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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y 07. 2023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과학자가 소설을 쓰면 무엇이 다를까.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이기도 한 테드 창의 단편 소설 '내 인생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단편소설집에는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소설보다 훨씬 멋진 이미지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시각화했고, 이 영화로 소설이 더 돋보이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테드 창의 소설은 'SF소설'이라는 장르로 구분하는데, 이런 장르 소설 분야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것과, 작품성의 수준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집을 읽고 나는 좀 삐딱한 기분이 들었는데, 출판사가 과장해서 홍보하는 건 상업적 이유로 그럴 수 있다 해도, 이 작품집이 대단한 걸작인 것처럼 말하거나, 평가하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

작품 전체의 수준도 그렇게 높지 않지만,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과학자가 쓴 소설에서 고작 '신'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여러 편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서양 문학의 배경이라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과학자가 쓰는 소설이라면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어긋나서 발생하는 실망감이다.

그러면,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대가가 쓴 소설에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이작 아시모프'도 수준이 낮은 작가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다르다. 테드 창을 아이작 아시모프와 비교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되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SF소설이 뛰어넘지 못하는 절대 영역에 속하는 걸작이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빛이 있으라'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건 '신'이 아니라 인류가 만든 과학의 결정체다. 그걸 인공지능이라 해도 좋고, 육체 없는 의식이라 해도 좋고, 거대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인류 의식의 집합체, 총합이라 해도 좋지만, 어떻든 인간의 과학 기술이 만든 결정체다. 즉, 인간이 진화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든 관념으로써의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게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과학기술의 마지막 결정체가 우주를 창조한다는 발상은, 기존의 '신'에 관한 상식을 뒤엎고, 인류의 이성과 지성이 비과학적 관념을 깨뜨린다는 비유여서 '신'의 목소리를 빌리되,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목소리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작가가 소설을 쓰는 건, 기호학과 중세를 연구한 학자가 소설을 쓰는 것과 같다. 즉, '테드 창'의 소설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독자에게는 이 모든 학문 분야가 낯설다. 작가는 자기가 연구한 분야의 내용을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으며, 그것을 소재로 다룬다. 독자는 작가가 다루는 영역이 낯설지만 매력적이어서, 독해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소설을 읽어나간다.

일부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 실제로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어떤 사람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읽다 포기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걸 보고 들었다. 그때 내가 든 생각은,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멍청하고 어리석을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 냉큼 '무라키미 하루키'에게로 달려간다.

또스또예프스키, 카프카, 움베르토 에코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테드 창의 작품도 읽을 수 없다. 반면, 테드 창의 작품을 읽는 사람이라도 이들 작가의 작품을 읽지 못할 수 있다. 활자는 읽을 수 있겠지만, 소설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테드 창은 자기가 배운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성한다. 따라서 작가는 이해하지만 독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소설에서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지만, 과학 분야의 지식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반면 중세와 기호학은 어떤가. 유대교의 비의,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상징과 기호들, 악마를 부르는 의식과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과 장미기사단, 수도원의 도서관에 감춰진 비밀... 이런 것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끌어올린다. 즉, SF소설이 독자가 지적 쾌감과 호기심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독자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중세와 기호학을 소재로 한 소설은 지적 만족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내용이다.


SF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독자는 과학지식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역사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 역사공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자의 역할이 여기까지라면, SF작가는 과학 분야의 전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적어도 테드 창의 소설(집)에서 '신'과 관련한 부분이 나온다는 것, 그것도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신'을 뛰어 넘는 과학의 존재론적 사유가 아닌, 기존의 관념적 신의 존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정도의 SF소설은 진지한 SF소설 독자의 수준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본다.

SF소설을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과학과 관련한 전문 지식을 나열하는 수준이라면 작품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SF소설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훨씬 깊은 사유와 통찰의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미학이 있어야 한다.

테드 창의 소설들을 낮게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열광할 만큼의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최소한 아이작 아시모프는 뛰어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런 SF소설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건(나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SF소설의 세계가 그만큼 작가풀이 작고, 작품의 세계가 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장르 소설을 예로 들자면, '호러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는 공포소설, 호러, 스릴러 작품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스티븐 킹은 그의 단편집 '사계'의 작품처럼 '쇼생크 탈출'이나 '우등생', '스탠 바이 미' 같은 소설은 장르와 관계없이 훌륭한 소설이다.

SF소설은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는 만큼, 과학은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 과학 지식, 과학 기술이 주제가 되는 건 곤란하다. 그래서 인간을 다루는 보편적 서사와 갈등,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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