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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n 26. 2022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영화에서 '수학'을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학자의 삶을 다룬 '뷰티풀 마인드', '이미테이션 게임', '무한대를 본 남자' 같은 영화도 있지만 영화에서 '수학'이 주제이거나, 중심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학은 99%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어서, 과학이면서 신비로운 영역이라 소재로 쓰이기에 좋다. 다만, 수학 자체를 말하는 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워 서사를 풀어가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수학은 소통을 위한 도구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배경이 된다. 따라서 수학이 중요하거나 의미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도 수학과 관련해 파이 값으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나 오일러 공식을 학성이 설명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아버지와 아들, 입시경쟁과 차별이다. 두 이야기는 두 공간-교실과 창고-을 오가며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사고(자립형 사립 고등학교)에서 수학 시간은 다른 과목보다 중요하다. 수학 점수의 결과에 따라 변별력이 드러나기 때문에, 수학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점수와 등급이 달라진다. 학교 교실에서 배우는 수학은 엄밀히 말해 '수학'이 아니고, 계산법이다. 지우가 선생이 낸 수학문제의 오류를 잡아내자, 선생은 '문제가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수학은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엄밀한 학문이며, 올바른 문제를 제시하지 못하면 절대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없는 학문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엄밀한 학문을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음을 자백하고 있다.

반면 학교 경비원 학성에게 배우는 수학은 순수한 학문이자 가장 아름다운 과학이다. 교실에서 수학 문제를 풀며 답을 찾는 데만 골몰하던 지우는 수학자 학성을 만나면서 답을 맞추는 것보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해 배운다. 또한 '올바른 질문에서 올바른 답이 나온다'는 교훈도 배운다.


영화는 형식으로는 가난한 '사회적 배려자' 지우가 학교에서 차별당하고,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다 우연히 학교 경비원 학성을 만나고, 학성이 수학자라는 우연과 함께 수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학성과 지우의 관계는 수학을 가르쳐주고 배우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지우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모습을 학성에게서 발견하고, 학성은 남쪽으로 내려올 때 데려온 아들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다 죽은 괴로운 기억과 함께 이제는 죽은 아들을 대신하는 존재로 지우를 생각한다.

즉, 가족의 '부재'는 두 사람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두 사람은 수학을 매개로 만나지만, 점차 인간적으로 가까워진다. 학성은 남한에 아는 사람이 없고, 온전한 가정도 없는 홀아비로 살아가고, 지우는 일하는 홀어머니와 떨어져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고아나 다름 없는 소년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음주운전 차에 사망한 이후, 아버지의 빈 자리로 삶의 절반이 사라진 지우는 수학을 가르쳐 주는 학성에게서 아버지의 자리를 느낀다.

그런데 왜 아버지일까. 이 영화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수학자=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이 반영된 걸 알 수 있다. 지우의 아버지를 일찍 배제한 것도 수학자를 남성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학자인 학성의 자리에 남성이 아닌 여성을 놓아보면 어떨까.

지우는 아버지와 살고 있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탈북한 수학자는 여성으로, 아들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지우는 수학자 여성에게 수학을 배우며 어머니의 빈 자리를 느낀다. 

이런 설정도 충분히 가능한데, 왜 수학자는 남성일까.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시나리오 작가가 썼는데, 남성이다. 그렇다면 수학쟈=남성의 구도는 남성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고정관념이라고 봐도 좋다.


입시교육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다. 자사고의 학생들은 전국 상위 1%에 속할 만큼 똑똑한 학생들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치열하고, 이른바 '사배자(사회적 배려대상자)'는 바닥에 깔고 간다고 말할 정도로 차별 대상이다.

이들에게 수학을 비롯한 공부는 배움이 아니라 점수를 얻는 도구일 뿐이다. 높은 점수를 얻어 부모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걸 목표로 하고, '원하는 대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결국 이 과정에서 지우는 의심을 받고, 자기의 결백을 해명하지 않은 채 학교를 떠나려 하지만, 학성이 마음을 바꿔 사실을 공개하면서 반전을 일으킨다.

학교에서는 수학 선생이 과외선생(수학 선생의 친구 )과 짜고 시험문제를 유출하거나, 담임 선생이 과외 선생을 소개하는 등 불법을 저지른다. 학교 교육이 오로지 입시 교육으로 변질되면서 온전한 인간 교육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자본가의 요구에 따라 노동자를 배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과거 19세기에 학교는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를 만들려고 글자를 배우도록 했고, 기계의 조작법이 복잡해지면서 가르치는 교육의 수준도 높아졌다.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의 대부분도 자본가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공학, 엔지니어링 등의 내용과 수준이 결정되었다. 순수 학문인 수학이나 인문학을 제외하고, 아주 낮은 단계(문자를 이해하는 수준)부터 첨단 과학 기술을 배우는 것도 대개는 당대 자본가의 요구가 개입하고 있는 건 상식이다.

지금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해서,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처럼 작동할 정도다. 대학의 운영도 자본의 논리가 개입하고, 심지어 자본이 대학을 매입해 소유한다. 대학은 수익을 내는 기업이 아니어서, 오히려 정부와 기업이 이익을 바라지 않고 투자해야 하지만, 지금은 대학을 하나의 사업체로 여겨 수익을 내려한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으나 자정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


영화에서 리학성은 학교 경비원으로 탈북민인데, 우연히 그가 북한에서 수학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가 연구하던 과제가 '리만 가설'이며, '리만 가설'을 증명했다고 나온다. '리만 가설'을 다룬 책으로 존 더비셔가 쓴 '리만 가설'(승산)이 번역 출판되어 있다.

이 책에서 '리만 가설'은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모든 근들은 실수부가 1/2이다]로 정의하거나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모든 근들은 복소평면의 임계선 위에 놓여 있다]로 정의한다. '리만 가설'은 수학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일곱 가지-4색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로 알려졌다.

영화에서 리학성이 '가장 아름다운 수학식'이라고 말하며 칠판에 쓴  

공식은 다른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 공식과 매우 비슷한 공식을 가우스도 발견한다. 오일러나 가우스는 당시 학생들이 모르는 '복소수'를 자유롭게 활용했고, 복소수를 지수로 썼으며, 복소평면을 개념화하고 있었다. 

리만 가설에서 복소수, 복소평면, 허수의 활용은 필연인데, 19세기 말에 '소수 정리'가 증명되면서 '리만 가설'의 일부는 증명되었고, 1914년에 '리만 가설'이 제한적 범위에서 증명되었지만, 무한의 경우에서는 여전히 증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리만 가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현대 과학에서 양자역학과 만나기 때문이다. 수학과 이론물리학이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21세기 들어서서 '몽고메리-오들리즈코 법칙'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내용으로는 정확하게 '리만 가설'을 말하고 있었다. '몽고메리-오들리즈코 법칙' 내용은 다음과 같다.

[리만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들 사이의 간격 분포는 (적절하게 규격화시켰을 때) GUE 연산자의 고유값 분포와 통계적으로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

영화에서 북한 수학자 리학성이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노벨상 100개를 받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만큼 현대 수학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순수 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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