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호 Sep 10. 2020

S#07 서귀진성은 언제 사라졌나?

임진왜란 2년 전 지금의 자리에 세웠던 서귀진성은 300년 시간을 제주도 남쪽 해안을 지켜왔다. 외세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지킨다는 명분은 언제부터인가 섬사람을 가두는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진성 주변에 억지로 백성을 이주해 살게했다는 사실은 반대로 군역이나 이를 돕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말해준다.   


왜구를 방어하던 성이 거꾸로 그들에 의해 허물어질 처지에 놓인다. 일제가 그들을 적대하던 성을 보고 가만둘리 없었다. 조선의 상징이었던 경북궁 앞 광화문을 부수고 총독부가 들어서듯 서귀진성 터에는 일제 순사주재소와 도지청이 들어선다. 서귀진성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끼?


서귀포시에서 발행하는 각종 간행물, 지역 신문, 하다못해 서귀진성을 소개하는 온갖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서귀진성은 광무光武5년(1901년)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서귀진성의 안내판 역시 '1901년 진성이 폐지'되었다고 알린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근거로 말하는지, 출처는 어디인지 모를 이야기가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서로를 베끼는 자기복제 증식의 단계에 이르렀다. 


서귀진성은 서귀포시의 주장처럼 120년 전인 1901년 폐지되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서귀진성터 안내판



1901년 서귀진성이 폐지되었다는 근거로 하나같이『광무오년신축삼월일각폐지공해성책光武五年辛丑三月日各廢止公廨成冊』을 말한다. 언뜻 보기엔 광무오년(1901년) 3월 쯤 뭔가 '폐지廢止' 되었으니 대충 '성을 헐었다'쯤으로 이해했다 치자. 폐지하다, 부수다, 허물다 등의 뜻을 가진 '폐廢'가 문장에 들어 있으니 이 같은 얼렁뚱땅 어림짐작이 무리도 아니다. 역사 전문가나 정부기관, 언론도 아닌 사람이라면 이런 오해 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신력이 조금은 필요한 지방자치단체의 기록이라면 한번쯤 뜻을 새겨 봐야하지 않을까? crtl+C ,crtl+V가 아무리 대세라도 말이다.    


앞에서 말한 긴 문장(?)은 사실 문장이 아니라 문서(冊)제목이다. 조선 후기 왕실의 재산이나 보물 등을 관리하는 기관인 내장원內藏院에서 1901년 발간한 문서 중 하나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필사본을 보관하고 있어 원문 확인을 해보았다.  



서귀진사 3간 객사 3간 공수 3간 진솔청 3간 합 12간
西歸鎭舍 三間 客舍 三間 供需 三間 鎭卒廳 三間 合十二間.

-『광무오년신축삼월일각폐지공성해책光武五年辛丑三月日各廢止公廨成冊』 1901 강봉헌姜鳳憲



본문은 진성 본채, 객사, 부엌, 군기고 등이 있고 각 3간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문장이다. 서귀진성을 폐지한다는 또는 비슷한 암시라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1901년 진성 폐지에 관한 다른 기록이 있는게 아닐까? 국가기록원에서 규장각 고문서에까지 찾아봤지만 불행히도 관련 문서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설마 이 단순한 문장에 상상력을 덧붙여 진성을 폐했다라고 했을까?    


상상력은 이 글을 쓴 자에 발휘해보자. 『광무오년신축삼월일각폐지공해성책光武五年辛丑三月日各廢止公 廨成冊』을 쓴 강봉헌은 누구인가? 서귀포 역사 관심있는 사람에겐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신축민란辛丑民亂 한 해 전, 1900년 조선 조정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봉세관으로 강봉헌을 파견한다. 이 자가 천주교인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고, 가옥 · 수목 · 가축 · 어장 · 어망 · 염분 · 노위 등의 세금은 물론,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매겨 거두었다. 도민들은 징세에 항거했고 이렇게 무력 충돌까지 이어진 민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재수의 난이다. '이재수의 난'은 이후 서귀포 성당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강봉헌의 임무가 세금을 거두는 것이니 집이나 재산을 파악하는 일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아마 서귀진성도 강봉헌의 시야에 들어왔을 것이고 신축년 3월 문서로 기록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봉세관 강봉헌이 서귀진성 폐지에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자격도 없다. 그의 관심은 단지 가혹하게 세금을 걷는 것 뿐. 


혹시 몰라 진성을 허물만 한 이유가 이 시기 전후로 있었는지 관련된 기록을 뒤졌다.



서귀진西歸鎭 성단星壇의 수축修築을 자담간역自擔幹役케 해달라는 청원請願.(내장원인內藏院印 1개)전라남도全羅南道 제주목濟州牧 정의군旌義郡 거주居住 전前주사主事 변분노邊鵬老(1904년 1월)내장원경內藏院卿 소訴대로 허시許施하니 훈측訓飭하여 각근건축恪勤建築케 할 것.

전라남북도각군소장全羅南北道各郡訴狀 내장원內藏院(朝鮮) 編 1904.1



글 앞머리에 서귀진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내용을 쉽게 풀어 보면 전라도 제주목 정의군에 거주하는 전前 주사 변분노가 성단을 세울테니 허락해 달라는 청원으로 내장원은 이를 허락한다고 지시한다. 여기서 성단이란 동방의 별이라 하는미성尾星과기성箕星이라는별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말한다. 4년전 폐지된 진성에 제단 쌓기를 원하고 이를 허락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귀진성 폐지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을까? 광무 10년인 1906년 성을 폐지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있다.

 


광무(光武) 10년(1906)에 서귀진성이 폐지된 후에1907년에
정의군수(旌義郡守) 장용견(張容堅)이 ‘의명학교(義明學校)’를
향사당(鄕射堂)에 옮겨 세웠다.
2년 후인 1909년 3월 31일에 정의공립보통학교(旌義公立普通學校)로
인가받고의명학교(義明學校)를 흡수받아 객사(客舍)로 옮겨 세웠다.
이 당시에 정의공립보통학교의 부지는
옛 정의군 객사터이었으며 옛서귀진의 터도
정의공립보통학교에서 1914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서귀진지 유적(3차)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濟州西歸鎭址Ⅱ2014



1914년 토지조사 원도 중 713번지 부분



위 인용에 따르면 광무 10년(1906년) 1907년 장용견이 '의명학교를 향사단에 옮겨 세웠으며 이후 의명학교를 흡수해 정의공립학교를 객사에 세웠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서귀진성터에 정의공립보통학교를 설립했다는 또 다른 오류가 발생한다.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1842년 이원조)의「정의현旌義縣」에 나타난 건물 이름과 위치에 의하면,객사客舍,일관헌日觀軒, 향사당鄕社堂,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이 나타났다. 향사당鄕社堂은 이전에 향소청鄕所廳등으로도 불렸다. 향청鄕廳은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하고 보좌하던 자 치기구이다.  즉 향사당은 정의현 관아에 소속된 기구이자 건물로 수많은 문헌에 등장해 다시 말할 이유도 없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조직에 대한 기본 상식만 있어도 향사당이 서귀진성에 존재할수 없다는 점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의명학교나 후신인 정의공립보통학교는 서귀진성이 아니라 정의현 관아 자리에 건립되었던 것이다.    


위 인용문은 1910년 전후 발행된 정의현감록이나 관보가 출처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보고서는 원전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인용문은 서귀진성 폐지와 의명학교 설립이 전후 인과관계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의명학교와 정의공립보통학교는 정의현 객사터에 건립된 것이 정설이다. 정의현 객사터에 정의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자 객사터는 학교 소유가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정의현 소속이었던 서귀진성터 또한 정의공립보통학교 소유라는 의미다. 1914년 토지조사원도에 표기된 정의공립보통학교는 건물의 소재가 아니라 소유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럼 서귀진성은 언제 사라졌을까? 정확한 답은 적어도 '현재까지 모름'이다. 범위를 좁히면 1905년에서 1910년(한일합방) 사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미 공식 기록처럼 굳은 1901년 진성 폐지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사실과 거리가 먼 가짜 역사가 무한 복제되기 전에...


(참고로 구한말 제주에는 제주, 정의, 대정 3군이 있었다. 한일합방 후 1913년 10월 30일 「부제(府制)」가 공포되어 이듬해 4월 1일 시행되었으며, 1914년 3월, 4월에는 부·군·면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1915년에「도제(島制)」가 실시되어 제주는 제주도濟州島가 되었다. 이 때 정의군, 대정군은 폐지되어 제주도로 통합된다. 서귀진성이 소속된 정의읍성은 1914년 일제의 읍성철폐령에 의하여 훼손되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S# 06 일본인이 기록한 제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