 추정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아래 탐라도로 추정해보면 '구서귀'라고 표현된 옛 방어소의 위치는 막연하게나마 천지연 상류라는 점은 확인 가능하다.
그러나 옛 서귀방어소에 대해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숙종 20년(1694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익태李益泰는 재임 기간 동안의 각종 공무와 행적, 시문, 하멜 등 표류인들에 대해서도『지영록知瀛錄』에담았다. 또한 이 책에는 제주 각 지방을 묘사한 그림으로 기록한 ‘탐라십경도서耽羅十景圖序’도 수록되었는데 그중 서귀소 그림과 함께 설명을 덧붙인다.
서귀방호소는 돌로 쌓았는데 성(城)의 둘레가 825자이며 높이는 12자이다.성안에는 한 개의 우물(一井)이 있는데 성(城)에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들였다.옛적에는 홍로내(洪爐川) 하류(下流)에 있었는데탐라(耽羅)가 원나라에 조회(朝會)할 때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었다’라고 하였다.
- 李益泰,『知瀛錄』「耽羅十景圖-西歸所」 1694~1696
김상헌의 『남사록』과 비교해 성의 규모가 500자에서 825자로 높이가 6자에서 12자로 커졌다. 효종과 숙종 때 기록에서도 825자로 기록되었기에 17세기 전후로 성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익태의 『지영록知瀛錄』이 김상헌의 『남사록』이나 이원조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과 차이는 옛 서귀방어소의 위치가 하류에 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이익태의 탐라십경도에 서귀방어소로 추정되는 구조물은 '구서귀'로 표현되었고 서귀진성과 홍로촌 사이에 위치한다. 이는 앞서 소개한 탐라도 상의 '옛 서귀' 위치와도 차이가 있다. 이 밖에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耽羅誌』(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와 구별해 '구탐라지'라 한다) 후대에 내용을 덧붙여 편찬한 윤시동 목사의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1766)등 문헌도 확인해야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정리하면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이옥 목사가 현재 서귀진성터로 방어소를 옮긴 것은 일치하지만 원래 서귀방어소의 구체적 위치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단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 중 「서귀소西歸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둘레가 약 275m(825자)로 원형 구조라 가정할 때 면적은 약 6,021평방 미터다. 이는 2014년 서귀진지 문화재 발굴조사 3차 보고서의 조사 대상지 면적 6,009평방미터와 우연인지 모르나 거의 같다. 여러 가지 오류를 감안해도 현재 조성된 서귀진성터와 17,8세기 실재 서귀진성의 위치와 규모는 거의 같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나타난 서귀방어소 안에는 기와 건물 7채가 있다. 4m 미터에 달하는 높은 담벼락 동서로 성문이 보이고 하급 군졸의 숙소쯤으로 보이는 초가 6채가 성 동편이 모여있다.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의 사료적 가치는 높게 평가받고 있지만 6년 후인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李衡祥목사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덕분에(?) 다소 빛이 바랜 감이 있다. 『탐라순력도』는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가 비교되고 하는데 일단 제목에서처럼 '순력'과 '풍경'이라는 점에서 그림의 관점이 다르다. 『탐라십경도』는 『지영록知瀛錄』 의 한 부분으로 총 10면으로 구성되었고『탐라순력도』는 서문 2면, 그림 41점 등 총 43면으로 구성된 일종의 기록 화첩이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이듬해 봄까지 순력에 나선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3읍과 9진을 돌며 군기를 점검하고 무기, 군량미를 파악했다. 순력의 과정으로 양로회를 개최해 노인을 위로하거나 활쏘기 대회 등도 열었다. 순력뿐 아니라 김녕굴,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산방산 등 제주의 명승지도 화폭에 담는다. 짧은 시간에 41점이라는 비교적 많은 그림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화공 김남길의 공이 컸다. 화첩의 주제가 순력인 까닭에 목사 자신도 그림에 가끔 등장한다.
숙종28년(1702) 십일월 초오일, 숙소를 정한 후지방관과 정의현감(박상하), 대정현감(최동제), 조방장助防將 원덕전,성정군 육십팔 명 군사 기물들은 다종다양하며 목자와 보인은 삼십구 명이고 말은 이백삼십 칠 필이 있다.
- 서귀조점 녹문錄文
『탐라순력도』중 「서귀조점西歸操點」은 말 그대로 목사가 군기를 점검 장면을 기록한 그림이다. 먼저 서귀진 주변의 공간 배치를 살펴보면 우선 동, 서에 문이 있고 남쪽 주변에 민가 몇 채가 보이며 서쪽에 사장射場, 북쪽에는 말 목장이 보인다. 목장에 '구서귀'라고 쓰여있는데 성을 옮기기 전 방어소를 의미하며 위치는 이익태 목사의 '서귀소'와 일치한다. 가옥 2채가 남쪽 해안가에 보이는 데 마을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의 서쪽 천지연폭포 사이에 위치한 '솔(과녁)'이 눈에 띈다. 천지연 폭포에서 활쏘기 장면을 그린 ‘천연사후天淵射帿’가 있는 것으로 보면 별도의 활쏘기 경연을 이유로 솔대를 설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서귀진성터를 '솔동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이 활터였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객사 2칸, 병고兵庫 2칸, 서귀고西歸庫 1칸, 창 8칸, 객사 서쪽 건물 2칸, 객사 서남쪽 건물 각 3칸씩 두 채, 서남쪽 세 번째 건물 2칸 등 8채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객사에는 홍포의 이형상 목사가 군사를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의 둘레는 825자이고 높이는 12자이며, 서남쪽에 두 개의 문이 있다.성 안에는 객사客舍․별창別倉․군기고軍器庫․사장射場이 있다.조방장이 1인, 치총雉摠이 1인, 방군防軍이 70명이며 사후선伺候船은 1척이다.
- 이원조李源祚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秋·冬)』(1842년)
약 백사십 년의 시간이 흐른 조선 후기 목사 이원조의 기록과 서귀조점을 비교하면 성 자체 크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건물의 수나 병력 규모는 오히려 축소되었다.같은 책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진鎭의 옆에는 예전부터 사는 사람이 없었고
단지 가난한 백성 몇 호戶만이 있었는데,
진鎭의 형세가 약화되자 백성들을 모집하여 살게 하고
진鎭 아래쪽의 폐목장廢牧場 조栗8섬 부치기를 획급하고
영원히 세금을 감하여 떠나지 않게 하였다.
○대체로 성 밖에는 논이 많은데, 정방연正方淵의 상류上流를 끌어다가
물을 대었으므로 옥토沃土라 불리었다.
동쪽성에는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다가 우물井을 만들었고,
나머지는 물고랑으로 흘러나가 성남쪽城南의 밭에 물을 대었다.
당초에 설치할 때에는 의견이 매우 많았으나
농민들은 눈앞의 이익을 탐내어 다시 수로를 뚫었다.
성 안의 우물은 가뭄이 들면 마르므로 한탄스럽다.
- 이원조李源祚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秋·冬)』(1842년)
이목사는 백성을 이주시키기 위해 조세 감면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이 성안의 우물이 마를 정도로 물길을 내 한탄스럽다는 장면은 열악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정방천(현재 동홍천)은 남주고등학교 인근 상류에서 정모시를 거쳐 정방폭포에서 바다로 나간다. 그중 한 갈래는 서귀진성 성안 우물까지 이어졌다. 19세기까지 성 동편(현재 정방동과 송산도 일부)은 대부분 논과 밭이었다. 아마 농부들은 따로 논과 밭으로 물길을 냈고 그 때문에 성 안 우물은 말랐다.
1873년 정의현감 김성구金聲久가 지은 『남천록南遷錄』 역시 마을에 대한 언급은 따로 찾을 수 없었다. 사실상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서귀진성과 포구 근처에 사람들이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해안과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지명으로 확인된 홍로와 호근이 그런 마을 들이다. 조선 말기 출륙 금지령이 해제되고 강화도 조약으로 해안을 통해 왕래가 가능해지면서 서귀포 해안에도 하나둘씩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