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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Oct 08. 2021

정신과 의사지만 엄마는 처음입니다

엄마 맘마의 아련한 기억

  처음부터 모유수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오면 주고 안 나오면 말지 뭐,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출산 3일째 말로만 듣던 젖몸살 증상이 나타나면서 모유수유는 현실로 다가왔다. 젖몸살의 열감, 꽉 찬 느낌, 불쾌하고 무거운 감각. 조리원 모유수유 실장님의 정성 담긴 마사지 끝에 말갛고 노란 초유가 나왔다. 아직 아기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젖병에 소중하게 담아 아기에게 먹여주시겠다고 하셨다. 뭉친 젖가슴을 풀고 세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사지실을 나온 것이 행복한 (?) 모유수유 지옥의 시작이었다. 


  마루는 신생아 황달로 열흘 가까이 모유를 먹지 못했다. 마시는 이가 없어도 모유는 때가 되면 잊지 않고 가슴에 가득 찼다. 가만히 두면 금방 화끈거렸다. 유선염이 겁나서 마루가 마시던 마시지 않던 나를 위해서 유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유 분비는 매우 기계적이어서 아무리 많이 짜내도 밤낮없이 3시간이면 어김없이 가슴에 가득 찼다. 자다 깨서 유축하고 아이스팩을 껴안고 다시 잠들었다. 마루가 체중이 자꾸 빠져 속상해서 펑펑 울었던 그 밤에도 어김없이 새벽 1시에 유축을 해야만 했다. 

  기나긴 열흘이 지나고 마루가 점차 회복했기에 그제야 모유수유를 시작했다. 며칠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서로의 몸에 적응했다. 조리원을 퇴소하면서 진짜 모유수유의 시간이 다가왔다.


  조리원에서 몰랐는데 집에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밤은 참 길다는 것이다. 모유수유를 하는 아기는 분유 수유 아기보다 금방 배가 꺼진다고 한다. 짧으면 1시간 반, 길면 2시간이면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자다가 번쩍 눈을 뜨고 입을 쩝쩝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임신 전에는 잠귀가 어두워 알람을 못 듣는 날이 셀 수 없이 많던 내가 그 쩝쩝대는 소리에 깨는 것을 보니 모성은 인간의 감각을 완전히 바꿔버릴 정도로 무서운 모양이다. 비몽사몽 간에 20분 정도 젖을 물리고 다 먹고 나면 안아서 토닥이며 트림을 시키고 재워서 다시 눕힌다. 여기까지가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고 다시 잠에 드는데, 1시간 정도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쩝쩝댄다. 마루 입장에서는 먹기 시작한 시점부터 두 시간이 지난 셈이니 이해할 만하다. 그렇게 밤에 3번에서 많을 때는 4번을 수유한다. 그러니 밤잠이 온전할 리 만무하다. 말 그대로 좀비가 따로 없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낮잠을 안 잘 수 없는 것이다. 그마저도 자다가 가슴이 꽉 차면 다시 일어나 수유나 유축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감사하게도 그런 날들이 영영 이어지지는 않았다. 50일, 100일 지나며 저녁 수유 횟수가 줄고, 마루도 먹는 데 속도가 붙어 전체 소요 시간도 30분 정도로 줄었다. 


  모유수유는 장점이 많다. 일단 안전하고 (이물질이나 분유 온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동시 간편하며 (나만 움직이면 된다) 저렴하다 (분유값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불편한 것도 있다. 먹는 것을 가려야 하고 (의학적 진실은 모르지만 매운 것이나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괜히 피하게 된다) 모유수유라는 이유로 먹는 것에 매우 관대해지며 (살이 빠지지 않는다) 항상 아기에게 매인 삶을 살게 된다 (어딜 가나 3시간 이내에 돌아와야 하는 신데렐라 처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젖을 찾아서 만족스럽게 먹는 아기를 보는 것은 매우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엄마 젖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모유수유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행복한 지옥에 머물기로 했다. 처음에는 될 대로 되라던 내 마음은 '복직할 때까지 무조건 모유수유를 해야지!'라는 결심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행복한 지옥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모유는 점점 양이 줄었고, 어느 날부터 마루는 모유를 다 먹고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가슴은 텅 비었는데 줄 게 없어서 비상 분유를 타서 먹였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벌써 이별할 시간이야? 처음에는 부인했다. 한두 번 그런 거지, 다시 잘 나올 거야. 물도 다시 많이 마셔봤지만, 줄어든 모유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하루 한 두 번은 모유만으로 양껏 먹었지만, 나머지는 짜증을 내서 분유나 유축 모유로 보충해야 했다. 어느 날, 이제 정말 보내줘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의식을 하지는 않았다. 하루 4번 주던 것을 3번, 2번, 그렇게 줄여가다가 어느 날부터는 그냥 주지 않았다. 대신 말은 계속해줬다.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야.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 고마워. 젖병으로도 잘 먹어주렴. 다행히 마루는 젖병을 가리지 않았다. 어르신처럼 따뜻한 것을 좋아해서 분유 온도만 잘 맞춰주면 가끔 농도를 실수해도 끝까지 먹어주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는 헤어졌다. 마지막까지 헤어지지 못하고 이별을 아쉬워한 건 마루가 아니라 나였다.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젖을 찾아 헤매던 입술과 정확하게 젖을 물었을 때의 행복한 표정. 눈을 지그시 감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먹는 것에 몰입한 마루를 볼 때 너무 행복했다. 아련하고 그리운, 언제 떠올려도 미소 짓게 만드는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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