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개항으로 세상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인구 2만 이상의 전 근대 도시라 할 수 있는 곳은 한성, 개성, 평양이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인 상주, 전주, 대구, 충주, 의주 등 대륙 도시들이 인구 1~2만의 소도읍으로 발달했다. 한성 등 3개 도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은 생산과 소비를 지역 내에서 해결하는 자급형 경제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대외 물류나 교역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연스럽게 식량 생산과 관련된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도시가 발전했다. 교통수단이라고 해야 도보나 기껏해야 우마차가 전부였으니 지역 간 상업이나 유통에 한계가 분명했다.
개항은 전통 도시의 위치를 크게 흔들었다. 상주, 충주, 의주 등 내륙 도시들은 인구가 감소하는 반면, 함흥, 목포, 통영, 군산, 신의주, 송림, 청진 등의 항구가 인구 1∼2만 명 규모의 도시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동안 인구 2만 명 이상의 신흥 도시로는 부산, 인천, 남포, 원산, 대구 등이 등장한다. 이들 신흥도시는 대구를 제외하고 모두 항구를 기고 있다. 내연기관을 가진 기선으로 공간의 중심축이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한다. 그 중심에 항구가 있었다. 서귀포항 역시 일본과 내륙으로 수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며 교역의 기능을 담당했다. 항구로 물자가 쌓이고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 근대도시가 항구를 축으로 발전한 것처럼 서귀포 역시 항구에서 도시가 시작된다. 서귀포시의 역사는 서귀포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1913년 1월 13일 매일신보에 실린 『제주濟州의 양항 발견良港 發見 』이란 기사다. 장황하지만 서귀포항이 개발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전 문장을 싣는다.
제주(濟州)의 양항 발견(良港 發見)
종래(從來) 제주도(濟州嶋)에는 항만(港灣)이 무(無)하다 칭(稱)하야 근(僅)히 우도묘지(牛嶋錨地)의 성산포(城山浦)를 조선우선부산본적외회선(朝鮮郵船釜山本籍外廻線)이 기항지(寄港地)로 정(定)하얏더니 금회(今回)남선(南鮮)의 항로(航路)시찰(視察)을 종(終)하고 귀임(歸任)한 이등체신국해사과장(伊藤遞信局海事課長)은 제주도(濟州島)를 답사(踏査)한 결과(結果)로 세인(世人)이 부지(不知)하던 양항(良港)을 발견(發見)하얏다 하는디 현하(現下) 남선명령항로기항지(南鮮命令航路寄港地)되는 성산포(城山浦)는 원록지역(元祿之役)에 일본수군(日本水軍)이 동항(同港)을 폐색(閉塞)하얏슴으로 항구(港口)에 무수(無數)한 대석(大石)을 투하(投下)하얏다는 전설(傳說)이 유(有)한데 과연(果然) 차항구(此港口)는 수몰(水沒)하야 선박(船舶)의 운행(運行)이 파(頗)히 위험(危險)함을 견(見)한지라 금(今)에 현상(現狀)오십톤이상(五十噸以上)의 ○○입항(入港)하기 불능(不能)하야으로 양항(良港)이 무(無)한고(故)로 제주도(濟州島)근해(近海)의 항행(航行)은 위험(危險)하다 인정(認定)하야 일반해운업자(一般海運業者)는 동방면(同方面)에 선척(船隻)을 송(送)하든 사(事)도 소(少)하야 교통(交通)도 불편(不便)하며 전남(全南)의 보고(寶庫)라 칭(稱)하야 동도(同島)도 전혀 세인(世人)의 구(口)에 상(上)치 못하고-개발(開發)도 우지(又遲)タ 하리니 금회(今回)여(予)가 동방면(同方面)을 시찰(視察)한 결과(結果) 발견(發見)한 신항(新港)은 동도(同島)의 남해안(南海岸)일본측(日本側)에 접(接) 방면(方面)이오 항명(港名)은 서귀포(西歸浦)라 칭(稱)하야 정의군(旌義郡)에 재(在)한디 동항(同港)은 항구(港口)로서 약(約)육칠정ㅇ(六七丁七ㅇ)에 일광화찬농(日光華讚瀧)과 여(如)한 대폭포(大瀑布)가 유(有)하고 차농(此瀧)은 완류(緩流)요 처(處)에 연(淵)을 작(作)하야 해안(海安)에 분(奔)하야 서귀포(西歸浦)양항(良港)을 ㅇ작(作)한지라 차항(此港)은 수심(水深)도 상당(相當)하며 목전두(目前頭)에 소도(小島)를 공(控)하야 풍(風)을 피(避)하으로 여하(如何)한 폭풍우(暴風雨)라도 삼백돈(三百暾)의 선박(船舶)은 완전(完全)히 동항(同港)에 번류(繁留)함을 득(得)할것이오 상만조시(尙滿潮時)는 백돈내외(百暾內外)의 박(舶)이면 항내(港內)에서 피상(避上)하야 동하연(同河淵)에 정박(碇泊)할지니 즉현금간(卽現今間)은 금회(今回)발견(發見)한 결과(結果) 동도 (同島) 근해(近海) 출어선(出漁船)의 호근거지(好根據地)로 적호(適好)한지(地)라 유기위치(維基位置)가 남해안(南海岸)이오 조선(朝鮮)본토(本土)와 접촉(接觸)한 편의(便宜)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각해운업자(各海運業者)는 공(恐)하야 동방면(同方面)에 출범(出帆)치 못하더니 금회(今回)동항(同港)이 유(有)함을 지(知)하면 장래(將來)차우(此憂)를 제(除)하고 발선(發船)함에 지(至)하리라 운(云)한것이요 동항(同港)에는 목하(目下) 내지인(內地人)의 포어업자(飽漁業者) 삼호(三戶)가 거주(居住)하며 선인어부(鮮人漁夫) 약간(若干)이 둔좌(屯左)할뿐이오 수견극(受見極)히 적막(寂寞)한 처(處)이더라.
요약하면
제주에 항만이 없어 성산포에 우편선 기항지를 정했는데 항로를 조사하던 이토 체신국 해사 과장이 돌아가다 사람들이 모르던 좋은 항구를 발견했다. 현재 성산포는 50톤 이상 배들의 입항이 어려워 해운업자들이 운송을 꺼려 교통이 불편해졌다. '전남의 보고'라 입에 오르지만 개발도 더뎌 시찰한 결과 제주의 남해안 일본 쪽으로 향한 항구를 발견했는데 정의군에 위치하고 항구의 이름은 서귀포다. 항구로부터 약 6~700미터 거리에 일본의 찬농 폭포(일본의 3대 폭포)와 같은 큰 폭포가 있고 폭포는 천천히 해안까지 흘러 서귀포 양항을 만든다. 이 항은 수심이 깊고 작은 섬(새섬)을 앞에 두고 있어 어떤 폭풍이라도 삼백 톤 내외의 선박이 피항할 수 있고 만조 때에는 백 톤 내외의 배들은 천지연까지 올라 정박이 가능하다. 이번 조사 결과로 제주 근해 어선의 근거지로 적합하지만 제주 남쪽 해안에 위치해 조선 본토와 접촉이 불편함은 아쉬운 부분이다. 해운업자들이 서귀포항이 있음을 알면 걱정을 덜고 운항할 것이다. 현재 서귀포에는 일본인 어부가 3호 거주하고 조선어부도 약간 있다. 파악해 볼수록 적막한 곳이다.
20세기 초반 서귀포항은 소형 기선이나 어선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으나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 피난항이나 어항으로 역할은 가능했으나 무역항으로는 부적합했다. 일제가 방파제 공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이 같은 입지 조건의 한계 때문이었다. 산북지역이 산지항을 중심으로 내륙과의 교역이 발달했다면 산남의 중심인 서귀포항은 일본인과의 어선 및 활어의 수출이 50% 이상을 차지했으며 나머지는 기타 연안 무역이었다. 연안무역품 중 주요 출하품은 선어, 미역, 우뭇가사리 등이고 입하 품목은 잡화가 많았다.
아래 표는 1936년 서귀포항을 통해 입출入出된 품목이다.
표에서 보는 것처럼 공산품과 잡화가 물동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시기 제주의 어업과 서귀포항에 관련된 신문기사 통해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겠다.
제주 근해(濟州近海)에는 매년(每年)동기(冬期)를 당(當)하면 사(鰤),유(鮪), 조(鯛) 등(等)의 어획(漁獲)이 불소(不少)한데 본년(本年)에는 어황(漁況)이 불호(不好)함으로 내지인 어업자(內地人 漁業者)는 퇴귀(退歸)하는 자(者)가 파다(頗多)한다더라. 풀이하면 매년 겨울 제주 근해에 농어, 다랑어, 도미 등 많이 나는데 올해는 어황이 좋지 않아 일본인 어부들이 많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최근 제주지방이 발전함에 따라 지방경제도 발전해 택지가 부족해 평당 오원 내외로 거래가 성사되고 가옥도 백원 남짓하던 것이 백오십 원에서 이백원까지 올랐다는 기사다. 1911년 조사된 물가를 살펴보면 목수나 미장공 등 숙련노동자 임금이 일본인이 1원에서 2원, 조선인은 750전에서 1원 500 전 사이이고 단순노동자는 일본인 500 전에서 1원, 조선인은 500전 이하였다. 백미 상품은 한말 당 2원 30 전, 보리 한말 500 전, 밀가루 50봉당 3원 200 전, 소고기 돼지고기는 근 당 200 전, 닭 한 마리 200 전, 석유 한 상箱? 500 전, 달걀 개 당 6 전, 설탕 1.8리터 130 전, 조선소주 1.8리터 250 전. 맥주 1.8리터 2원 500 전, 사이다 1.8리터 1원 400 전, 한일 담배 한 보루 950전이다. (남선보굴제주도南鮮寶窟濟州島 1911년 大野秋月)
조선총독부 관보 「제주록」중 1913년 7월 광양환光陽丸, 신재환新在丸의 정기항해표를 보면 1913년에 이르러 서귀포에도 기선이 운행됨을 알 수 있다. 제주와 목포를 제주 동쪽으로 운행하는 광양환은 소안도-산지-조천-김녕-성산포-서귀포를 기항지로 하여 7월 한 달간 4차례, 조도-추자도-산지-한림-모슬포-서귀포 등 서회하는 신재환도 역시 4차례 왕복 운행했다. 1914년에는 공주환公州丸과 진주환晉州丸 제주(서귀포)-목포간 정기선 운행기록을 남겼고 1915년 4월 10일부터는 삼포환三浦丸과 공주환公州丸이 서귀포를 경유해 제주와 부산 간 정기 운행을 시작했다.
1918년 함경환咸鏡丸(5백톤급)이 제주-오사카간을 최초로 운항을 시작했다. 1924년 경에는 7백톤급인 강원환江原丸과 복견환伏見丸이 월 2회 운항하였다. 1929년에 제주-오사카 간 정기여객선을 복견환伏見丸이 930톤급 군대환君代丸으로 대체하여 운항하며 이때부터 도민들이 일본으로 가서 노동으로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 오사카로 왕래가 빈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