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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Oct 01. 2020

S# 11 제주,  기차 여행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
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 『설국雪國』 1937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용산역 홍등가의 불빛이 흔들리는 8시 55분. 비둘기를 타기 위한 사람들이 용산역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던 1984년, 비둘기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완행열차는 용산을 떠나 밤을 새워 남으로 달린다. 용산에서 구례까지 차표는 2천3백 원 남짓했다. 목포행 완행열차 0시 50분은 용산에서 출발한 비둘기가 대전에서 멈춰 호남선으로 갈아타는 시간이다. 비둘기가 대전에서 멈춘 동안 흡입하는 가락국수는 요즘 말로 치면 잇 템(It item)이다. 쇄골이 불쑥 튀어난 사내들은 객차 의자에 3명씩 구겨져 앉는다. 기차는 후미진 역사驛舍에 밴 노숙의 냄새와 지린내를 뿜어냈다. 간혹 객차 사이 변소에서 30도짜리 강소주가 게워낸 토악질과 분비물들이 철길 침목 위로 흩어지곤 했다. 그렇게 구겨진 채 밤을 새워 달린 열차에서 맞이한 신새벽이 기차 여행의 첫 기억이다. 구례역에서 내린 이들은 시뻘겋게 핏발선 눈으로 지리산을 향해 걸었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노래하며...그 시절은 그랬다.


끔 한 겨울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생페테르부르크까지 달리는 기차를 상상하곤 한다. 비행기가 여행의 현실이라면 기차는 로망이다. 제주도 한때 로망이던 때가 있었다.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제주에 대한 설렘은 여전만 못하다.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2~3시간이면 차로 일주가 가능한 제주에 철도는 상상하기 어렵다. 육지와 연결하는 목적이라면 모를까... 만약 제주에 차가 없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배로 오갔을 것이다. 백 년 전쯤 차가 흔치 않고 도로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철도는 유일한 장거리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제주에서도 기차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도는 일본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1899년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약 33.2Km 구간(경인선)에 처음으로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제주에도 아주 짧은 기간 철도鐵道가 놓였고 그 위로 기차(?)가 달렸다. 기차라고 했지만 레일 위를 동력 기관 없이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궤도軌道차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에는 경편철 輕便鐵, 사람 힘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수압궤도手押軌道차 등으로 불렸으나 정식 명칭은 순환궤도 循環軌道 차다. 제주민들에게 순환궤도차 보다 '도록고' 또는 '도로코'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일본 관광열차인 '도롯코'를 본 딴 이름으로 보인다. 2008년 제주시 건입동 주민들이 세운 작은 표지석도 '도록고(궤도)차'로 표기되어 있다. 이 궤도차는 본래 광산이나 공사 현장 등에서 원료나 자재를 실어 나르던 무개화차無蓋貨車였다. 탄광 등에서 석탄을 운송하던 궤도차와 같은 용도다. 일본에서는 이를 사람이 끈다고 해서 '진샤人車'라 했다.


일본 인차人車의 모습



1927년 5월 제주도 순환열차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카가와 코쥬로中川小十郎및 야마모토 세이빈山本政敏 두 사람 외 7명이 전남 제주도 순환철도 건설 인가를 신청했다. 자본금 2백5십만 원으로 제주를 일주하는 순환식 궤도를 구상한 것이다.


1927년 5월 12일 조선일보
1927년 5월 13일 매일신보



1920년 조선총독부는 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철도 건설을 구상했으나 재정 여력이 부족해 민간 자본으로 사철私鐵을 건설 후 이를 사들여 국유화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제주 순환철도는 일본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와 제휴해서 항구의 화물 운송을 연계하고 자동차 영업권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1차 사업으로 구좌면 김녕리에서 조천, 제주 시내를 거쳐 한림 협재에 이르는 약 30리 구간, 2차로 김녕에서 성산포까지 13리, 협재에서 모슬포까지 18리 등 합해서 31리 구간, 3차로 모슬포에서 서귀포를 거쳐 성산포에 이르는 40리 구간 건설을 목표로 했다. 총 3차에 걸친 계획이 완성되면 제주는 순환 궤도차로 일주가 가능해진다.


1차 제주 순환 궤도 노선


1927년 8월 4일 조선일보


제주를 궤도차로 일주하는 계획을 신청했으나 공사비 등의 자금 확보는 쉽지 않았다. 사업 신청을 한지 1년이 넘은 1928년 11월에 사업 승인이 떨어진다. 자본금 70만 원으로 제주도순환궤도주식회사濟州島循環軌道會社라는 회사를 세우고 1차 공사를 시작한다. 처음 계획했던 자본금 250만 원의 삼분 일로 시작된 불안한 출발이었다. 총 공사 구간은 백이십 리로 도내 일주를 목표로 했다. 궤도 폭은 2척으로 60cm에 불과했다. 동력은 수압手押 즉 사람의 힘을 빌렸다. 궤도를 운행하는 객차는 모두 1량으로 구성되고 4인승이었으며 화물차는 0.5~1.5톤 사이다.


1928년 11월 12일 중외일보



시작한 지 1년 만에 공사를 마치고 시범 운행을 1929년 9월부터 궤도 시범운행에 들어갔다. 시범 운행 며칠 만에 사고가 이어지며 신문은 연일 사고 소식을 전했다. 사고 원인은 운전 미숙, 안전 조치 소홀 등 과실 등이었으나 중심이 불안전한 협궤 열차의 구조가 근본적 원인이었다. 당시 보도된 기사들은 사고의 원인이나 대책보다는 피해자의 상해에 초점을 맞추었고 궤도 회사 또한 다친 사람의 보상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순환 궤도에 대한 불안과 불신은 더 커졌다.


1929년 10월 9일 조선일보
같은 해 10월 23일 중외일보



시범 운행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았다. 피해자는 주로 조선인이었고 사고 책임이 있는 제주 순환철도회사의 경영진은 일본인들이었다. 사고 피해자들은 거듭된 사고에 치료비 등 배상을 요구했으나 회사 측은 거절했다고 당시 신문은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 11월 5일 제주 순환 궤도는 정식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궤도차 일본 자료 사진
1929년 10월 31일 조선일보


개통 후에도 순환 궤도에 대한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공사에 참여한 인부는 물론 승객들도 다쳐 회사에 비난이 거듭되었으나 사 측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언론은 위험한 순환 궤도에 대해 연일 보도했다.



1929년 10월 23일 중외일보


1929년 10월 5일 조선총독부 관보는 순환 궤도의 주요 정류장과 영업거리를 고시했다.


<수압식 궤도 운수 영업개시>

제주순환궤도 주식회사 제1영업 선인 제주에서 김녕 및 협재에 이르는 34.5마일의 수압식 궤도는 9월 6일부터 운수 영업을 개시하며  거리는 다음과 같다.




제주 ~김녕간 

제주~협재 간





1929년 10월 5일 총독부 관보



제주순환궤도는 개통 2년 만에 운영을 중단한다. 거듭된 사고로 인해 민심이 떠난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의 힘으로 운행하는 궤도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일주 도로 개통에 따른 자동차 운송업의 발달과 기존 연안 해운에 비해 경쟁력이 뒤처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결국 1931년 9월 22일 자 총독부 관보에는 궤도 운수 영업 폐지가 고시된다. 고시 내용에는 개통 당시 없었던 지선이 추가되었다. 사업 기간 동안 본선에서 제주 읍내로 연결되는 지선 1.3km 구간이 추가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9월 22일 총독부 관보                                 



1929년 개통 이후 순환궤도에 대한 언론 기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고를 보도할 수 없었던 상황이 아닌가 추측된다. 김녕~제주~협재 간 1기 공사 구간 이후 예정된 2기, 3기 공사도 진행되지 않았다. 만약 순환궤도가 원활하게 운행되며 승객 이용과 물류 운송에 도움이 되고 수익이 발생했다면 국유화를 진행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제주를 일주하는 기차를 볼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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