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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Dec 14. 2023

기억의 촉감

기억의 촉감


죽음을 앞둔 노인이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결혼했고, 자식을 두었으며, 평생 큰 불행 없이 무난한 삶을 살았다. 아내는 무던하고, 자식들도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잘 산다. 중산층으로, 평범하면서 안온한 가족을 꾸리며 평생 살았던 노인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잊었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독자는 노인의 독백을 따라 과거의 시간으로 따라간다.

노인의 삶은 회한과 후회로 가득하고, 자기 연민의 시각이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 죄책감과 죄의식을 마음 깊이 감춘 채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노인의 과거는 철저하게 자기 중심과 이기적 태도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노인과 동거했던 여인 두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노인의 시각과 입장만 드러난다. 따라서 독자는 노인의 주관적 감정선을 따라가게 되는데, 노인의 심정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회환과 후회, 죄책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작품을 노인의 시선에서 멀어져, 객관의 시선으로 보면, 노인은 극도로 이기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노인(남자)이 청년이었을 때, 대학을 졸업할 무렵, 어떤 여인과 동거했다. 동거는 몇 년 이어졌는데, 집안에는 여인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애당초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남자는 혼인하지 않고 부부처럼 살아간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겠지만,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남자는 대학을 졸업했고, 이제 막 세상에 뛰어들어 자기 삶을 뿌리내리기 시작했지만, 동거하던 여성은 아마도 많이 배우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의 집안도 대단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남자는 결혼하기에 여자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남자의 무의식에 오만함과 차별 의식이 자리 잡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남성 일반처럼,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 관점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가 고향으로 며칠 떠나고, 남자가 짐을 챙기러 동거하던 집을 찾았을 때, 여전히 여자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있지만, 그건 여자를 깊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여자를 착취하며 누렸던 시간을 잃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라는 건 깨닫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와 동거하면서 마치 가정부를 부리는 듯한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여자는 헌신적으로 '아내'처럼 행동했겠지만, 남자에게는 여자가 '아내'가 아니라, 집안을 보살피고, 밥과 빨래를 해주고, 심지어 성 서비스까지 해주는 조건 없는 하녀를 둔 것으로 인식했을 걸로 보인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을 걸로 보인다. 다만 그 사랑의 무게와 깊이가 남자의 이기심을 극복할 정도로 진지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남자가 청년일 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사람은 20대에서 불과 20%도 안 되는 특권층에 속했다. 이 말은, 남자의 집안이 남자를 대학에 보낼 정도로 풍족한 집이었으며, 그것도 서울로 유학을 보낼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의미다. 남자가 동거하던 여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나오지 않지만, 동등한 처지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남자는 동거하던 여자를 붙잡지 못했다고 후회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먼저 끝낸 사람은 의외로 여자였다. 남자가 여자와의 관계를 숨기고, 갈등하고,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여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남자는 비겁했고, 끝까지 망설였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여자가 보인 단호한 태도는 여자 자신보다 남자를 위한 태도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남자를 배려하고, 용서한 건 여자였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여자의 시각으로 남자를 기억하는 내용이 나온다면 어떨까. 여자는 남자보다 독립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남자의 삶이 더 없이 무난하고 평범해서 그의 유일한 추억이자 회한이 대학 졸업 무렵 만나 동거한 여자와의 추억이 전부였다면, 남자와 헤어진 다음부터 일어난 여자의 삶은 최소한 남자보다 훨씬 드라마틱 할 건 분명하다. 

다른 면에서 보면, 노인(남자)의 가족은 노인의 삶에서 대상화, 소외된다. 남자가 여자와 헤어진 다음,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건 그의 회상으로 드러난다. 결혼을 했지만 그건 아마도 중매 결혼이었을 확률이 높고,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는 직장인으로 평생 살았을 거고, 자식을 돌보고, 키우는 건 남자의 아내가 맡았을 거다. 아들과 딸은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아버지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걸로 보인다.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 의식이 흐릿한 탓도 있지만, 남자가 말하듯, 동거하던 여자와의 결별 이후의 삶은 마치 껍데기만 살아온 듯한 느낌이다. 사람의 자기정체성, 존재감은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 확인받는데, 남자는 가족을 통해 그런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걸 가족의 문제나 가족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는 건, 남자의 삶이 가족과 일체감을 이룬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평균적으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로 살았지만, 그가 살았던 가부장 사회,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소외되었고, 남자는 자신이 주인공처럼 살았던 사회에서 자기가 소외되었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살았다. 남자는 아내도, 자식도, 자기 자신도 진심으로, 온몸으로 사랑하며 살지 못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비슷하다. 뫼르소의 삶은 건조하다. 감정이 빠져나간 삭막한 이성만이 그의 내면을 채우고, 사람과 세상은 관계가 아니라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남자가 피, 눈물, 땀, 슬픔, 기쁨, 행복, 절망과 같은 오욕칠정의 감정이 거세되고, 감정이 '대상'으로 사물화 한 원인은 여자와 헤어지면서 자기의 '진짜' 감정을 스스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 꿈, 희망을 스스로 살해했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동거했던 여성은 남자의 '꿈', '희망', '행복'과 같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현현이다. 

남자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고,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가 두려웠기에, 현재를 포기하고 안정된 현실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진정으로 바라던 꿈, 희망, 행복은 거세되고, 그의 내면은 삭막한 사막처럼 죽어간다. 남자는 이제 '진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결별했던 여자의 진짜 모습을 알아챈다. 그건 바로 자신의 꿈, 희망, 행복이었고, 그건 다시는 볼 수 없는 저 먼 과거의 한 줄기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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