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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Dec 29. 2021

정신과 의사지만 엄마는 처음입니다

사진이 모두 사라진 날

  평소 스마트기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출산하면 새 핸드폰으로 바꿀래'였다. 새 핸드폰으로 바꾸고 싶은 이유는 카메라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셀카도 찍지 않고 SNS도 하지 않아 좋은 카메라 기능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아이가 태어나면 사진을 많이 찍고 싶을 것 같았다.


  게을러서 새 핸드폰으로 바꾸지 못했지만 출산 후 사진은 정말 많이 찍었다. 고양이를 찍을 때도 비슷하지만, 아기의 경우 거기서 거기인 사진인 수백 장씩 있다. 남이 보기엔 뭐가 다른가 싶어도 부모 눈에는 눈웃음의 각도, 시선의 미묘한 차이가 크게 느껴져 지우지 못한다. 그리고 아기는 매일매일 자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지난주와 이번 주는 더 다르다.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온종일 아기랑 있으니 찍을 일이 더 많았다. 찍고 공유하고 싶은 것들은 남편에게도 보내준다. SNS를 시작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게을러서 시도하지 못했지만.) 사진은 육아의 한 부분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느 날, 스마트폰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앱을 켜도 반응이 느려서 재부팅할 생각으로 전원을 껐는데 그 길로 스마트폰이 사망했다. 전원을 켜도 계속 에러 메시지만 뜬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컴퓨터로 검색해보니 별로 희망적이지 못한 글만 읽게 된다. 이 에러는 침수된 경우고, 스마트폰 자체는 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데이터는 복구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체 어디서 침수가 된 걸까. 궁금해하는데 남편이 답을 알려준다. 

  '마루가 당신 핸드폰 맨날 먹고 있잖아. 침 흘리면서.'

  아 그거구나.. 내 스마트폰은 액정이 일부 파손되어 있었는데, 교체하기 귀찮아서 내버려 뒀고 (항상 이 귀차니즘이 문제다), 마루는 스마트폰을 들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항상 그렇듯 장난감은 마루의 입을 거친다. 그리고 이가 나느라 분주한 마루의 입에는 침이 가득하다. 


  침수의 원인은 알았다 하더라도 정말 데이터를 복구할 수 없다고? 일단 현실을 부정해본다. 그럴 리 없어. 다음 날 데이터 복구 업체 몇 군데에 전화를 돌린다. 상황을 이야기하니 인터넷 검색 결과와 비슷한 설명을 돌려준다. 맡겨는 볼 수 있지만, 데이터 복구는 안 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노가 치민다. 나의 게으름과 귀차니즘으로 소중한 기억들을 영영 잃어버렸구나. 마루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의 안일한 행동들을 가혹하게 비판한다. 마루를 탓할 수는 없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좀 더 비싼 업체를 찾아가면 가능할까? 타협해보려 한다. 하지만 타협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다음은 우울이 온다. 난 왜 이러지. 사실 스마트폰 사진이 모두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1년 전에도 클라우드 백업을 제대로 하지 않아 고양이 사진을 몽땅 잃어버렸다. 소중한 기억도 함께 지워졌다. 그러고도 나의 게으름과 귀차니즘이 개선되지 않아 결국 이 사태까지 온 것이다. 너무 속상하고 우울했다.


  '이제 어쩔 수 없지 않냐. 새 거 사.'

  이틀 정도 예전에 쓰던 스마트폰 (소리도 안 들리고 반응은 더 느린)을 쓰며 현실을 부정하던 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데이터를 찾아 헤맨다 한들 데이터가 돌아올 리 없고, 시간을 돌릴 수도 없으니 결국 지금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날 새 스마트폰을 구입함으로써 현실을 수용했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그리고 수용.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이야기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종류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치게 되는 과정이다. 상실 대상에 따라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고 1단계에서 아주 오래 머물 수도 있다. 스마트폰 사진을 모두 상실했을 때, 나에게도 이 5단계가 찾아왔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계속 살아가려면 적응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추억을 기억하며 다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미리 백업하고 고장 난 곳이 있으면 미리 고치는 습관을 들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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