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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Sep 21. 2020

S# 10 서귀포에서 오사카로

섬 아가씨가 양산을 지니기 시작했다.
 겨드랑이에 지녔던 바구니가 핸드백으로 변해간다. 
면面마다 두부집이 생겼다. 조선 짚신이 고무신으로 바뀌었다. 
이 무슨 변화냐고 섬의 노인들이 말한다. 정말 대단한 변화다. 
 
- 『제주도濟州島의 지리적연구地理的硏究』 1933년 마스다이치지桝田一二 


마스다이치지가  『제주도濟州島의 지리적연구地理的硏究』 를 펴낸 1933년 제주에서 일본으로 배를 탄 사람은 29,208명이었다. 1922년 아마가사키尼騎 기선회사가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를 개설한 첫해 3,502명 일본으로 건너간 수에 비하며 8배쯤 증가한 셈이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제주인의 수는 47,272명으로 전체 조선인 일본 거주자의 33%에 달했다. 일본 거주 제주인의 75%인 37,938명이 오사카에 살고 있어 일본 타지역에 비해 압도적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사카로 가는 배편이 운송회사 간 경쟁으로 인해 무척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주민의 일본행은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어부들의 제주 조업으로 근대적 어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배에 오른 제주 어부들로부터 일본 도항 길이 열렸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본격적인 일본행의 도화선이 되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한 중공업 제품의 폭발적 수요는 근대 일본 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기타큐슈北九州의 탄광 및 공업지대 특히 한신神 공업지대- 고베 ·아마가사키尼崎 ·오사카 ·사카이堺 등 각 도시로 이어지는 임해 공업지대-의 비약적인 성장은 값싸고 질 높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제주민은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기에 적합했다. 


  1922년 아마가사키尼崎  기선회사는 제주도(서귀포 경유)~오사카 간 직항로를 열었다. 이듬해인 1923년 조선우선朝鮮郵船 주식회사도  같은 항로 운행을 했고 여기에 고시마우선까지 가세해 삼파전 경쟁을 벌리며 10원 전후였던 운임이 3원까지 떨어진다.    


제대간항로개시濟大間航路開始
“수삼년 이래 우리 조선에도 변천이 다유하야 안일을 연상하던 일부 인사들도 노동의 신성과노동은 인생의 직분임을 절실히 각오하야 적수공권으로 도동하는 형재가 제주도만 만여명에달하나 피땀을 흘리고 저축한 금전은 래왕잡비에 대부분이 소비됨으로 일반 유지는 만히 늣기던 바 도동한 우리 형제를 위하야 대판에 조선인구제회를 조직하고 만히 노력하는 제주도청년 김병돈씨는 우리 형제의 피땀이 도로에 부로가함으로 만일이라도 구제코자 백방으로 주선하던 바 대판에 본점을 둔 니기기선부와 제주도주도 상선주식회사의 양해를 잇고 제주 대판간에 두 회사가 협력하야 항로를 개통하게 되얏는듸 일인의 게 대하야 비용상 오륙원의 이익이 되겠다하는바 일 만명의 승객이 잇다하면 제주도상 오육만원의 이익이 된다더라.”
(조선일보 1923년 3월 6일)

위 기사를 간추리면 오사카에서 일하는 제주민이 만명에 달해 열심히 일하지만 대부분 운임으로 썼다. 조선인구제회를 결성한 김병돈은 아마가사키 기선회사의 양해를 얻어 제주-오사카간 항로를 열었다. 운임을 약 5~6원 낮출수 있고 만명이면 제주도에 5~6만원 이익이 된다. 1922년부터 제주-오사카를 오간 배는 기마가요마루君代丸였다. 일본 오사카 외곽 이카이노抵飼野-재일 오사카 제주민 거주지역-에서 사진작가 활동은 했던 조지현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절 기미가요마루는 ‘노예선’이었다고 정의한다. ‘자이니치’-재일 조선인을 칭하는 차별적 명칭- 라는 하층민으로 살며 일본 주류사회에 결코 편입할 수 없는 신분제적 차별을 받았다.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抵飼野 일본 속의 작은 제주』 2019년)  


부산일보 1925.11.18
제주도 서귀포항 기공식 21일 거행
"제주도 다년의 현안인 서귀포 항구 방파제 수축 공사 기공식을 21일 오전10시 개최할 것인데 조선우선의 목포 서귀포 간 정기선 통영환은 20일 기항할 것이다."

기존 항구 시설로는 일본 오사카 간 정기항로와 연안 여객 화물의 수요 증가가 강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 토목과에서 제작한 서귀포항 평면도를 통해 현재 서귀포항과 비교해보겠다, 가장 큰 차이는 외항이다. 새섬 동쪽에 설치된 외항부두는 1965년 이후 건설된 것이다. 서귀포항은 새섬과 연결된 방파제와 현재 칠십리교 앞에 위치한 물양장으로 볼 수 있다. 1933년 평면도에는 물양장이 보이지 않지만 1939년 서귀포항 수축 공사 때 물양장이 설치된다.  


(좌) 현재 서귀포항 /(우) 1933년 서귀포항 방파제 복구공사 계획서 중 평면도 조선총독부(출처 : 국가기록원)


1932년 태풍으로 새섬과 연결된 방파제가 일부 유실되었으나 총공사비 16,500원을 투입해 1934년 복구공사를 완료했다.  


조선과 일본의 정기항로는 제주도를 일주하며 10군데 기항지에서 수시로 손님과 짐을하역하였다. 이 섬은 사면이 바다가 항상 바람 파도가 심하여 항해에 위험이 따르고 설비가 불완전한 곳에 정박 또한 낮과 밤에는 가릴 것 없이 항상 위험하다. 교통하고 해운을개선할 필요하다. 제주-오사카 항로는 천톤급의 대형선을 도입 운행하지만 목포, 부산,여수로 가는 배는 소형선이다. 차후 최소 3,400톤급 선박을 취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현재에 항로의 개선을 기대 할 만큼 채산성이 떨어지지만 제주의 물산의 향상을 고려하면 수익성을 위한 보조항로의 부활이 요구된다.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 1939년 조선총독부


오사카 정기선인 아마가사키 기선회사의 제2 기미가요마루君代丸호는 919톤급 선박으로 매월 3일, 15일, 25일 3회 운항했다. 기항지는 오사카-시모노세키-부산-애월-산지-한림-고산-모슬포-서귀포-표선-성산포-김령-조천이다. 오사카에서 제주로 돌아올 때는 석탄을 싣기 위해 시모노세키下關에 기항했다. 

1938년 정기항로상황『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 1939년 조선총독부


1930년 11월 조천출신 고순흠이 일본인들이 해운 강점으로 인한 횡포를 막고 4만 재일교포의 권익옹호와 복지증진을위하여 동아통항조합을 설립하고, 1,300톤 급 후시기마루伏木丸를 제주와 오사카간 항로에 취항시켰다. 제주-오사카 간 항로 경쟁으로 인해 운임이 3원까지 추락한다. 그러나 제주민의 자본으로 만든 동아통항조합의 후시기마루는 1932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운항정지를 당하고 회사 또한 해산된다. 당시 부산일보를 이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제주도 대판 간 항로 3기선 회사 대경쟁 종래의 반액에도 모자라는 운임으로 세 회사 모두 대타격
전남 제주도는 해녀의 본고장으로서 유명하다. 이 해녀들의 섬 밖 출가로 1년간 4만명의 왕래가 있고 이를 위해 종래 대판, 이 섬간 항로로 조우(朝郵) 및 아마가사키(尼崎)의 두 회사가 취항하면서조우는 2척으로 연간 약 60회, 아마가사키는 30회 항로를 운행하여 두 회사는 자연 경쟁적 입장이 되고 있는데 서로 그 불리함을자각하고 그 후 협정했다. 그런데 올해 4월 이래 가고시마 상선이 순길환으로 이 선에 끼어들어 또 다시 맹렬한 경쟁을 이룰 수밖에 없어서 대판, 제주도 간의 보통 한명 약 10원 정도가 현재는 3, 4원으로 절반에도 모자라는 운임으로 선객의 쟁탈전이 열리고 있다.따라서 운임을 한 사람 5원으로 봐도 4만명은 20만원으로 이를 세 회사로 분할하면 7만원도 되지 않아 연료비도 충분치 않은 상태로모두 타격을 입고 있다.
부산일보 1931. 4. 24
대판 제주도 항로 근래 협정 성립 결국 두 회사에서 배급
대판 제주도 항로는 조우(朝郵), 아마가사키(尼崎), 록우(鹿郵),
통항조합의 4사 병립 경쟁의 결과 여객 운임은 지난 겨울 이래 공개 임금의 절반인 3원까지 떨어지고 각 회사 모두 채산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날 이래 협조 ○분 농후했으나 통항조합 측의 태도강경으로 협정이 힘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통항조합은 이 무모한경쟁이 탈이 되어 자금적으로 막혀 마침내 지난 달에 한해 배항을그만두기로 이르렀다. 그 후 조우, 록우, 아마가사키의 3사는 대판에서 협의 방안에 대해 협의 중 가까스로 성립되고 있는 것 같다.결국 선(線)은 두 배 이상 배선할 때는 도저히 채산이 되지 않으므로 현재 배선하고 있는 3개 중 한 곳은 배선을 중단할 수밖에없는 상태이므로 조우가 배선을 그만 두든지 또는 록우의 순길환을 용선하느냐에 있다. 지금 이곳에 문제로 해서 출장 중인 모리(森) 조우 사장이 실사 조사 위에 어느 쪽으로 결정하고 재협상을이뤄 근일 중에 정식으로 결정할 것이다.

마스다이치지는 동아통항조합가 운항을 포기하게 된 배경에 대해 그의 책 『제주도濟州島의 지리적연구地理的硏究』(1933)을 통해 무리한 가격 경쟁으로 폐지되었다고 썼지만 조선총독부가 개입한 내막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총독부는 동아통항조합 간부가 오사카에서 좌익운동의 전위로 활동하고 있어 이를 이유로 치안상 요주의 인물로 지목한다. 1932년 말 지속적인 탄압의 결과로 재정위기에 처했으며 1933년 12월 1일 결국 완전히 운항을 중단한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과 함께 일본도 경제 불황을 맞이한다. 한신공업지대를 비롯한 노동력 집중 산업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더욱 저임금 노동자에 의존하며 제주민의 수요는 더 커졌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민의 수는 한해 5만 명을 기록 전 도민의 25%가 장단기적으로 일본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폐해도 심각했다. 도내의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이 올랐고 통화 유입으로 인해 인플레도 발생한다. 값싼 노동력으로 일본 노동자의 실업문제도 발생하자 일제는 일본 도항 억제 정책을 쓴다. 12개 경찰관 주재소에 출가자를 선별토록 지시한다. 그 결과 1933년 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도항 신청자 12만 명 중 70%인 8만 4천 명이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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