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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

by 백건우


좋아하는 페친이자 마을 이웃인 최선생이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는 그의 글을 읽었다). 역시 최선생다운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선비는 '시, 서, 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벼루에 먹이 마르지 않도록 늘 부지런히 살았다. 최선생은 선비이면서 무인의 기질까지 갖춘 고매한 분이라 여행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한편, 독서와 글쓰기는 물론 그림에도 취미가 많은 분이라 가히 이 시대의 선비라 할 만하다.


나는 최선생이 구입한 그림을 보고 '오호, 꽤 흥미로운 그림인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흥미롭다는 건 크게 두 가지 감정이다. 하나는, 그림 자체가 주는 복합적 감정의 발흥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그림을 선택한 최선생의 안목이다. 최선생은 왜, 어째서 이 그림을 선택했을까. 나도 그림을 꽤 좋아하고, 또 집에 몇 점의 그림을 걸어 놓고 흐믓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취향에 따라 그림을 고르게 되므로, 만약 내가 이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구입을 할까를 생각하면, 나는 돈이 있을 때 이 그림을 구입할까, 아니면 다른 그림에 눈이 갈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면, 결론적으로 나는 이 그림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선택한 사람의 취향과 판단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내 기호와는 다르지만,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좋은 작품이 갖는 메타포와 알레고리를 내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이 어떤 중학생이 장난 삼아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으로 판명났을 때, 이 작품이 꽤 좋은 작품이라고 말한 사람은 변명을 하려 들 것이지만, 장난 삼아 그린 그림이라도 '좋은 작품'이라는 판단에 변함이 없다면, 그건 누가 그렸거나 상관 없이 '좋은 작품'일 확률이 매우 높다. 많은 경우, 서툰 작품이나 치기 어린 작품을 아무 정보 없이 유명한 갤러리에 걸어 놓으면, 사람들은 선입견 없이 그림을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유명 갤러리'라는 간판의 명성에 압도되어, 그 갤러리에 걸린 작품은 '일단' 훌륭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아래 이미지)은 청담동의 갤러리에 걸린 작품이 아니고, 그저 가까운 이웃이 구입한 작품이고, 구입 가격도 알 수 없으므로, 작품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보게 된다. 그래서 순수하게 회화 이미지를 받아들인 내 머리에 처음 떠오른 이름은 '뭉크'였다. 뭉크의 '절규'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미지와 색감이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뭉크의 다른 그림들을 봐도 그의 작품들 대부분 선이 뭉게지고 면이 거칠다. 마치 대충 그린 그림처럼 난삽하게 보이지만, 뭉크의 작품은 표현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미술(회화)에서 표현주의는 '정서적 효과를 위하여 색채와 형태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표현 기법의 하나인데, 아래 작품이 꼭 그렇다. 따라서 아래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작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표현주의 기법으로 완성했다. 설령 작가가 '표현주의'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해도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작가는 어떤 '주의'나 '이념'에 따라 창작을 하는 게 아니므로, 그가 온전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창작물을 완성했다면, 해석은 그 다음 문제다.


비근한 예로, 르네 마그리뜨가 그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작품을 두고 미셸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은 논문을 썼다. 미셸 푸코의 논문은 구조주의 철학의 틀로 '쉬르 레알리즘' 작품을 해석한 작품 해설서다. 미셸 푸코는 여기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쓰이는 '기의'와 '기표'를 동원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이미지와 문자의 비동시성, 논리적 모순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이미지를 해석하려 했다.


르네 마그리뜨의 작품들 대부분은 '쉬르 레알리즘'에 바탕한 작품으로, 공산주의자이자 초현실주의 작품을 추구한 르네 마그리뜨의 작품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초현실주의 세계관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고, 성공했다. 르네 마그리뜨가 활동하던 시기는 다다이즘과 더불어 초현실주의가 태동하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고(제1차, 제2차 세계전쟁) 실존주의와 더불어 이들 사조는 문학, 미술 분야에서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에 일본에서 수입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가장 잘 받아들이고 재해석한 작가가 '천재 이상'이었다. 그는 전후(1차 세계전쟁) 다다이즘의 등장으로 허무주의, 회의주의가 확산된 일본을 통해 자연스럽게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수입된 문화적 영향을 날카롭게 감각했고, 그의 작품에 적극 반영했다. '천재 이상'이 쓴 수 천 편의 시는 일본 작가 다카하시 신키치, 쓰지 준, 나카하라 주야 그리고 조선인이면서 일본에서 활동한 다다이스트 고한용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의 사조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해 국경을 뛰어 넘어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다시 후대의 사람들과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다. 아래 작품이 '뭉크'의 표현주의 작품과 닮았다는 건 이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처럼, 현대의 창작물은 반드시 과거의 무언가에서 영감을 얻었고, 과거의 유전자가 아주 적게라도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닮은 유전자를 통해 오늘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언가 하는 것이다.


아래 작품을 보면, 경계가 흐릿하고 모호하다. 화면의 가로로 절반 정도를 경계로 밝은 회색과 붉은색의 면이 나뉘어 있을 뿐, 이 공간이 정확히 어떤 공간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공간을 굳이 알려고 하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다. 바닥의 붉은 색은 자세히 보면 폭 넓은 계단처럼 보인다. 면은 불투명하고 뭉개져 보이고, 어디에도 날카로운 곳이나 직선은 보이지 않는다. 이건 모호함을 의도한 표현이다. 경계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작가의 의도인데, 경계는 가장자리이면서 날이 선 곳이고 날카로운(edge) 부분이다. 작가는 작품 어디에서도 또렷한 선이나 면, 날카로운 경계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우리(그림을 보는 사람)는 이런 불투명함과 모호함을 보면서 양가 감정을 갖는다. 불편함과 편안함. 경계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는 현대인의 날카로움을 뭉개고, 또렷하고 분명하지 않은 면을 통해 흐릿한 눈으로 마음 편하게 바라봐도 좋은 대상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복합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오른쪽 인물은 낮은 의자에 앉아 어딘가 바라보고, 왼쪽 인물은 그렇게 앉아 있는 인물을 바라보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대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거리만큼 개인의 소외는 타자화 되어 드러난다. 이때 배경이 되는 밝은 회색의 불투명함은 관객이 바라볼 때, 막힌 시야처럼 답답함을 유발하는데, 작품 속 인물들이 바라보는 배경 역시 오늘 하루의 삶조차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라는 걸 상징하는 장치다.


조금 다르게, 이 작품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왼쪽의 인물은 '현재의 나'이고, 오른쪽 작은 의자에 앉은 인물은 '과거의 나'로 해석할 수 있다. 확실한 근거를 대기 어렵지만, 왼쪽 인물은 조금 나이가 들었고(머리가 회색이라는 점에서), 오른쪽 인물은 그보다 젊어 보인다. 왼쪽 인물은 지금 나이 들었고,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과거, 젊었을 때의 자신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걷는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고, 그가 과거의 젊었던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갖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다만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그가 마치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다른 의미에서 초현실주의적이고, 관념의 표현주의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이라고 해서 구체적 회화, 사실주의 작품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이를테면, 벽에 반창고로 바나나를 붙여 놓고 작품으로 판매하거나, 변기를 걸어 놓거나 하는 등의 설치, 행위 예술이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비싸게 매매되는 현실에서, 아래 작품이 보여주는 표현주의적 이미지는 그나마 구체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어 감상과 해석에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메타포와 알레고리가 열려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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