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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Sep 07. 2020

S# 05 제주 바다의 약탈자들

'가파도(加波島)에서 전복을 따던 일본 배 6척이 모슬포(摹瑟浦)에 와서 정박하고 일본 선원들이 제멋대로 상륙하여 촌락에 뛰어들어와서는 닭, 돼지를 약탈했고 칼을 빼들고 집주인 이만송(李晩松)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으며, 본 모슬포 백성들인 김성만(金成萬), 정종무(鄭宗武), 이흥복(李興福) 등도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40여 명이 달려 나와서 본 모슬포의 기찰장(譏察將) 문재욱(文在旭)을 위협하여 강제로 화해의 증표를 받아내고는 즉시 그 섬으로 돌아갔습니다.'

- 고종실록 24년(1887, 光緖 13) 8월 17일



처음 제주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어부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제주도 편에 따르면 고종 16년(1879) 비양도에 나가사키長崎와 대마도에서 온 어부 3명이 각각 배 7척, 14척을 끌고 와 잠수기업에 종사했다고 기록했다. 강화도 조약(1876년)으로 제물포가 강제 개항(1882년) 했고 강제로 맺은 어업 협약으로 조선 연안은 일본 어부들에게 떼돈을 벌 수 있는 먹잇감이 된다. 제주도는 그중 가장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조선 해안으로 진출하려면 제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점이었다. 게다가 제주 어장은 근대식 어업으로 상어, 전복, 해삼 도미 등 값비싼 어종들이 풍부한 말 그대로 황금 어장이었다. 동력선과 근대적 어구로 무장한 일본 어부와 순수하게 사람의 힘이 전부였던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비교할 상대도 못되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1883년 7월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후였다. 합법적인 어로권을 획득한 일본인들은 나가사키 어부들이 제주도에서 큰돈을 만진다는 소문을 듣고 파리떼처럼 달려든다. 이듬해인 1884년 4월 대마도의 잠수기 선단이 5월에는 후루야토시미츠古屋利涉라는 대마도 번사가 잠수기선 3척을 이끌고 서귀포에서 조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주목사의 불허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본 어민 100명을 모아 회사를 차리고 부산 일본 총영사의 허가를 받은 후 8척 배를 이끌고 서귀포로 향했다. 그러나 다시 제주 목사의 조업 불허로 돌아간 후 그동안 입은 손해 2만 8천 엔을 보상하라고 조선 정부에 요구한다.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 1885. 5. 26) 한마디로 당시 일본인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제주는 대대로 해녀들의 잠수어업이 주요한 소득원이었으나 일본인들이 들어온 후부터 큰 타격을 받는다. 일본인들은 잠수기선을 몰고 와 제주바다 밑바닥까지 전복, 해삼, 해조류 등을 싹 쓸어갔다. 이들 일본 잠수업자들은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온몸을 감싼 잠수복에 배에서 공기를 넣어주는 관을 연결하고 바다를 걸어 다니며 전복을 쓸어 담았다. 길어야 3분 숨을 참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해녀가 이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이들로 인해 황폐해진 제주 바다는 해녀들이 육지로 떠나 물질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제주에 유배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나가사키에서 온 15세 일본 잠수부의 만났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배마다 하루에 전복을 잡는 게 30꿰미(20개) 즉 600개라고 한다. 제주의 각 포구에 일본 어선이 무려 3~4백 척이 되므로 각 배가 날마다 잡아버리는데 대강 이런 숫자라면 이미 15~6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어업에서 얻은 이익의 두터움 이와 같은데 본지인은 스스로 배 한 척 구하지 못하고 팔짱 끼고 주어버리고 있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1899년 8월 29일



일본 어민들의 어장 수탈에 항의하는 제주도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1884년 9월 조선 정부는 일본 어민의 어로 행위에 대한 잠정 금지 조치를 내린다. 그럼에도 서귀포, 가파도, 우도, 비양도, 방두포, 건입포 등에 일본 어선들은 계속 침투했다. 일본인들은 불법 어로뿐 아니라 주민 살상,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상품 밀매 등 이전 왜구들과 같은 해적질을 자행했다. 앞에서 대마도 어부 후루야토시미츠라는 자가 어로활동에 제한을 받자 조선 정부에 배상금을 요구했다고 했는데 조선은 배상금 대신 6개월간 어로 행위를 보장해 준다. 일개 대마도 어부에게 굴복할 만큼 민씨 척족 세력이 장악한 당시 조선 정부는 나약하고 비굴했다. 1887년 3월 후루야토시미츠가 선단을 이끌고 제주 연안에서 당당하게 들어서자 제주 도민은 병기를 들고 결사적으로 일본인과 조선 정부에 항의했다.(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 1887. 6. 11 )


조선 정부가 일본 어민과 제주도민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던 사이 결국 사건이 터진다. 1887년 8월 문제적 인물 후루야토시미츠古屋利涉은 배 6척을 이끌고 가파도 인근에서 전복을 쓸어 담고 있었다. 대마도의 몰락한 사무라이藩士 일족이었던후루야토시미츠는 전복 약탈에 만족하지 않고 연일 가파도에 정박해 인근 마을에 무단으로 침입해 가축들은 훔쳤다. 제주목사 심원택 沈遠澤이보고한 사건 개요를 글 앞머리에 인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약탈한 가축은 돼지 1마리, 개 3마리, 닭 162마리로 가파도 뿐 아니라 모슬포와 인근의 일과리 등도 침입에 닥치는 대로 강탈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어부가 아니라 해적이었다.


이 사건이 이후 조선의 대처는 더욱 어이없었다. 가파도민 이만송을 살해한 일본 어민의 처벌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본은 제주도 조업중단 정지를 요구했고결국 「조일통어규칙」(1889. 11.22)을 체결에 이른다. 이 규칙에 따르면 일본 어민이 소정의 어세漁稅만지불하면 얼마든지 제주 연안에서 조업을 할 수 있었다.(그나마 기록에는 이 어세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은 자국 어민의 영사재판권을 갖게 됨으로써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여도 조선은 처벌조차 할 수 없게 된다. 10년 후 을사늑약까지 갈 것도 없다. 제주에서 조선은 이미 일본에 영해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빼앗긴 것이다.


이 규칙이 정해진 이듬해 5월 배령리(현 한림읍 금능리)에 정박한 일본 어선이 마을에 난입하자 마을 사람들이 막아내자 화가 나 마을의 사무을 맡아보던 유사有司양종신을 베고 달아났다. 이후 양종신의 시신을 검시했는데 양 어깨가 상하고 창자가 파열되어 오장이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고 할 만큼 잔혹했다고 기록한다. 



1891년 5월 15일

제주도 건입포에서 불법 어로를 하는 일본 어민에 반발하던 제주민 16명을 총과 칼로 상해. 그들 중 임순백 즉사.

1891년 6월 13일

조천진에 칼과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 난입. 부녀들을 겁간하고 곡식과 가축 약탈. 김령리 이달겸 칼에 맞아 중태

1892년 2월

대마도와 나가사키 어부 144명이 어선 18척을 타고 성산포에 불법 침입 어막을 짓고 어로 행위를 하다 쫓겨나자 얼마 뒤 일본 어민들이 총과 칼로 무장 마을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는 와중 주민 오동균이 총에 맞아 즉사.

1892년 4월

화북포 일본 어민이 쏜 총에 맞아 김두구, 고동이 중상. 두모리포 일본 어민 난입 겁간과 약탈 자행. 고달환, 고영생 칼에 맞아 중태.

- 박찬식 「개항 이후 일본 어민의 제주도 진출」(2003)



상황이 악화되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순심관巡審官이전李琠을 파견한다. 그러나 일본의 제주침탈을 허용한 조선 정부에 항거해 순심관이 머물던 숙소로 몰려와 관원을 구타하고 순심관을 배에 태워 내쫓아 버리며 강력하게 항거한다. 그리고 직접 행동에 옮겨 73개 마을 주요 포구에 순포를 배치하고 일본 어민의 약탈 행위를 저지했다. 제주 어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들과 물리적인 충돌도 불사했다. 일본 어민이 세운 해산물 가공 공장을 습격해 재물을 탈취하고 살상을 했다. (『한말 일본의 제주어업 침탈과 도민의 대응 』 강만생)


제주 어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 제주 바다를 내준다. 1890년대부터 어로 뿐 아니라 마을과 포구에 어막을 짓거나 가옥을 빌려 포획한 수산물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이 일에 선달(급제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한 자들)이나 포구 주인들이 이용된다. 단순한 어로에서 거점 확보로 확대된 것이다. 1890년대 중반 이후 어업 분쟁은 사라졌다. 일본 어선들은 별다른 충돌 없이 제주 어업을 독점해갔다. 서귀포에도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어막을 짓고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 서귀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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