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부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11)로 본
구한말 제주 지방에는 제주·정의·대정군 등 3군이 있었다. 위 지도에서처럼 정의군에는 좌면, 동중면, 서중면, 우면 이렇게 4개의 면으로 나뉘었다. 서귀포는 상효· 중효·신효·하효·보목·토평·동홍·서홍·호근·풍덕(서귀리)·법환리 등 11개의 마을로 구성된 우면右面에 속했다. 풍덕리가 이후 서귀리로 이름이 변경된다. 광무 8년(1904년) 1월 조선 정부가 조사한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摠冊』에 따르면 풍덕리(서귀리)는 92호에 남자 187명, 여자 223명 모두 410명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 100호가 못 되는 가옥수로서 이는 우면에서 상효와 중효 다음으로 가옥과 인구 면에서 적다. 우면 전체는 1,664호戶, 7,189명이었다. 제주도 내 일본인 거류민 수는 총 1,300명에 달했다.(1905년) 주로 제주읍 거주하며 반은 어업에 나머지 반은 상업에 종사했다. 제주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어업권이나 상권에 개입하면서 지역사회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식민지 수탈을 위해 전국의 연안과 도서 및 하천, 수산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1908년에 시작한 이 사업은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마무리되었다. 이 조사의 보고서가 조선총독부 농공상부가 편찬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다.(농공상부 기사 요시자키 켄다로吉崎健太郎 작성) 『한국수산지』 제3집 제4장에는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제주도의 수산업 현황은 물론 사회 전반 개황이 기록되어 있다. 서귀포도 물론 이 보고서에 언급되었다. 도시로 발전하기 전 작은 어촌이었던 서귀포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기록을 통해 재구성해 본다.
정의군은 동쪽 성산포에서 서쪽 서귀포에 이르는 제주도 남동해안에 자리한다. 당시 호수는 7,326호, 인구는 36,600명이다. 제주도 전체 호수는 33,527호, 인구는 123,070명(현재 인구 약 690,000명)이니 정의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4 이 조금 넘는다. 이 중 일본인 이주세대가 약 50호, 중국인, 프랑스인 이주 세대가 각 5호다. 해마다 성어기에는 일본 이주세대 약 20호 300명이 더 거주했다. 중국인은 주로 상업에, 프랑스인은 포교에 종사한다.
당시 제주읍에서 서귀포로 한라산을 횡단하는 길이 있었으나 겨울에는 왕래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육상도로는 자동차가 통과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도보나 우마차를 통해 이동했다. 대량의 화물은 주로 배를 통해 해결했다. 『미개의 보고 제주도未開의 寶庫濟州島』 (1923)을 쓴 구로이타黑板는 당시 도로는 차량은커녕 말이나 사람이 다니기도 힘들었다고 특히 하천은 평소에는 말라 있었으나 비가 오면 물이 흘러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기록한다. 주요 도로는 제주읍을 기점으로 성산포와 정의읍, 대정읍을 거쳐 모슬포와 연결되는 것, 연안 마을을 돌아 섬을 일주하는 도로, 한라산을 횡단해 서귀포를 연결하는 4~5개 노선에 불과했다. 1912년부터 13년까지 도민의 손으로 일주 도로를 고쳐서 다시 깔았지만 여전히 내를 건너는 다리가 없어 차량의 통행은 어려웠다.
대정 2년(1913년) 이토伊藤博文 해사 과장이 목포를 기점으로 본도를 일주하는 것 2척, 부산을 기점으로 2척 매월 8회의 정기 편을 마련하여 조선 우선郵船회사로 하여금 이 항해를 맡도록 했다.
- 『미개의 보굴 제주도未開의 寶庫濟州島』 (1923) 구로이타黑板
구로이타는 1913년 처음으로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는 정기 항로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반면 1911년 『남조보굴제주도南鮮寶窟濟州島』를 쓴 오오노슈우게츠大野秋月는 명치 42년(1909년) 봄, 부산 기선회사의 창룡蒼龍, 현익顯益, 광제顯益 등 기선이 부산과 제주를 오가는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고 썼다. 어느 쪽이 옳든 제주와 육지를 연결하는 정기항로는 경영난으로 정기 배편 수를 줄이기도 했다. 이후 1922년 12월 아마가사키尼崎 기선회사가 부산-제주, 서귀포-오사카 정기 직항로를 열었다. 그 이전인 1918년 부정기지만 5백 톤 급 기선 함경환 咸鏡丸 제주 – 오사카 간 최초로 운항했다.
첫째, 본도(제주)를 개방해 모국(일본)과 교통을 편리하게 할 것.
둘째, 도내 전화를 가설하고 항만을 수축할 것.
셋째, 도내 통로(도로)를 개수할 것.
-『남조보굴제주도南鮮寶窟濟州島』(1911) 오오노슈우게츠大野秋月
한일합방 1910년 전후 약 3년간 경제 변동에 대해 조사 기록한 오오노슈우게츠大野秋月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식민통치 전략을 제시한다. 그의 제언은 이후 서귀포의 도시 변화에 그대로 적용된다.
수산물 이외에 소고기, 콩 등 육산물이 풍부하여
일본 어선 및 상선이 빈번히 출입한다.
부근에는 산림이 있어 땔감을 생산한다.
-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1911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기사 요시자키 켄다로
20세기 초 제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농작물은 보리, 조, 콩류, 고구마 등이다. 쌀이 600섬, 보리가 20만 섬, 조 20만 섬, 콩이 약 6,000섬이다. 수산물 외에 콩과 소고기가 많다는 점은 해안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내륙 쪽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구황작물로 유명한 고구마(제주말로 '감저')는 일제 강점기에 생산량이 폭증했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다. 18세기 중반 조선통신사였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왔다. 한국수산지는 비양도에 거주하던 일본인 나가사키長崎가 종자를 구입해 나눠주고 재배법을 알려 주었다고 기록한다. 또한 태풍으로 농사를 망칠 때 고구마로 기근을 벗어났다고 한다.
인가가 126호, 순사 주재소가 있다.
가구 수는 1904년 보다 34호가 증가했다. 제주도에는 고종 32년(1895년)에 최초로 경찰청을 설치되었다. 이후 광무 10년(1906년)에는 광주 경찰서 소속 제주 분파소로 두었다가 광무 11(1907년) 년에 목포 경찰서 제주 분서로 변경된다. 강희 2년(1908년)에 제주 경찰서로 승격했다. (「 증보 제주 통사」. 김봉옥. (2000). 1911년 제주 최초로 일본인 경찰서장이 부임한다. 1908년 혹은 1911년 3곳의 순사 주재소가 추가로 설치되는데 그중 하나가 서귀포 순사 주재소로 추정된다.
서귀포 순사주재소가 설치된 곳이 바로 서귀진성이다.순사주재소 설치로 서귀진성이 파괴되었다고 가정하면 그 시기는 1908년 또는 1911년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내 치안 유지 및 범법자 체포 기능 등 현재 경찰청 역할을 담당해오던 포도청은 고종 31년(1894년)갑오경장 때 폐지되고 경무청이 신설되었다. 제주 역시 1905년 행정구역 재편을 하며 경무청을 설치하였으나 이듬해인 1906년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목사를 두며 경무청은 폐지된다. ( 「 제주경찰사」 2000년 제주지방경찰청)
식민지 조선의 경찰의 역할을 현재 경찰 수준으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경찰은 본연의 임무에 해당하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는임무를 일탈해 식민지사회의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탄압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경제계 조사와 보건 위생 관리 등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서귀진성을 허물고 일본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순사주재소가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광화문을 허물고 총독부 건물이 들어선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피지배 식민에게 권력 교체를 선언한 것이다.
주민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주요 수산물은 어린 돔, 어린 상어, 자리, 전복, 해삼, 미역 등이고
어린 돔이 가장 많다. 일 년 내내 어획한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제주도 해변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반농반어 半農半漁로 생계를 유지했다. 특히 여자들의 부지런하다고 표현한다. 가사를 하면서도 연중 바다에 나가 어패류와 해조류를 채취하는 제주 해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 어업은 채그물 따위로 배에서 물고기를 건져올리는 기초적 어업 형태를 보였으나 근래(1911년)에는 대규모 그물로 정어리, 상어 등도 잡는다. 당시 제주 전역에서 멸치, 고등어, 삼치, 자리돔, 황돔 등이 주로 잡은 것과 비슷하다.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 역시 일반적이다.
자리그물 2통, 어린 상어잡이 자망 6통 있다.
이 지역은 매년 일본 잠수기업자가 근거로 하는 막사 두 채가 있다.
일본 어부들에 의해 잠수기업潛水器業이 한때 성행했으나 마구잡이로 인해 쇠퇴했다. 잠수기업은 제주에서 일본인이 종사하는 주요 수산업이다. 잠수기업 전성기 때에는 성산포에만 한때 어막 30여 호에 이르렀으나 1911년에는 2~3호에 불과할 정도다. 제주도에 근거를 둔 잠수기업자들은 대부분 매년 8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조업을 하고 4월이 되면 강원도 연안으로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복은 8월에서 12월까지 해삼은 1월에서 3월까지 채취했다. 가파도, 서귀포, 표선, 성산포, 행원 다섯 곳에 어막魚幕 약 10채가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