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에서는 저희 남편과 일본인 친구인 사야카짱을, 있는 사실 있는 그대로 "일본인" 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그이상의 불편한 의미는 없습니다.
※ 주된 주관된 의견들은 일본인 친구 사야카짱과 방문한 기록에 더 적어내려갔습니다. 남편과의 방문기에서는 저의 코멘트가 많지 않습니다.
※ 용산구 숙대입구 10번출구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식민지 역사 박물관"은 아직 오픈한지 얼마 안된 박물관이라 같은 한국인으로써,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개관 기념 무료 입장 기간이니, 평일이나 주말, 꼭한번 연인과 가족, 친구분들과 나들이 가보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진심으로 추천드립니다.
일본인 남편의 한국 역사공부1.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이라면 꼭 한번 다녀가야할 곳,
일본인 남편 히로시의 왈
다소 늦어진 일본인 남편의 일제침략 역사 공부. 포스팅을 한자한자 적어내다보니 생각이 괜히 많아져서, 잠시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몇일전, 일본 친구 사야카짱과 두번째로 다녀온 그곳에 방문하면서, 이번에는 포스팅을 꼭 올리자, 라고 마음먹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남편이 했던 말. 지난번 그 언젠가의 주말은 남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가장 뜻깊은 주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주말이었으나, 집에서 나뒹굴며 TV를 보는것보다는 시간내서 꼭 가보기로 한 역사공부 견학을 위해 바깥으로 나서기로 결심한것은 다소 충동적인 스케줄.
최근 화제가 된 대한민국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을 두고, 역사공부가 제대로 안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말은 "왜 이제와서 그때 나라간에 약속한것을 무효화하려는것이냐, 그것은 국제적으로도 문제가된다. 한국 이상하다." 라는 말뿐 그 이상으로는 그 어떤 역사지식을 가진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일본 뉴스를 보고있지만, 일본의 매스컴은 일본 자국민들을 기만하는 가짜뉴스를 짜집기해서 방송하는데 나는 무척 열이 받아있고.
일본 국민들은 그런 거짓뉴스를 보며 한국에대한 안좋은 인식을 심어가겠지. 그게 지금 일본 정권이 원하는 것일겁니다.
이번 역사 박물관을 다녀오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것은, 일제침략 시절 무고한 일반인 여성들을 생매장 하는 영상을 보게되었고, 그 선조들의 표정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4호선 숙대입구에 내려 10번 출구로 나옵니다. 10번출구에서나와 왼편 뒷쪽을 보면 지하철 엘레베이터 우측으로 "갈월동 지하차도"로 가는 길목이 보입니다. 그곳을 통과하고나서 횡단보도를 한번 더 건너 뚜레쥬르지나 쭉- 욱 걸어가면 골목에 식민지 역사 박물관이 보입니다.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남편과 이날 엄청난 워킹을 했었는데요, 사실 종로에서 식민지 박물관까지 걸어왔거든요 (웃음) 서울역에서 금방 걸어오는 길목이라 어렵진 않고,
식민지 역사 박물관을 모두 본 뒤에는 다시 서울역쪽으로 되돌아 걸어가 회현 남대문 시장을 가로질러 명동까지 걸어갔구요 ㅎㅎ 날이 좋고 춥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미세먼지는 강했지만,
공감인것입니다.
인정해줘서. 제대로 잘 알아줘서. 그래서 나는 너무나 고마웠던 것입니다.
피해자는 다른걸 원하는게 아닙니다.
가해자가 잘못을 사죄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피해자일지라도, 진심으로 사과하는것에 또다른 고마움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은 일제침략의 피해국가로써의 사진과 영상, 세계적인 문서기록, 살아있는 증인들및 기타 다양한 정보들로 일제침략시 한국땅에 어떤 처참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낱낱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 국가는 과거의 슬프고 아픈 현실을 다시는 잊지말자, 꼭 되새기며 지금 대한민국땅에서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여기자, 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 그래야만하는 것입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많은 일본인들이 안타까운 일을 당한것에 마음 아파하는 일본 국민들, 히로시마 사건에 꽤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있을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에도 일본이 인간으로써 해선 안될 짓을 했다라는것은 인정하지 않으니, 알려고하지않으니 이것은 참 모순이 아닐수없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사건에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던 한국인 수만명이 포함된것은 알고있는지.
전 세계가 인정하는데에도 딱 한 나라, 자신들의 침략 역사의 패배라 부끄럽고 창피하기애 회피하기 바쁜 일본의 선조들 덕분에, 현재 많은 젊은 일본인들역시 역사를 회피하고, 사실대로 알고있는 사람은 내눈에는 잘 안보인다. 역사가 선택과목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마치 한국인들은 과거 이야기에만 연연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일본인들중, 과연 역사에대해 , 가해자국가에대한 마음가짐을 바르게 갖고 있는 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것일까요.
이미지 출처 : 식민지 역사 박물관 http://historymuseum.or.kr/greetings/nearby/
경복궁을 예쁘다며 사진찍는 일본 관광객들의 모습을보고 이런 생각이들었습니다.
"예전에 당신네 조상들이 저 아름다운곳을 동물원으로 불렀던것. 알고는 있나요? 저곳에 일장기가 꽃혀있었던것은 알고있는지." 사진을 찍음과 동시에 역사공부도 조금이라도 하고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인가.
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더 알고싶지도않을거다. "그런 불편한분위기 싫어" 라고 이야기하며 회피하는게 내가 눈으로 보고있는
일본의 젊은이들 세대이다. 참 부끄럽다. 역사의 기록앞에서 회피보다 더 참담하고 부끄러운것은 없을것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지금 당신들의 눈에 아름다운 저 건물이, 너무나도 참담하고 슬픈 역사를 함께 안고있다라는것을 좀더 알아간다면,
더할나위없이 감사하고 고마울것만 같습니다.
한 나라의 인간으로써, 그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고있는것은 국민으로써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자국의 역사의 잘못이있다면 잘못을 바로 알고 인정해야하고, 더 나아가 그 누군가에게는 사과를 해야하는것이 인간으로써 마땅한 도리인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산구 식민지 역사 박물관은 2018년 여름, 8월 29일 개관식을 시작으로 , 개관한지 얼마 안된 곳이기도하고, 개관 기념으로 무료입장 중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빛나는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록, 전시한 최초의 일제 강점기 전문 역사 박물관입니다.
해외 동포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의 성금, 기증 자료에 힘입어 마련된 소중한 공간 이라고 합니다.
때문인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어서 많은 역사 공부가 되었습니다.
유물보호와 관람질서 유지를 위해 다음 사항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공간이 협소하므로 10명 이상의 단체는 반드시 예약문의를 주십시오.
전시물에 손을 대거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행위는 절대 삼가 주십시오.
플래시, 삼각대 등을 이용한 촬영과 상업적 용도를 위한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전시실 입장 전에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주시거나 진동으로 전환하여 주십시오.
박물관의 모든 공간은 금연구역입니다.
안내견 이외 애완동물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음식물 반입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인화물질, 악취․혐오 물품은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정숙한 관람을 해치는 복장이나 행위를 삼가시길 바랍니다.
일본 역사 박물관은 굉장히 크고 넓은 박물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보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제침략 시대의 소장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공간입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것은 "청일 전쟁 주사위 놀이판" 이라고 불리는 ,육군은 히로시마廣島에서, 해군은 나가사키長崎에서 출발해 먼저 베이징에 도착하면 이기는 놀이판 그 사이에 한국은 엉망 징창이 되어버렸지요. 그들은 군대 게임을 하고 놀아났던것.
한반도와 주변 해역이 그들의 놀이터였던 셈입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구리나 철로된 식기는 "이런구리나 철을 남기는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라며 금속류 공출을 실행하자 라는 표어가 보였던 공출식 사진 과 3.1 독립선언서 초판등,
그동안 접한 적이 없었던 많은 자료들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어서 무척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것은, 일본인인 남편이 잘 읽어내려갈 수 있도록 일본어 (영문번역도) 번역이 제대로 되어있다는점, 영상에도 일본어 자막이 붙어있어 , 무슨뜻인지 몰라 대충 훓터보는 일은 없더라는것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을때, 받아야만 했던 취조의 현장을 재현해둔 곳, 책상 위의 버튼을 누르면 음성으로 "독립운동이 무엇인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본 군인질문에 대해 담담히 대답하는 선조들의 음성을 재연 육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건전한 일을 하게되고 , 돈도 받을 거라는 말만듣고 강제적으로 끌려갔다가 알고보니, 전쟁에 사용되는 일본의 무기를 만들게되었다던 할머님.
그곳은 도야마의 근처였고, 한이 맺힌 한국 여성들이 만든 일본노래를 눈물 맺혀 부르시던 모습에 마음이 져며옵니다.
그 시절, 수십년의 세월들. 누가보상해주나요.
말할수없는 분노와 노여움을.
설명이 필요없는 한장의 사진.
남편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것일까요?
다 돌고 나니까, 저 대신에 본인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웃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알고있던 점과 뭐가 다른지, 무엇을 알게되었는지, 하나하나 확인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한줄한줄 읽어내려가고 있고, 굉장히 심오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 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로써의 우연히 한국에서 인연이되어, 연애를 하고, 그리고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수십년을 살아왔던 두 생명체가 어느 한날 영원의 미래를 약속하는 부부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일본뉴스에서 편파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뉴스들을보며 가끔 남편도 부족한 역사 지식을 앞세워 저에게 싫은 소리도 실수로 내뱉은 적도 있었고, 저는 우리의 사랑과는 무관하게, 대한민국의 한사람으로써 따끔한 충고나 질책을 쏟아낸적도 많았어요.
"안되겠다. 당장 이번주는 당신은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역사를 공부하세요. 내가 안내할게요" 라는 화가 섞인 한마디로 시작되었던 3주간의 일본인 남편의 역사공부.
남편은 확실히 말합니다.
" 이곳을 다녀온뒤로, 몰랐던 많은 부분을 알게되었고 반성해야함을 느꼈어. " 라고 말입니다.
그리곤 그 뒤로, TV로 접하게되는 거짓인지 사실인지 왜곡인지 구분조차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뉴스들을 보고서도, 꽤 이성적으로 넘기고 그다지 신뢰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안타깝게 하늘로 먼저 떠나신 고 김복동 할머니의 뉴스를 어젯밤 보며 , 평소에는 제대로 보지 않는 듯 했지만, 이번엔 소파에 앉아있던 몸을 TV로 앞당겨 김복동 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던 남편.
역사 지식에 인색한 많은 일본인들은 말합니다.
"그놈의 위안부. 위안부 이야기좀 그만하면 안되?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그일을 한거잖아. 이미 지난일이잖아." 라며 자신들의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테두리 안에 그대로 갇혀 , 진실된 역사를 마주하려고 하지않습니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6년 입니다.
당신들의 개인적의 인생에서도, 억울한일을 당하고나서 "이미지난일이잖아, 뭐 그깐거 가지고 " 라는 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오르지않나요? 회사에서든, 연애에서든, 진실이 무참히 무시당하고, 왜곡되어서 상처받고 속상했던 일은 없던가요?.
지금은 한국을 좋아해주며 한국 여행에 발을 들이고, 한국인과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공부를 하는 이들, 당신들의 조상들은 당신들이 좋아하는 그 "한글"을 버리려했고, 한국인들 이름을 모두 일본이름으로 강제적으로 개명시키고, 그 어린 학생들을 군대집단 이끌듯 대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침략하여 존재감을 멸살하려 온갖 파렴치한 짓을 일삼은것이 일본의 수십년 역사중 하나 입니다. 그리고 가슴아픈 한국 역사의 일부입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직면하고, 제대로 돌파하여 "미안했다. 미안하다." 라는 사과, 아니, 마음만이라도 느껴 주실 수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일본사람들에게도 "그거면 됬다. 진심으로 고맙다. "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서, 바로 코앞에있는 끝없는 평화와 우정을 내버리고 "쉬쉬"해 하는건 정말 쓸데없는 감정입니다. 인정하는순간. 우리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지않나요?
그건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시대가 변화했고, 고맙게도 한국의 일제침략 역사를 "일본에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쉬쉬하니,"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려는 이들이 2019년엔 월등히 많아졌다는 사실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서대문 형무소 견학
용산구에서 식민지 역사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서 무려, 워킹 도보로 서대문 독립문역까지 다다랗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과 저는 걷기를 참 좋아하는 부부인 것 같습니다.
서대문에 위치한 독립문은 높이가 약 14.28미터, 너비 11.48미터 크기의 문으로써,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라고 불린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된 기념물입니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는데, 그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1년뒤 완공한셈.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따게되었는데,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벾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독립문은 중앙으로 들어가 천정을 바라봤을때에 보이는 빨간 벽돌들이 인상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들을 이곳에서 우뚝 보내왔는지, 돌의 곳곳이 자연적으로 움푹 파이거나 변형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독립문의 가운데 저멀리로 보이는 많은 아파트들, 그 먼 역사 저편에는 산밖에 없던 곳이 이렇게 2019년을 맞이하며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후손들의 돌봄으로 더욱더 늠늠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과 다다른 서대문 형무소 역사 박물관
서울 구 서대문 형무소
Former Seodaemun Prison, Seoul
ソウル西大門刑務所
지정번호 : 사적 제 324호
옛 서울 서대문 형무소는 1907년에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옛 서울 서대문 형무소의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 형무소, 서울 교도소 등으로 바뀌었다가. 1967년에 서울 구치소가 됨.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됨.
이후, 4/16, 5/16 ,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됨.
1987년에 옛 서울 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동이었다. 이 가운데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해 제 9~13옥사, 나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두었다. 1988년부터 공원을 만들기 시작하여 1992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으로 부르고 있다.
이날은 저역시 서대문 형무소를 마음속으로만 계속 가보고싶었지, 실제로 방문한것은 처음이었기에 마음 단디먹고, 입장하였습니다.
주말 오후여서 그런지, 사람이 좀 많았던 것 같았어요.
일본인 남편을 위해 일본 안내 책자 하나 뽑아 들었습니다.
자랑스럽고, 마음져미고, 아름다운 사진.
꽤 진지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꼼꼼히 보던 남편.
한계단, 한계단을 걸어 다음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계단에서, 건물 구석구석에서, 뭔지 모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습니다.
사형실 재연장.
사실, 서대문 형무소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사형장의 지하를 별도로 재연한 곳으로 보여졌습니다.
3동의 옥사를 관람합니다.
지금 내 눈에 보여지고 있는 저 태양의 빛, 차가운 복도, 그시절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시간은하염없이 흘러가고, 시간만 변했을뿐, 이곳은 그대로인데 . 2019년 제가 이곳에 들어와있는곳이 정말 뜻깊고, 정숙해질 따름입니다.
철문넘어, 철창 넘어 , 대한독립을 간절히 기원하던 애국지사들의 노여움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분하고, 침통했던 마음.
또 하나의 궁금증은 옥사 외벽에 생긴 흰색 자국들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 뭔가 뜨거운 수증기같은게 나왔었나? 라며 별생각을 다했었는데,
이승만 정권때 이 건물을 사용했을 당시, 이 건물을 새 건물이었다고 하고, 때문에 계속해서 감옥으로 사용했지만, 환경이 열악해 화장실을 만든 자국이라고 하더라구요.
사진의 중앙 부분에 들어가면 다음 중앙 옥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옴과 동시에, 입구로 들어가기전 살짝 옆을 보면 , 벽에 뚫여진 많은 통로같은 구멍이 보입니다. 그쪽이 용변본것이 배출된다는 통로였습니다.
2층은 부식이 되어 안전을 위해 올라갈 수 없었고, 전부 1층의 옥사를 관람 합니다. 1평도 안되는 독방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합니다. 그 좁은 공간으로,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육체적인 고문과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설치한 공간,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을 탄압하려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해왔습니다. 특히 애국지사들에게 특수범죄자 라는 타이틀을 씌여 별도로 분리. 전기와 변기도 없고 , 햇볕조차 들어오지 않는 좁은 독방에 투옥시킨후, 고문과 폭행 등 갖은 악형을 일삼았습니다.
히로시상과 번갈아가며 독방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얇게 입고, 살을 도려내는 추위도 있을법한 어둡고 외로운 곳에서 참혹한 하루하루를 지내야했던 애국지사들분들을 생각하면, 제가 감히 어떻게 그 힘듦을 상상조차 할수나 있겠나요.
가장 흥미로웠던것은 "패통" 이었습니다. 각방은 약 40명까지도 수용했었는데, 감방의 철문 옆에 세로로 깊이 파여있는듯한 곳에 나무 막대기가
세워져있었습니다만, 그것은 방 안쪽 벽면에 사각형으로 생긴 작은 나무 버튼같은 것과 연결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간수에게, 감방안의 위급한 상황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나무 버튼을 클릭시 바깥쪽 긴 나무막대기를 밀어내, 딸깍- 하고 소리를내며
막대기가 길게 바깥으로 떨어지는 구조입니다. 제대로 오기나 했을까요? 죽거나 말거나, 무시하진 않았을런지요.
또한 잘 보다보면, 굳게 닫혀있기도한 한 감옥방 안에 마네킹이 보입니다. 벽에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이예요. 이것은 "타벽통보법" 이라고 합니다.
감방 벽을 딱딱 두드려, 미리 정해놓은 암호로, 수감자들 사이에 의사 소통을 전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수감 되셨을때, 그 옆방에 먼저 수감되었던 김정련 선생님이 타벽통보법을 알려주다가, 외곽 순찰 중이던 간수에게 들키게 되던 순간, 김정련 선생님이 "똥통"을 뒤집어 엎고 소란을 피워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있어요.
김정련 [형무소의 도산 선생]
"도산 선생은 내가 들어 있는 6호실과 벽 하나 사이인 7호실에 입감되었다. 우리는 감방 벽을 딱딱 두드리는 소위 타벽통보법을 극비밀로 사용하였는데, 해외에서 검거 투옥된 동지들은 그 암호법을 몰라 옆방 동지가 그것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어느날 도산 선생님에게 암호법을 가르치다가, 외곽에서 순찰 중이던 간수의 눈에 띄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발각되면 두 사람은 계호계로 끌려가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눈알이 빠지도록 매를 맞고, 2~3년의 가형을 받게된다.
순간 똥통을 걷어 차 뒤집어 엎고 소란을 피웠다. 다행히 복도를 지키는 간수에게는 이 사실이 발각되지 않았다."
사형장 입구왼편에 높게 하늘로 뻗은 한그루의 미루나무.
이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만들어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하는 참혹함을 눈물로 흘리며 통곡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 입니다.
한편 이 나무를 지나 사형장 안으로 들어가게되면 왼편에 정말 손바닥 높이의 일부밖에 남지않은 미루나무의 일부를 보실 수 있는데요,
사형장 안에서는 전적으로 사진 촬영이 안된다고해서 같은 공간에 있던 내부의 미루나무도 촬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원래 미루나무는 정말 쭉쭉 뻗어 빠르게 잘 자라는 종류라고 알려져있으나, 바깥쪽에 크게 뻗어 남아있는 미루나무와 같은 시기 심어진 사형장 안쪽의 미루나무는.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깃들어있어, 잘 자라지 못한다는 일화가 전해지고있습니다.
2017년 광복절날 , 바람에 부러진채로 발견 된이후에는, 그루터기만 남아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광복절에요....
나 : "기분이 어떻습니까?"
남편 : "너무 힘들고, 빨리 나가고싶어"
나 : "고통, 알겠어?"
저 곳에 들어가 이틀만 있어도 사지가 마비되었다고 하네요.
일본에 들어가기전, 남편과 함께 꼭 다녀와보고싶었던 곳중 식민지 역사 박물관과 , 서대문 형무소 역사 박물관에 다녀올수 있어서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둘러보면서도, 설명을 하면서도 꽤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댔습니다.
제가 자세히 몰랐던 역사의 부분도 알게되었고, 무엇보다 국적이 다른, 더군다나 일본인 남편과 함께 방문했다라는것은, 남편에게도 큰 의미였다고 하네요.
겸손한 마음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어봅니다.
"여보. 같이 와줘서 고마워"
일본인 친구와의 두번째의 서대문형무소, 식민지 박물관 방문기
2019년 1월 30일,
"나, 그곳에 전부 가보고싶어. 말모이도 보고싶어!"
1월 29일, 오랜만에 한국에 잠시 살고있던 사야카짱이 일본으로 저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한국에서 슬슬 만날때가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수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더랬죠.
첫날은, 자연스럽게 수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여느날과 다름없이 여성들의 수다모임이랄까, 그러던 중, 사야카짱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야카짱 "언니! 나 말모이라는 영화 꼭 보고싶었어. 요즘 윤계상씨에게 관심이 있거든,"
나 : "그래? 아이돌 출신중에서, 연기가 꽤 괜찮은 사람 리스트에 들어가있는 사람이랄까.(웃음)
일제 강점기시절의 영화인데, 괜찮아?
지난번에 남편과 함께 역사 박물관에 함께 다녀오고, 그리고 말모이 영화도 함께 봤지."
사야카짱 "정말? 그렇다면 나도 역사 박물관에 가보고싶어. 한국을 좋아하는데도, 한국의 역사에대해서 잘 알지 못해.
일본에 돌아가기전에 한번 가보고싶어. "
나 : "괜찮겠어? 그래, 그럼 내일정도 시간 어때? "
이렇게 우리는 카페에 앉아, 저의 추천으로 이른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박물관 두곳을 돌고서, 오후에 사야카짱이 보고싶다던 말모이 영화를 예매해서 보는것으로 미무리짓는 시간을 하루 더 갖기로 했어요.
남편과 지난번 방문했을때에는, 각곳의 박물관에서 대부분 2시간정도씩 시간이 소요됬던 것 같았고, 남편과는 오전부터 용산에 있는 식민지 박물관을 먼저 견학했지만,
아무래도 사야카짱과의 가이드는 하룻동안 전부 진행하는 것이었기애, 시간을 바쁘게 사용해야하기도 했지만, (영화시간 기준) 시간에 방해받으며 촉박하게 볼순 없었어요. 때문에 1시간 먼저 오픈하는 서대문 형무소를 먼저 입장하기로 결정합니다.
☆ 서대문형무소 오픈시간 : 오전 9시 30분 3호선 독립문역 5번출구
★ 용산 식민지 박물관 오픈시간 : 오전 10시 30분 4호선 숙대입구역 10번출구부터 대학교방면 도보 10분
이건 여담인데요, 하루의 마무리를 끝낸 사야카짱이, "언니! 역시 언니말대로 시간이 좀더 있었다면, 용산 식민지 박물관을 먼저 갔다가, 서대문 형무소를 가보는 쪽이 뭔가 드라마 같은 이어짐이랄까. 하지만 오늘 코스로 제대로 역사를 공부한 느낌이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일본 친구들에게 , 아니면 아직 박물관을 견학하신 적이 없는 분들께는 식민지 박물관 방문후,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나도 이시절의 역사공부는 정말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중학생때였을까? 1시간동안 역사를 배우는 시간에 아주 조금 알려주고나서는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역사는 선택 과목이야." -사야카짱-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왜곡하고 정면돌파 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나라 일본. 전 세계가 알고 인정하는 부분도, 거짓말을 서슴치않고, 진실과 다르게 "우기기" 식으로 역사의 일부를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놀이를 하고있는 듯 합니다. 오직 일본만이 그러합니다.때문에 나는 늘 마음이 불편했죠.
일본은 선진국이고, 많은 한국인들이 역사문제와는 별개로 깨끗하고 조용한 인식이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힐링" 이라는 여행을 하러 갑니다. 최근에는 9년만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오는 비율이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하죠.
현재 이시간에는 , 겉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보이는 우리네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역사 문제는 별 관심이 없거나 신경스고 있지 않다. 라는 대답을 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적지않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현재 , 역사가 도시 곳곳에 현존하고 보존되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왔습니다. 단지 화장품을 사러, 쇼핑을 목적으로, 혹은, 술 문화를 배우러 방문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음 속 어딘가에 그 무언가의, 무언의 아픔이 존재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잘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9시가 좀 넘어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만난 저희는 밖으로 나왔을무렵, 서대문 형무소의 오픈시간인 30분을 10분남칫 남겨두고, 근처 독립문을 다녀왔습니다. 사야카짱에게 꼭 보여주고싶었거든요.
남편과 함께 왔을때에는, 종로에서부터 걸어온 상태였기때문에,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 했었지만, 사야카짱과는 독립문으로부터 5분정도 반대편으로 걸어가야했어요..
독립문의 견고한 존재감에 사야카짱은 크게 환호했고, "한국은 정말 역사와 현대가 함께 어울러져 존재하는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라며 오늘 하루의 일과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보였어요.
"아마 이곳은 오늘 네가 볼 [말모이] 라는 영화에서도 줄곧 이야기되거나, 영상으로도 나올 서대문 형무소야, 네가 오늘 다녀온 곳들이 "말모이" 영화를 보는데에 많은 도움이 될거야. 이곳은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고, 모형의 건물도 아니야. 실제 운영되어왔고, 존재해왔던 감옥을 체험하러 들어가는것이야."
시대의 온기를 고스란히 품은듯한 서대문 형무소. 저희가 도착했을 무렵, 두 자녀를 데리고온 젊은 부부가 보였습니다. 오픈 전인데도, 입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죠.
지난번 남편과 방문때에는 여기저기 기물을 만지고, 소리지르고 떠들고, 음식을 먹고 하는 정말 봐선 안될 풍경들을 남편에게 보여줘서 제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졌는데요, (부모님들은 아무것도 제지하지 않으시더군요^^;;)
이번에는 오픈 일찍이라 좀더 조용하고 집중해서 사야카짱에게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저역시 기대가 컸습니다.
처음 오는곳이 아닌데도, 왜인지 서늘한 아침 공기에, 이곳은 처음 와보는 것 같은 느낌마져 들어버리는 , 그렇게 많은 선조님들의 혼 들이 머무는 곳 같다라는인식을 가지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발길이 닿았습니다.
1인 3천원정도의 티켓을 끊고, 내부에 들어가고.
사야카짱에게 건물에 대한 설명을 대충 이어갑니다. "저쪽은 유관순님이 생활하셨던 건물인데 아직 들어갈 수 없어. 아마도 공사중이니 머지않아 입장할 수 있지않을까? " "저 뒷편으로는 수감분들이 옥살이를 하셨던 곳이 2동정도 남아있어. 그곳에서 너는 직접적으로 체허할 수 있을거야."
"이쪽은 굿즈를 판매하고 있는 건물" "저 끝자락에는 처형장소가 있었어. 통곡의 미르나무에 대해서 알려줄게." 등등등.... 마음이 너무 앞섰는지,
첫번째 건물에 들어서기도전에 , 제 입은 하늘에 둥둥 떠다닙니다. ^^;;
혹시...당신도 역사에 무지한가요?
어디선가 적막함을 깨고 조근조근 울려퍼지는 일본어들.
저희를 뒤이어 젊은 일본 친구들의 무리가 이곳에 견학을 왔더라구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수도있는데, 신기하리만큼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뭐지.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대부분 이 분들과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는 시간이 많았구요.
한가지 정말 아쉽기도하고 화가 나기까지 한 점은, 장소도 장소이거니와, 박물관 중간에 "정숙히 관람해주세요" 라는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이게 영어로 써있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 낄낄거리며 뭐가 그렇게 사람죽어가던 곳이 재밌고 해맑은지, 웃으며 관람하던 모습,
어떤 한 일본 남자애는 "이거 과장 아니야? 설마 이렇게 했겠어?ㅋㅋㅋㅋㅋㅋㅋㅋ" 이라며 이야기하는데도, 한국인 아줌마 가이드는 아무말이 없습니다.
가이드라는 분, 어쩜 그리 하나도 설명을 제대로 안해주는지, 정말 어디서 나온 분인지 알고싶을 정도였습니다. 눈으로 대충 훓거나, 젊은 친구들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같은 공간에서 일본어로 사야카짱에게 아주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저의 일본어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웃어대던 남자아이옆에 우연히 다다랐을 무렵, 사야카짱에게 나는 설명했습니다.
" 일본인들이 죄없는 한국의 일반인들을 재미삼아 죽이는 것 같다랄까,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찟겨죽이고, 잘려죽이고, 여기까지 왔으면 제대로 역사를 공부하고 가면 좋을텐데 말이야,
왜 제대로 설명해줘야할 사람은 설명하고 있지 않는걸까? , 이 시대의 일제침략은 정말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야. 일본의 젊은이들은 제대로 알아야할 의무가 있어. 세계에서 오로지 일본만이 역사에 무지하고 부정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역사가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정숙해야하는거 아니겠어."
사야카짱입에서까지 " 어째서 저 사람은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거야? 왜 저렇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거야?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거야?" 라며 이해할수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저사람 한국인 맞지?" 라며
그런 말들을 듣고 아는지 모르는지, 가이드는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기 바빠보였습니다. 그리고, 몇번이고 저의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 어떤 청년은,
"우리 다음으로 가면 안되?" 라며, 제대로 보지도 않은 일행들을 부축였고, 서대문 형무소의 3동의 옥사중 1동의 옥사만 대충 훓고, 그들은 나머지 2동의 감옥들은 보지도않고, 다음 , 통곡의 미르나무가 있는 처형장으로 향하는것 같더군요. 정말 황당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설명해주고 더군다나 일본에서 제대로 자국의 역사 공부라는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않는 미래의 청년들이 굳이 이곳에까지 발을 들여 참담했던 역사공부를 정말 제대로 배워가도 모자랄판에,
저도 모르게 . 저의 설명은 그들 옆에 서게되면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도 무식하게 큰소리를 내서 개념없게 제가 목소리를 내진 않았어요.
작게만 이야기해도 다 울려퍼지던 아침 일찍의 오픈 시간 입장이었기애,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톤으로. 확실하게,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것 뿐.)
가이드 하시는분. 제대로 해주시기 바라요. 일본 청년들의 잘못 아닙니다. 개개인의 성격이 잘못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대로 알리지 않고 숨기기 급급해 역사에대해 교육시키지도 않았을 뿐더러 왜곡된 역사 가르치기에 급급했던 그들의 선조들의 잘못이고, 그것은 2019년 일본으로까지 이어지고있고,
이곳 한국까지와서 한기가 서릴정도로 한이 맺힌 이 참혹했던 장소에서 낄낄웃는것도 제지하지않고, 역사에대해서도 왜때문인지 제대로 한마디도 가이드 하지 않던 그 한국의 여성분의 잘못이고, 우리들의 잘못이겠죠.
설마.... 한국 중년이신데도,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할 가이드의 할일을 제대로 임하지않으시고 , 돈만 받으면 된다. 라는 일부 존재하는 어리석은 가이드 분들과 같은 마음이신건 아니셨겠죠?
또하나, 서대문 형무소는 이러이러한 곳이니, 부디 정숙하게 관람을 요한다. 라는 안내문을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했으면 좋겠으며,
입구쪽에만 둘 것이 아니라, 여러곳 곳곳에 두는것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만치 멀리 떨어져있던 사형장까지 말입니다.
한국어만으로는 부족해요. 2019년엔 외국인도 많이 방문하게되었단 말입니다.
또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선조들의 통곡이 스며있는 미르나무 앞에서 점프를 하며 사진을 찍으며, 낄낄대고 어떤 사진이 잘 나왔느니, 뭐가 어떻느니, 분위기와 걸맞지 않는 조금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관광객들도 있었습니다. 올라서면 안되는 장소, 들어가면 안되는 장소할것없이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몇번이고 가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 제스처로 , 제대로 조언을 드릴까 하다가도, 계속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저에게도 지금 생각해보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주의를 해달라는 무언의 시선이었다랄까요.
그래도 그시각. 제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와준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데, 아무리 좋은 소리로 웃으며 이야기한다한들, 내가 지금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물론 그들의 부족한 매너 문화도 꼬집고 싶지만, 입장료만 받을것이아니라, 입장한 관광객들, 관람객들에게 주의를 요할만한 요소들이 눈에띄게 부족했다라는 것은, 우리네가 개선해야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입니다.
들어가선 안되는 곳에 들어가지 마시고, 정숙하게 관람해주시기를 바람과 동시에, 서대문 형무소 내에 더 다양한 설명이나 번역된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솔직히 이부분은, 용산구에 위치한 식민지 역사박물관이 훨씬 월등히 외국인들이 보기쉬운 넉넉한 번역 설명이 존재했기애,
언젠가는 꼭 이런 작은 의견들이 반영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시구문은 일본군이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서 , 일제가 뚫어놓은 비밀 터널통로...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폐쇄 했으나, 1992년 복원되었습니다.)
- 식민지 역사박물관에 붙어있던 일본인 방문객의 메모들 中 일부. -
수많은 일본어와 한국어의 메모.
이곳은 식민지 박물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포스트잇에 마음을 적어 담아 내려가고, 테이블 벽면및 뒷쪽 건물의 벽면에 작성한 메모를 쭉- 붙일 수 있도록 자유롭게 제공되는 공간입니다.
지난번에 남편과 왔을때보다, 일본인들의 새로운 메모들이 보여서 마음이 괜시리 좋아졌어요. 정말 쉬운일인데, 마음의 벽을 넘으면 이렇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고, 서로의 상처를 서로 알아갈 수 있는 길에 한보 한보 금새 발길을 옮길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라는것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때에는, 노년의 여성분과 남성분이 개인적인 시간을 내셔서 자리해주고계신 것 같았어요. 조용히 ... 하나하나 새겨진 과거의 역사를 읽어내려가며 ,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야카짱과 방문했을때에는, 설명에 집중하느라 아무래도 사진을 많이 찍어두지 못했거든요.
식민지 역사 박물관을 모두 돌고 난 뒤 사야카짱은, "언니. 역시 이곳을 먼저 본뒤, 서대문 형무소에 가는 코스가, 일본인들에게는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지금도 대단해."
남편과 몇주전에 방문했을때, 적었었던 포스트잇도 나란히 잘 붙어있고, 사야카짱도 밖을 나서기전, 자신의 마음을 담아 메모지에 여러 생각들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잇에 너무 감정적으로 글을 쓰신분들이 아주 몇분정도 계셨었는데, 진짜 꼴보기 싫었습니다. 좀더 나이들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신다면
자신의 욕설만 딱 써놓은 글을 보면 얼마나 창피할까요, 뭐, 지극히 일부였습니다. 대부분의 한국분들도 진심어린 글들로 희망, 바람 등을 적어내셨어요.
역사에대해 직면하라! 라는 의미로 혼자 욕을 해도 좋지만, 이곳에 굳이 역사를 배우기위해 온 일본 사람들에게까지 욕설을 써두는건 진짜 무개념도 그런 무개념이 따로없습니다. 하나도 반갑지 않았어요. 공감하지도않았어요. 마음같아서는 떼어내서 찢어버릴까 했지만,
1차적으로는 남이 쓴것이고, 그런것들을 버리고 뭐 하는것은 내가 할일이 아니라, 박물관에서 관리할 일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고 욕하고, 역사공부를 하러온 이들에게도 욕하고,
누가 존중해주겠어요. 적당히들 하십시다들.
안해도 난리고, 해도 난리고.
나 "일본에 거주하게되면 히로시마에도 꼭 가보고싶어.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건이 일본인들에게도 꽤 가슴아픈 트라우마잖아"
사야카짱 "언니 정말 가보고싶어?"
나 "응 물론이지, 적어도 한국의 아픈 역사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돌봐준 너나, 우리 남편, 혹은 그 이상으로 생길 그 누군가들이 있는한.
나는 일본의 아픈 역사에도 관심을 보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것이지. 아, 그리고 그곳에는 억지로 끌려가 돌아올 수 없었던 많은 한국인 선조들도 목숨을 잃었으니까."
사야카짱 "에? 정말? 그것은 몰랐다. 한국인의 이야기는 처음들어."
나 "괜찮아. 너는 오늘 일본인으로써 네 인생에 있어서 굉장한 하루였던거야. 자, 어서 말모이 보러가자."
사야카짱 "오늘 언니덕분이 유관순씨에 대해서 잘 알게되었어. "
고등학생때의 많은 청춘이 깃든 "김밥천국"
물론 저에게 추억의 장소는 대학로 동성 고등학교 맞은편, 베스킨 라빈스 뒷편으로있던 김밥천국 이었어요. 서대문 형무소 관람을 마치고,
용산구로 자리를 옮겨 식민지 역사 박물관을 들어가기 전에 , 딱 1시간 정도의 식사시간이 허락되었던 그때, 아무래도 숙명여대 근처다보니 저렴한 밥집이 많았고, 사야카짱은 제대로된 분식을 체험했습니다.
사실 사야카짱은 이런 분식의 음식을 먹었을때 제대로 한국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제가 외국인 입장으로써, 한국의 분식점 문화가 어떤 느낌으로 와닿는지 경험할 수 없어 감이 안잡히는것은 아쉽지만요. 말해주는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해주는것 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모든사람들이 어린시절 분식집 한번씩은 다 섭렵하잖아요? (웃음)
일본인남편, 그리고 일본인 친구와 함께 두번에 걸쳐 다녀왔던 역사 박물관.
서대문 형무소는 제대로 보면 2시간 30분까지 소요될 수 있을 것 같고, 식민지 역사박물관은 1시간 30 분~ 2시간 이내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른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지 박물관 두곳을 모두 돌고, 오후 3시에 명동 CGV에서 관람한 말모이까지 모두 경험한뒤 사야카짱은
눈이 퉁퉁 부은채로 영화관을 나섰습니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저는 그것을 바랐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하루만에 배우기는 정말 세발에 피요, 하늘에 별따기 이거늘,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서 역사공부를 한 사야카짱. 오전부터 오후까지 다녀온 박물관으로 일제 강점기때의 역사공부를 하고 사람들이 직접 재연하는 그시절의 영화 "말모이" 감상까지,
아마도 사야카짱은 감정이 폭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날 하루의 자신이 보고느낀 것들이 모두 합쳐져, 말모이라는 영화에서 감성이 터져나왔는지도요.
もう1度観たい映画に。追加。
다시한번 보고싶은 영화에 추가.
どこから泣いてたのか分からないぐらい。
어디서부터 울었는지 모를정도.
自然に泣いていた。
자연스럽게 울고 있었다.
日本統治時代のお話。
일제강점기의 이야기
ハングルの使用を禁止していた時代に。
한글사용을 금지하던 시대에
自国の言葉を命がけで守った人々の話。
자국의 언어를 목숨걸고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
少しフィクションが入っているみたいだけど。
조금 픽션이 들어간 것 같지만
こういう時代があったのは事実で。
이런 시절이 있었던것은 사실이에요.
日本人の私には。
일본인인 나에게.
国を奪われる辛さ。
나라를 빼앗기는 괴로움.
言葉を奪われる辛さは。
말을 빼앗기는 괴로움은.
正直分からない。
솔직히 모르겠어.
分かるよー!
알아!
なんて簡単に言っちゃだめな気がする。
너무 쉽게 말해버리면 안될 것 같다.
でも知ること、学ぶことは出来る。
하지만 아는 것은, 배울 수 있어.
出来るだけ韓国と日本の歴史の映画なんかは。
가능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영화 같은것은.
観るようにしてる。
보도록 하고있어.
フィクション、ノンフィクション関係なく。
픽션, 논픽션과 관계없이.
韓国は植民地だったにも関わらず。
한국은 식민지였음 에도 불구하고
自国の言葉や背景がそのまま残っている。
자국의 말과 배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珍しい国らしい。
진귀한 나라같다.
必死に守った人がいたから。
필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었으니까.
ハングルや背景が。
한글이나 배경이.
現在にそのまま残ってるんだなと
현재에 그대로 남아있구나. 라고.
-말모이 본 날 사야카짱의 인스타 글.-
지난 주말에 히로시상과도 말모이를 함께 봤습니다. 남편은 뭐.... 눈물 콧물 모두 쏙 빼면서 영화관을 나섰고요. 너무나 감동적이고, 마음이 아프다 라는 말과 함께.
말모이라는 영화에 그런 명언이 나오죠.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더 크다."
말로만 역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련이 있는 자료가 있는 박물관에 일본친구와 함께 가 다양한 정보를 그녀의 머릿속에 알려준 2019년 1월 30일은 저에게도 정말 너무나 소중한 하루였습니다.
저도 글을 쓰다보니, 갑자기 복받쳐 마음이 이상해지고 눈물이 흐르던 부분이 분명 있었습니다. 두번이나 같은 곳을 다녀왔는데도, 또 말모이라는 영화를 두번 봤는데도, 알수없는 쓰라린 마음과 분하다. 라는 마음의 여운은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인 남편, 그리고 일본인 친구 사야카짱. 그리고 그 이외에 오늘 이시간에도 한국의 역사공부를 하고 박물관에 다녀오실 그 어딘가의 많은 일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그리고 고맙다 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나라의 역사에 , 정면돌파 해주어서. 정말로 고맙다. 라고.
긴 포스팅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민간 외교부 장관이라는 농담섞인 별명까지 들어버렸네요.
언제든, 또 저는 그들과 함께 할것입니다.^_^
용산구 식민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http://historymuseum.or.kr/
서대문형무소 역사 박물관 : http://www.sscmc.or.kr/newhistory/index_culture.asp
본 게시물은 N블로그 포스팅과 동기화되어있으며,
얼마전에 남편과 함께 다녀온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의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암장지 다녀온 유튜브 영상 함께 첨부하겠습니다. 녀온 후기는 곧 업데이트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