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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Sep 29. 2021

정신과 의사지만 엄마는 처음입니다

너는 너의 속도로 가라

  아이들은 자란다. 각자의 속도로.

  기준이 되는 발달 표는 있지만 표는 항상 정답이 아니다. 학생 때는 표를 외워야 시험을 볼 수 있어서 말도 안 되는 문구를 붙여서 외웠다. 11(개월)은 두 다리를 편 상태니까 혼자 선다, 세 살은 세발자전거, 네 살은 네모 그리기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루는 머리를 빨리 가누고 눈 맞춤도 빠른 편이었다. 백일이 되기 전에 이미 머리를 잘 가눠서 백일 사진 찍을 때 머리를 받쳐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발달이 빠를 줄 알았다. 한편 나는 뒤집는 것이 겁났다. 뒤집었다가 되집지 못해 숨이 막힐까 걱정을 했다. 그래서 마루에게 '친구들 중에 가장 늦게 뒤집으렴'하고 말해주었다.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또래들은 뒤집기 시작했는데 혼자서 끝까지 뒤집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무 안 가르쳐줘서 그런가 싶어서 다리를 들어 올려서 뒤집는 연습을 시켜주기도 했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서 스윽 뒤집더니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손도 쑥쑥 빼냈다. 또래보다 한 두 달 느리긴 했지만 완성체로 뒤집은 것이다. 그날부터 뒤집고 되집고 뒹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쓴다는 아기 생활 기록 어플에는 공개 일기가 있는데, 내 생각에 말도 안 되게 빨리 발달하는 아기들의 일기가 종종 올라온다. 뒤집기, 되집기, 잡기, 기기, 잡고 서기, 혼자 서기, 걷기, 눈 맞춤, 옹알이, 자음 옹알이, 도리도리, 곤지곤지, 죔죔,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손뼉 치기, 이유식과 유아식 속도도 빠른 친구들이 있다. 남의 일기를 볼 때는 그래도 무덤덤하게 넘어가는데 조카들, 친구 아들딸들, 조리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내 조카는 돌잔치에 뛰어다니는 아기였다. 그래서 나는 돌이면 다들 뛰는 줄 알았다. 조리원 동기 중에서도 9개월에 혼자 걷는 여자아기가 있었다. 친구 딸은 20개월도 되지 않아 말이 트여서 종알종알 말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혹시 우리 아이가 많이 늦은 건 아닐까, 발달지연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자꾸 비교하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전공의 시절 내내 배웠음에도 여전히 내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와 백화점 하늘정원에 갔다. 평일 낮이라 한가로이 아기와 온 엄마들이 많았다. 한 아기가 뛰어다니면서 우리 근처를 배회했다. 아기 엄마와 인사를 나누었고 자연스레 몇 개월인지, 발달은 어떤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18개월이 된 여자아기였다. 마루는 11개월인데 아직 혼자 못 선다고 걱정을 했더니 아기 엄마가 자기 딸은 14개월까지 전혀 걸을 생각 없이 기어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걷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늦게 걸으니 꽈당 넘어지는 일이 없어서 오히려 안전했다고. 자기들도 많이 걱정했는데 때 되면 다 하는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줬다. 세상엔 빠른 친구도 있고 느린 친구도 있는데, 내 눈에 느린 친구는 보이지 않고 빠른 친구들만 보여 그 친구들보다 느린 마루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았다.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 때문에 자기 나름의 속도로 발전하는 마루에게 괜한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해졌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어 다니고 잡고 서지 않았던가. 너는 너의 속도로 가라. 엄마는 너의 속도를 믿고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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