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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n 27. 2024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영웅서사, 오디세이아의 아포칼립스 버전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영웅서사, 오디세이아의 아포칼립스 버전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은 '역사의 현현'이다. 인류는 작게는 부족 단위부터 크게는 국가 단위까지 집단이 겪었던 고난과 투쟁을 기억하기 위해 영웅 서사를 만들었다. '영웅'은 집단 기억에서 탄생한 아이돌이며, 영웅 서사에는 집단의 흥망성쇠, 희노애락이 응축되어 있다.

조셉 캠벨은 '세계의 영웅 신화'에서 영웅의 모험을 기승전결로 구분했다. 영웅은 고향(또는 부모)을 떠나 반드시 낯선 세계로 모험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퓨리오사는 자기의 고향인 '풍요의 땅'에서 자기의 의지와 상관 없이 바깥 세상으로 이끌려 나온다. 

이때 퓨리오사가 '여성'이어서 남성 중심의 영웅 서사와 달리 '여성 영웅' 서사의 관점 즉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해석할 여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이 작품에서 '페미니즘'은 주제로 다루기에는 보편적이지 않다. 여성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임모탄 조'가 데리고 있는 여러 명의 가임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일부다처제'의 흔적과 여성들이 모유를 생산하도록 만드는 '성 착취'의 현장, 여성을 수단으로, 도구로 활용하는 남성가부장제의 장면을 비판할 수 있으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퓨리오사가 살던 '풍요의 땅'이 '어머니의 땅'이라는 비유, 퓨리오사를 지키던 엄마가 디멘투스 일당에게 잡혀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상징이 곧 '예수'의 고난을 드러내고 있는 상징이라는 건 쉽게 읽히며, 이는 '예수'의 고난을 여성의 버전으로 치환한 것으로 보이고, '풍요의 땅' 즉 인류의 이상으로 상징하는 장소가 여성들이 살고 있는 땅이며, 여성은 폭력과 투쟁이 아닌, 화합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페미니즘으로 해석할 여지는 열려 있다.


영화 개봉은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이후 '분노의 도로)'가 먼저였고,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이후 '퓨리오사)'가 나중에 나왔는데, 퓨리오사의 서사는 두 영화를 모두 봤을 때 마침내 완벽하다. '퓨리오사'를 본 다음, 다시 곧바로 '분노의 도로'를 보면,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한 모든 행동의 이유가 뚜렷할 뿐 아니라 그가 반드시 살아남아 '시타델'을 탈출하려는 강한 의지와 '임모탄 조'의 '아내들'을 데리고 탈출하려는 이유까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감동이 훨씬 커진다.

두 영화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 - 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서사가 이어지도록 연출한 의도는 조지 밀러 감독이 이미 '분노의 도로'를 만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긴 서사의 반영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지 밀러 감독은 조셉 캠벨의 책을 즐겨 읽는다고 밝혔는데, 조셉 캠벨은 '신화학'의 대가로, 그가 쓴 책이 한국에서도 여러 권 번역되었다.

두 영화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조셉 캠벨이 정의한 '영웅 서사'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영웅 서사로 해석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의 다른 리뷰나 비평에서 '신화학'과 '영웅 서사'를 바탕으로 해석한 걸 딱 하나 봤는데, 전작인 '분노의 도로'만 보면 영웅 서사가 떠오르지 않지만, '퓨리오사'를 보면, 자연스럽게 퓨리오사의 전 생애가 완벽한 '영웅 서사'로 읽힌다.

신화학과 영웅 서사에서 주인공은 보통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는다. 출발(추방 또는 탈출)-입문(새로운 세계와 만남)-모험(탐험, 위기)-귀환(고향으로, 가족을 만남, 본래의 지위로 돌아옴)으로 구성되는 영웅의 이야기는 이미 고대 오디세이아에서부터 나타난 영웅 서사의 전형이며, 이 과정은 거의 모든 드라마의 원형이다. 제목에서 '사가(saga)'를 붙인 이유도 이 영화들이 거대한 서사를 이루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조지 밀러 감독은 작품에서 고대 서양의 문화와 양식을 변주한다. 퓨리오사의 엄마가 디멘투스 일당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징하며, 디멘투스가 끌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벤허'에서 마차 경주를 떠올리게 한다. '십자가'는 박해당하는 유대인을 상징하지만 한편 그 시대는 로마 제국이기도 하다. 로마는 그리스와 더불어 '서양'의 뿌리이며, 그들의 정신적, 문화적 바탕을 이룬다.

퓨리오사는 '녹색의 낙원'에서 산다. 엄마와 이모와 할머니들과 함께. 그건 우리(인류)가 잃어버린 세계이며,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곳은 풍요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이상의 세계였다. 억압과 착취와 폭력이 사라진 세계, 노동과 예술이 하나인 세계, 배고픔과 질병이 사라진 세계, 아이는 모두의 자식이며, 그들 모두가 아이를 돌보고, 아이들은 어머니의 대를 이어가며 세계를 만든다.

'녹색의 낙원'이 침탈당하는 건 '구약'의 '창세기'에서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변주다. 이때 '구약'에서는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사과를 먹으면서 '원죄'를 갖게 되지만, 영화에서는 외부인의 침탈로 인한 폭력의 결과로 퓨리오사는 '낙원'을 잃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외부인의 침입과 '남성'이라는 - 뱀도 남성의 상징이다 - 면에서, 모계사회가 파멸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남성의 폭력으로 성립된 '가부장사회'가 나타났다는 걸 알 수 있다.

모계 사회가 남성가부장 사회에 침탈당하고, 억압, 수탈당하는 장면이 바로 임모탄 조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임모탄 조는 '물'을 통제하는 것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물'은 곧 생명이며, '낙원'의 상징이다. 퓨리오사의 고향인 '녹색의 낙원'을 파괴한 임모탄 조는 '물'로 자기의 권력을 확장, 강화한다.


어린 퓨리오사가 고향에서 디멘투스에게 납치당하면서, 영웅 서사가 시작한다. 디멘투스는 퓨리오사의 엄마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소에서 퓨리오사가 목격한 걸 알고 있었고, 퓨리오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복수할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디멘투스는 퓨리오사를 전리품으로 여기고, 마치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닌다. 이때 디멘투스에게 퓨리오사의 존재는 딸이자 아내를 상징한다. 디멘투스는 퓨리오사의 엄마를 살해하고, 퓨리오사를 납치한 악한이지만, 퓨리오사를 고향에서 끌어내 모험을 떠나게 만든 매개자이기도 하다.

디멘투스는 모계사회를 파괴한 남성가부장의 상징이며, 그가 데리고 온 퓨리오사 즉 모계사회의 상징이자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대안을 제시할 여성에 의해 파괴될 남성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임모탄 조도 같은 존재이며, 디멘투스나 임모탄 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마지막으로 인류 사회에서 사라질(영원히 사라질 거라고 보이진 않지만) 구질서, 구체제를 의미하는 존재들이다.

'퓨리오사'에서는 주인공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를 만나기 전, 자신이 살던 '녹색의 낙원'에서 디멘투스에게 납치당하고, 디멘투스의 포로가 되어 황야를 떠돌다 임모탄 조를 만나고, 디멘투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때 주적은 디멘투스이며, 임모탄 조는 디멘투스를 제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수단이다.

디멘투스와 임모탄 조가 적대적 사이로 맞붙게 되는 건 필연이며, 자원을 독점하려는 집단이 부딪쳐 폭력이 발생하고, 이들의 갈등 사이에서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떠나 임모탄 조의 진영으로 넘어간다. 퓨리오사는 엄마를 살해한 원수이자, 고향 '녹색의 낙원'을 파괴한 디멘투스에게 복수하고, 임모탄 조의 진영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생각했고, 그의 의도는 성공한다.

퓨리오사가 팔을 잃게 되는 건, 그의 복수 과정이 그만큼 참혹했음을 드러내는 상징이며, 목숨을 걸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퓨리오사의 집념과 각오를 보여준다. 또한 임모탄 조의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인 디멘투스를 없애는데 몸을 사리지 않은 퓨리오사를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

그럼에도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의 집단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가 '워보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힘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과정은 영웅이 고난의 시기를 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웅은 처음부터 화려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돋보이지 않는다. 무수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보낸 다음, 마치 땅속에 있던 애벌레 매미가 나무에서 탈피하는 것처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퓨리오사는 '워보이'들과 함께 가장 낮은 곳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낸다. 그 과정에서 워보이들의 공감을 얻고, 지도자로서 성장한다. '분노의 도로'에서 대장 퓨리오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워보이들의 모습은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퓨리오사가 보여준 헌신과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는 자신이 살던 '녹색의 낙원'으로 탈출한다. 뒤쫓는 임모탄 조의 부대와 싸우며 맥스와 함께 겨우 추격을 벗어나지만, '녹색의 낙원'은 이미 오래 전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고 절망한다. 그가 임모탄 조의 부하로 충성하며 20년을 견딘 유일한 이유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고향은 사라졌고, 그의 희망도 물거품이 된다.

영웅의 귀환은 상처만 남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고향이지만, 고향은 사라졌고, 다시 돌아갈 곳은 보이지 않는다. 이때 맥스는 퓨리오사에게 '시타델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멸망한 지구, 오염된 지구에서 새로운 터전을 발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시타델'은 퓨리오사에게 '적의 소굴'로 인식되었지만, 맥스는 그곳이 가능성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지역보다 분명한 대안으로 보였다.

생각을 바꾸면, 지옥이 곧 낙원이 되는 순간이다. 퓨리오사 역시 '시타델'에서의 악몽 같은 나날을 떠올리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곳은 깨끗한 물이 있고, 식물을 기를 수 있으며, 훌륭한 요새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미래에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기 보다 이미 20년을 살았던 '시타델'로 돌아가 그곳을 차지하는게 훨씬 나은 대안이라고 판단한 퓨리오사는 맥스와 함께 '시타델'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퓨리오사 일행을 추적하던 임모탄 조 집단과 마지막 전투를 하는데, 임모탄 조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각종 기형이며, 임모탄 조 자신부터 방사능 오염으로 온몸이 엉망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임모탄 조와 그의 아들들 모두 죽는다. 임모탄 조의 아이를 임신한 젊은 여성이 죽으면서, 그의 아이까지 태어나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임모탄 조의 피가 이어지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임모탄 조가 장악했던 '시타델'은 퓨리오사가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계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 조의 머리를 사람들에게 던지며, 권력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타델'은 남성가부장 집단에서 모계집단으로 바뀐다. 이는 임모탄 조의 '아내들'이 과거에는 남성(집단)에게 성 착취를 당하는 존재에서, 모계 사회의 주인으로 역할이 바뀌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워보이'들은 임모탄 조의 시대에서는 '신'으로서의 임모탄 조를 절대 믿고 따르는 사교 집단의 무리이자, 절대 권력의 폭압에서 노예로 전락한 나약한 피지배계급을 상징했지만, 퓨리오사로 대표하는 모계 사회에서는 '워보이'의 위상도 달라진다.

워보이들이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소모품으로 쓰이던 하찮은 존재에서, 집단의 구성원으로 개인의 인격과 정체성을 존중받으며, 종교적 세뇌에서 벗어나 이성적 판단을 하는 존재로 발전한다. 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가 만든 감정적, 비논리적 세계에서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진입하는 걸 의미한다.

퓨리오사는 새로운 세계(모계 세계)이자, 구세계의 미개함을 극복하는 영웅이며, 대중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나가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지도자다. 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이전이 어땠는가를 유추할 수 있다. 아포칼립스가 발생하기 전의 세계는 지독한 자본의 착취, 극심한 경쟁, 국가 사이의 폭력,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인 사회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면서 아포칼립스 시대를 만들었고, 퓨리오사는 이런 혼돈의 시대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미래에 나타날 우리의 영웅, 새로운 지도자는 권위적인 남성이 아니라, 유연하지만 합리적인 여성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남성(집단)은 이미 오랜 역사에서 폭력과 착취, 억압으로 세계를 망가뜨렸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다가올 새 세상은 더 이상 폭력과 착취, 억압이 없는 세상, 평화와 평등,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어야 하며, 그때 우리를 이끌 지도자는 여성(집단)이어야 한다는 걸 '퓨리오사'는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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