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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Oct 14. 2020

S#12 도시와 함께한 백년

서귀포초등학교


...여흥餘興으로 학생대운동회學生大運動會, 시인 문예대회詩人文藝大會, 기마경주騎馬競走, 자전차경주회自傳車競走會를 계속繼續하야 동십육일同十까六日까지 진행眞行하얏는데 관광자觀光者약일만인이상略一萬人以上에 달達하야 자못 산해山海를 성成하얏는데... 
매일신보 1931년 10월 24일자 기사 ' 제주서귀보교濟州西歸普校 낙성식거행落成式 擧行'     



1960년대 서귀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박용창



서귀포에서 태어난 장년층 중 열에 아홉은 서귀포 초등학교 졸업생이다. 어지간한 모임의 구성원도 모두 동문이다. 몇 회 졸업생인가만 다져 선후배만 가리면 그만이다. 간혹 모르던 동기를 만나면 조금 새삼스럽다고 할까? 어쩌면 그들에게 동문이란 정서를 고유한 흔하면서 자연스러운 공기와 같다. 간혹 이주민들은 제주에 텃세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같은 시대와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 간에 유대감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 하지 않을까? 게다가 제주는 섬으로 육지와 격리되어 있었고 -요즘이야 저가항공 덕분에 어지간한 택시요금으로 제주를 오가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는 신혼여행이나 돼야 갈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말조차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모두 같은 학교 동문이라니... 텃세없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제주시도 사정은 매한가지지만 아무래도 서귀포에 비해 크기도 하고 인구도 많으니 상대적으로 서귀포 출신의 유대감이 더 크다.


서귀초 1965년 1학년 수료식


2020년 현재 서귀포시 관내에는 45개 공립 초등학교가 있다. 시내라 할 수 있는 서귀포 구도심 내 초등학교는 다섯이다. 학생 수(총 3,296명) 기준으로 동홍초(1,260명), 서귀북초(1,146명), 서귀중앙초(423명), 서귀초(252명), 서귀서초(215명)이다. (2019년 서귀포교육지원청) 이 다섯 학교 중 가장 역사가 깊은 학교가 서귀포 초등학교다. 2020년 12월 17일이면 개교 100주년이다. 비록 현재는 동홍 초등학교 학생 수에 1/5밖에 안되지만 서귀포 지역의 본격적인 근대 교육기관이자 작은 어촌에서 도시로 성장하는 서귀포의 중심이었다.


안타깝지만 서귀포 초등학교가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은 아니다. 제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은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가 설립한 사립의신학교다. 의신학교는 재정 부족으로 한차례 졸업생도 내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서귀포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1917년 4월(혹은 10월 13일) 설립된 서귀공립심상소학교다. 조선시대에 현청 소재지였던 정의현에 의명학교가 먼저 들어섰으나 개량서당에 가깝기 때문에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간혹 서귀 공립심상소학교와 현 서귀포 초등학교인 서귀 공립보통학교를 같은 학교로 오해할 수 있으나 두 학교는 엄연히 다르다. 서귀 공립보통학교 보다 3년 먼저 설립된 서귀 공립심상소학교는 일본인 전용 초등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서귀 공립심상소학교(일본인 전용)/일제강점기로 추정


서귀 공립보통학교(조선인 전용)/ 일제강점기로 추정



1911년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의 교육목적, 수업 연한, 취학 연령을 정했다. 이 교육령에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은 엄격하게 분리해 교육을 시행한다.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심상尋常-보통이란 뜻-소학교로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는 공립보통학교로 구분했다. 처음에는 4년제로 출발했으며 이후 1922년 2차 교육령에 따라 수업연한을 6년제로 바꾼다. 수업연한 6년 보통학교에 2년제 고등과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서귀 공립보통학교 고등과를 재학했고 이후 서귀포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윤세민 교장선생은 일본인이 다닌 학교를 '서귀남소학교' 조선인이 다닌 공립보통학교를 '서귀북소학교' 로 통했다고 기억한다.



일제강점기 서귀보통공립학교 고등과에 재학했던 윤세민(90세) 이후 서귀초등 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았다. 현 윈희룡(중문초) 지사도 그의 제자다.             


일제강점기에 제정한 보통학교 규칙을 보면 보통학교의 교과목은 보통학교 본래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독讀, 서書, 산算에 중점을 두고, 필수과목은 수신, 국어(일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의 4과목으로 하였다. 지방 사정에 따라 이과, 창가, 체조, 도화, 수공, 재봉 및 수예, 농업 초보, 상업 초보를 과할 수도 있고 뺄 수도 있게 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방 행정사)


1929년 발간된 『제주도편람濟州島便覽』과 1938년 『제주도세요람』에 기록된 학급수와 학생수 등 학교 개요는 아래표와 같다.



두 학교의 학생수를 비교하면 최소 6배에서 25배까지 조선인이 재학했던 서귀공립보통학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학생수는 현재 서귀포초등학교의 2배다. 물론 현재는 5개교로 분산되어 교육받는다.


글의 앞머리에서 소개한 1931년 매일신보 기사로 돌아가보자.


1930년 9월24일 조선일보

1930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제주도 서귀포濟州島 西歸浦 공보교 전소公普校 全燒
[손해만오천원損害 萬五千圓]
십구일 오전 두시경 제주도 우면 서귀포濟州島 右面 西歸浦 공립보통학교에서 불이 나서 동교를 전소하고 동 네시경에 진화 했다는데 원인은 동교 양잠실 간조용乾燥用 화로로 부터 실화된 것이오 손해는 일만오천원이라고 한다.
- 1930년 09월 24일

양잠실에서 발생한 화재로 학교가 전소되었음을 기사로 실었다. 이듬해인 1931년 기사에는


1931년 10월8일 조선일보


서귀공보락성西歸公普落成 십오十五일 락성식
【제주】제주서귀공립보통학교濟州西歸公立普通學校에서는 오는 십오十五일에 락성식을 거행하고 이어 신축긔념으로 삼三일간이나 각종 경기를 개최한다는데 십오十五일은 략성식 학생대운동 십육十六일은 긔마경주騎馬競走 시회詩會 십칠十七일은 자전거경주自轉車競走 씨름 각희脚戲등으로 매우 성대히 거행한다는데 원방인사들도 될수 잇스면 만히 참석하야 주기를 바란다한다 락성식을 이러케 거대히 거행하는 것은 신축 깃붐 그것보다 여러 동정제씨에게 감사를 포시하기 위함이라 한다.
- 1931년 10월 08일


매일신보 1931년 10월24일


제주서귀보교 낙성식 거행(濟州西歸普校落成式 擧行)
제주서귀보교(濟州西歸普校) 낙성식 거행(落成式 擧行)
【濟州】제주도 우면 서귀공립보통학교 부흥기성회(濟州島 右面 西歸公立普通學校 復興期成會)에서는 김찬익(金贊益) 강성익씨(康性益氏)를 중심(中心)으로 하야 이만천사백칠원(二萬千四百七圓)의 예산(豫算)으로 건축중(建築中)이던 교사(校舍)은 근경(近頃)준공(竣工)되엿는데 제도(制度)의 굉장(宏壯)은 전남(全南)을 통(通)하야 손색(遜色)이 업다 거십오일(居十五日) 상오 십시(上午 十時)에 성대(盛大)히 낙성식(落成式)을 개최(開催)하얏는데 도사대리인마씨(島司代理仁馬氏)의 식사(式辭)가 유(有)한후(後) 공사보고급내비축사(工事報告祝辭)가 유(有)하얏고 학교장(學校長)의 답사(答辭)와 졸업생(卒業生)의 대표(代表)의 답사(答辭)가 료(了)함을 종(從)하야 내빈(來賓)을 초대(招待)하고 여흥(餘興)으로 학생대운동회(學生大運動會), 시인여흥(餘興)으로 학생대운동회(學生大運動會), 시인문예대회(詩人文藝大會), 기마경주(騎馬競走), 자전차경주회(自傳車競走會)를 계속(繼續)하야 동십육일(同十까六日)까지 진행(眞行)하얏는데 관광자(觀光者)약일만인이상(略一萬人以上)에 달(達)하야 자못 산해(山海)를 성(成)하얏는데 문예대회(詩人文藝大會), 기마경주(騎馬競走), 자전차경주회(自傳車競走會)를 계속(繼續)하야 동십육일(同十까六日)까지 진행(眞行)하얏는데 관광자(觀光者)약일만인이상(略一萬人以上)에 달(達)하야 자못 산해(山海)를 성(成)하얏는데 우승자(優勝者)씨명(氏名)은 다음과 갓다 시인문예회지부(詩人文藝會之部) 일등(一等) 강장원(康長元) 이등(二等) 문신국(文新國) 현성찬(玄聖贊) 삼등(三等) 강공칠(康共七) 김완혁(金完爀) 한사택(韓士澤)오태해(吳泰海) 양영종외가작이십팔인(梁瀛宗外佳作二十六人)기마경주지부(騎馬競走之部)일등(一等) 립야각지조(立野角之助)(기사(騎士)윤병석(尹秉錫))십칠세(十七歲) 이등(二等) 박응삼(朴應三) 삼등(三登) 김중배(金重培)자전차경주지부(自傳車競走之部)일등(一等) 장영수(張永壽) 이등(二等) 라동이(羅童伊) 삼등(三等)
- 매일신보 1931년 10월 24일


화재가 발생한 후 일 년 만에 학교를 재건축하였다. 당시 보통학교가 지역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는 3일간 열렸던 낙성식落成式의 규모로 확인된다. 당시 재력가였던 강성익, 김찬익 등이 학교 재건을 위해 기부를 했고 건립 기념일에는 각종 체육대회와 문예대회를 열었다. 무려 일만명의 관객이 참여한 것으로 보면 축제나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는 현재 위치에 새로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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