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기쓰나타로靑柳綱太郞(1877~1932)는 24살에 불과했던 1901년 9월 대학을 중퇴하고 『간몬신보[關門新報]』의 통신원 자격으로 조선에 첫 발을 딛는다. 이후1903년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의 특파원을 거치며 남한 지역의 실업 사정을 조사하였다. 말이 특파원이지 정보원과 다를 바 없었다. 이후 통감부의 소속으로 전남 나주와 진도의 우편 국장을 역임한다. 우편 국장을 그만두고 통감부의 재무관이 되기 전(1907)까지 아오야기는 『목포신문』 주필로 전라도 지역을 비롯한 여러 곳을 조사하여 그 내용을 『대한일보』 지상에 발표하였다. (『재조 일본인아오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의 ‘신일본(조선)’ 건설론』 2016 최혜주)
아오야기는 전라도 우편 국장으로 일하던 시절 『제주도안내濟州道案內』(1905)라는 책을 낸다. 17세기 중반 핸드릭 하멜에 의해 제주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긴 했지만 부정확한 부분도 많고 온전히 제주에 관해 쓴 것도 것도 아니었다. 『제주도안내』 이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발행한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과『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1894)도 일정 부분을 할애해 제주를 소개했다.『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 목사가 쓴 『탐라지』를 그대로 배껴 썼고『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1894) 역시 영국해군 수로국에서 발간한 『중국해수로지』(1894) 4권 2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밝힌다.(S# 02 퀠파트와 스페르베르 편 참고) 근대 이후 외부인의 시각으로 제주의 역사와 지리, 풍습, 산업 등 전반에 걸쳐 다룬 인문 지리서는 아오야기의 『제주도안내濟州道案內』가 최초다.
일본은 한일합방 20년 전부터 한반도 지배를 위해 문헌을 통한 기초 조사로부터 근대 과학,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실질 조사의 단계를 단계별로 밟아 왔다.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식민지로 통치할 것인가의 시각에서 본다. 아오야기의 『제주도안내』 또한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해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쓰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아오야기의 시각은 결국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이 제주를 통치했던 근본적인 태도를 결정했다.그 후로도 많은 일본인들에 제주에 관한 책을 남겼지만 '대일본제국을 위한 제주 건설'이라는 아오야기의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제주 사회를 지배했던 목표와 가치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일본인의 제주 인식은 식민 지배 전략으로 이어지고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의 제주를 이해하는 배경이 될 것이다.
일본사가佐賀현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지만 사쓰마나 조슈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었다. 사가현 출신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었고 이후 사가 지방의 호전적 분위기는 나가사키나 후쿠오카 등 규슈 지방 전체로 번진다. 아오야기쓰나타로는 사가현에서 태어났고 정한론의 선봉에 선 분위기에서 공부했으며 데쓰가쿠간(현재 도요東洋대학)에 입학한다. 데쓰가쿠간 대학은 강력한 천황제 국체론의 옹호하고 고대로부터 한 번의 단절도 없었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 신화가 일본이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을 주장했다. 데쓰가쿠간에서 수학한 아오야기가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반도의 부원富源을 개척하여,
경제적 팽창 국민의 신 지반을 건설하는 것은
어찌 각하의 최대 급무가 아니겠는가.
내가 본서를 편저하는 하찮은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제주도안내濟州道案內』(1905) 서문 아오야기쓰나타로
1901년 '이재수의 난' 전후로 10일간 제주에 머무르며 흥미를 가졌던 아오야기는 1903년 다시 제주를 찾아『제주도안내』를 쓴다. 제1편 총론總論에서 제주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복속되었고 신하의 예를 취했지만 고려말 복속되었다. 제6편 인정풍속人情風俗편에서 제주민들이 오랜 동안 조선의 폭정에 원한을 가져 일본을 경모했으며 용모와 골격이 일본인들과 유사하며 여성인 경우 더욱 같다. 종교는 열등한 야만 신앙에 지배되어 있다.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기본적인 인식을 같이하는 한편 제주가 지리적으로 일본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잠시 복속되었으며 제주민들도 일본을 동경한다는 식으로 조선반도와 제주를 분리하고 일본과 비슷하다는 식의 표현이 곳곳에 등장한다.
천혜의 고도 또한 우리 일본인의 손으로 개척하고
평화를 유지하여 문화로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일본인 외에 경영 지도를 맡을 자가 없다면
우리 일본인이 크게 고려하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된다.
『제주도안내濟州道案內』 부록 제주도 경영
아오야기는 제주 개척을 주장하며 우선 사업으로 첫째 항만 수축으로 일본과 직항로를 열고 둘째 일본 어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일본 어촌과 똑같이 만들어 부원富源을 개척하며 셋째 낙후된 농축 업을 선진적 농업기술을 이용해 수익을 창출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인구 팽창의 대책으로 일본인 10만 명 이주를 거론한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망상처럼 들리지만 일본은 제주에 단순한 식민 지배가 아닌 일본인을 위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려 했음을 아오야기의 책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서귀포의 지리적 입지는 당시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제주 행정의 중심인 제주시는 일본열도 보다 조선 반도와 가깝고 과거 현청이 소재했던 대정과 정의(성산)는 동쪽과 서쪽에 치우쳤다. 반면 서귀포는 인구 등 도시 기반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열악했지만 상대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섬 내 이동 여건도 좋은 편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근대식 항만과 제주도 내를 연결할 수 있는 도로의 건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