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가정식 파스타의 정수를 맛보다.
파스타.
참으로 신묘한 음식이다.
면의 본산지였던 동양권에서 이탈리아를 통해 전파되었고 오늘의 세계적인 음식인 파스타가 탄생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선 확실히 알려진 게 없다. 이탈리아의 모험가 마르코폴로가 동방을 왔다 가며 파스타가 전수되었다는 썰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으며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도 있지 않은 내용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서기 831년부터 11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이 이슬람 아글라브 왕조의 지배를 받았을 때 면요리가 전수되었다는 설인데 지금도 이슬람양식의 건축물이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이게 가장 믿을만한 근거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퍼져나간 파스타는 서양요리의 대표 격으로 요즘엔 인식되고 있지만 빵을 주식으로 한 당시만 해도 비주류인 요리였다.
파스타는 오늘날 면의 종류만도 지역에 따라 세분화하면 수백 개가 넘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각 지방의 중소도시에서조차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파스타를 만드는 식당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비주류였던 과거에는 파스타는 건조면으로 관리의 용이성까지 더해지며 가난한 노동자들이 주린 배를 채울 서민음식으로 발달되어 초창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포크가 아닌 손으로 면을 한 움큼 쥐고 들어 올려 입에 욱여넣는 식으로 파스타를 즐기곤 했다.
과거 대비 다소 높은 값을 지불하며 즐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오늘날의 파스타지만 식당의 분위기나 추구하는 콘셉트에 따라 다양한 가격대에 다양한 얼굴을 뽐내는 음식이 되었다. 오늘은 가정식으로의 얼굴을 가져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의 레스토랑을 찾아 파스타를 즐겨보기로 했다.(물론 가격은 전혀 부담이 없지 않았던건 비밀) 서울 지하철 6호선 약수역에 위치한 브레라(Brerra). 미슐랭 가이드 선정에 빛나는 가정집 레스토랑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흔하디 흔한 브레이크 타임이 없다는 거.. 대개 15시~17시 사이는 쉬며 재정비하는 식당이 많아 점심이나 저녁때가 아닌 덜 번잡스러운 시간대에 조용히 식사하고 싶어 하는 미식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많이 없어진 요즘인데 여기는 브레이크 타임 없이 11:30~23:00까지 풀로 영업을 한다.
약수역 1번 출구를 나와 장충동 체육관으로 향하는 골목길 끝트머리의 낡은 건물 1층에 붉은색 외관의 브레라가 자리 잡고 있다.격식을 갖춰야 할 것만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이기보단 현지 가정식에 방점을 맞춘 가게답게 내부 분위기는 친숙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메뉴판을 펼쳐 드니 자비 없는 이탈리아어와 영어의 메뉴가 여지없이 눈에 띄고 그나마 옆에 작게 사진이 있어 어떤 메뉴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브런치와 에페타이저를 포함하여 파스타와 피자까지 메뉴만 50가지는 되는 듯했다. 먼저 국내에선 어지간한 곳 아니고선 쉽게 맛보기 힘들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뇨끼 중 바질페스토로 만든 al Pesto Ligure di Basilico와 브레라의 베스트셀러이자 펜네보다 더욱 큰 숏타입 파스타면인 파케리를 기반으로 홈메이드 소시지와 토마토소스가 조화를 이룬 Paccheri Alla Ciociara를 주문하고 입가심으로 즐길 카푸치노를 함께 주문하였다.
식전빵은 마요크림소스와 함께 제공되고 카푸치노가 먼저 나왔는데 단순히 요리에 구색 맞추기식으로 있는 커피메뉴겠지 하고 딱히 기대 안 했는데 상당히 맛있었다. 적당한 거품에 진한 커피와 우유가 적절한 비율로 조화되어 당혹스러울 만큼 맛있었다. 커피만 마시고자 이곳을 방문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린컬러가 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돋우는 ‘알 페스토 리구레 바실리코.’
생면의 불규칙적인 형상에 촉촉하게 버무려진 면과 바질페스토. 거기에 파마산 치즈와 바질잎으로 마무리된 파스타였다. 일전에 김해의 오스테리아 보노에서 맛본 뇨끼와는 또 다른 식감이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삶은 다음 겉면을 살짝 익혀 바삭한 맛을 내는 게 뇨끼의 조리법이라 생각했는데 여긴 삶아 쫄깃한 맛만을 강조한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씹히며 입안에서 녹는 파마산 치즈와 향긋한 바질페스토의 조화는 역시 훌륭했고 쫄깃하게 씹히는 뇨끼의 풍미와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뇨끼와 함께 나온 파케리면이 베이스인 ‘파케리 알라 치오치아라.‘ 브레라의 시그니처라 할만한 이 파스타가 개인적으론 더욱 기대되었기에 뇨끼를 먼저 먹고 잠시 물로 입을 헹군 후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맛을 보았다. 펜네보다 큼직한 튜브형태의 숏타입 파스타인 파케리는 깊숙이 소스가 버무려져 면을 씹을 때 넓은 튜브형태의 겉과 속에 골고루 묻어있던 소스들이 삐져나오며 깊고 풍부한 맛을 배가시켜 주었다.
잘게 토마토소스와 버무려진 홈메이드 소시지는 부드러운 질감의 파케리면과 조화로운 식감을 제공하며 입안과 목구멍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혼자서 남김없이 비워냈다.
두 가지 파스타와 커피까지 모두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훌륭해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한국식 파스타는 대개 소스를 묽게 하여 마치 국물이 연상되듯 면이 소스에 칠퍽하게 담긴듯 만드는 곳이 생각보다 많은데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된 파스타를 맛본 분이라면 알 것이다. 거의 건더기처럼 보이는 소스가 꾸덕하게 면에 달라붙어 있고 접시를 흥건히 적시지 않고 면과 함께 붙어 자연스럽게 포크로 들어올려져 입안에 감도는 맛을 함께 즐기는게 진짜 이태리식 파스타라는 것을. 브레라에서 먹은 파스타가 바로 그러했다.
소박한 분위기에 창가를 보고 앉는 긴 테이블석도 마련되어 있어 혼자서 방문하기에도 부담이 없으며 일반적인 가늘고 긴 면이 아닌 파케리라는 독특한 형태의 면을 베이스로 한 파스타를 맛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었다. 브레이크 타임이 없어 언제든지 편하게 방문가능하며 식사 후 장충동 체육관 쪽으로 한양도성길을 따라 산보하며 가득 찬 배를 소화시키기에도 좋아 여러모로 대만족.
다음에 서울 방문 시 꼭 가보고 싶은 식당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