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과

by 백건우

파과


구병모 소설 '파과'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여기서 '파과'는 60대 전설이 된 킬러 '조각'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는 킬러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서사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조각'으로 연기한 이혜영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이 영화는 이혜영 배우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이혜영 배우는 타고난 카리스마와 뛰어난 연기를 하는 배우임에도 그를 대표하는 좋은 작품을 바로 떠올리기 쉽지 않다. 드라마는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라서 말하기 어렵고, 영화로는 류승완 감독 작품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전도연 배우와 둘이 버디 무비를 찍을 때, 사채에 쫓기는 '경선'의 역할이 강렬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경선'처럼 '파과'에서도 이혜영 배우는 죽음 힘을 다해 살아가는 인물이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자기의 삶을 헤쳐나간다.

암살자의 세계에서 무려 40년을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은 '전설'로 불려도 될 만한 인물이겠다. '파과'에서 '조각'은 그런 인물이다. 갑작스레 벌어진 살인 사건을 계기로 암살자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조각'은 자신이 만든 원칙을 지키며 40년 동안 수 많은 악인을 '청소'한다. '조각'이 함께 하는 단체는 '신성방역'이라는 암살자 조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돈과 권력을 무기로 뻔뻔하게 살아가는 악인을 조용히 '청소'하는 비밀 집단이다. 이 집단은 '조각'의 스승인 '류'가 만들었고, '조각'은 이제 '대모'로 불린다.

영화는 하드보일드 액션을 보여주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는 '가족'이다. '조각'은 냉혹한 킬러의 삶을 살아가면서 가족도 없고, 가까운 친구나 지인도 없다. 오로지 개 한 마리를 기르며 평범한 늙은이처럼 조용히 살아가는데, 그는 60대 여성으로 연약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 운동과 훈련으로 단련된 살인무기 그 자체다. 그런 '조각'이 작전을 수행하다 거의 죽을 위기에 놓이고,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강봉희가 '조각'을 살린다. 그동안의 원칙대로라면 '조각'은 강봉희를 죽여야 하지만, '조각'은 자기가 만든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이때부터 영화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강봉희는 수의사로 일하면서 낮에는 1인 시위를 한다. 그의 아내가 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사망하지만, 병원장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끝내 의료사고 피해자인 강봉희를 무시, 경멸한다. 강봉희에게는 어린 딸이 있고, 과일가게를 하는 장모님이 계신다. 이런 가족사를 알게 되면서, '조각'은 강봉희를 죽이면 강봉희의 딸, 장모까지 모두 죽는다는 걸 알게 되고, 그의 냉혹한 심장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한다.

한편 '신성방역'을 경영하는 손 실장은 어둠의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투우'를 영입한다. 투우 역시 혼자 범죄자들을 청소하고 다니는 범죄자 위의 범죄자였는데, 손 실장이 그를 알아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신성방역'에 들어온 '투우'는 '신성방역'의 비밀을 찾아내고, 마침내 '조각'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투우'가 왜 '조각'의 뒤를 쫓는지 알 수 없지만, '조각'이 날카로운 감각으로 '투우'의 과거를 찾아내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다.

이 영화가 하드보일드 액션의 외형을 입힌 '가족' 드라마인 건, '조각'이 강봉희 가족을 지키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지만, 더 본질에서는 '조각'과 '투우'의 관계 때문이다. '투우'는 '조각'을 죽이려 여러 번 시도하고 실제로 죽일 수 있었지만 끝내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조각'이 '투우'를 죽이면서, 이들의 관계가 '엄마와 아들'의 존재로 인정되는 걸 보여준다. '투우'는 어릴 때(중학생 무렵) '조각'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럼에도 신고하지 않고 '조각'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건 그가 '조각'을 '엄마'처럼 여기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없이 자란 '투우'는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면서 자랐고, 단 한 번도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껴본 적 없는 아이였다. 그러다 집에 가정부로 들어온 '조각'을 만난다. 물론 '조각'은 가정부로 변장해 '투우'의 아버지를 살해할 목적으로 들어왔으나 어린 '투우'를 살뜰하게 보살피면서, '투우'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 '조각'이 어느 날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라지면서 '투우'는 자신을 자식처럼 돌봐 준 가정부이자 엄마같은 '조각'을 시간이 흘러서라도 반드시 찾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투우'의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엄마'의 자리에 있는 '조각'을 생각하고 있다.

'투우'의 마음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마음으로 흔들린다. 시간이 흘러 다시 '조각'을 만났을 때, '조각'이 과연 자신을 알아볼까, 알아본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조각'은 암살자로, 살인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그가 과연 평범한 사람처럼 자신을 대할 수 있을까. '조각'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만나려면 '투우' 자신 역시 '조각' 같은 사람처럼 바뀌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 마음이 결국 어린 '투우'를 '범죄자 위의 범죄자'로 만들었고, 결국 '조각'을 만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때 '조각'과 '투우' 두 사람의 감정에는 온도차가 있다. '투우'가 '조각'을 향한 마음은 훨씬 뜨겁고 진한 '갈구하는 사랑'이라면, '조각'이 '투우'에게 가진 감정은 연민과 안쓰러움이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 가까워질 수 없는 상태이며, '조각'에게는 거의 잊혀졌던 과거의 일부일 뿐이었다. 이렇게 서로 어긋난 감정은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애기 때, 어릴 때 가졌던 애틋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점차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성장하면서 조금씩 흐려지고, 옅어지는 마음을 돌아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조각'은 달려드는 '투우'를 떨쳐내려 한다. 그는 '투우'를 결박해 자동차에 넣고 절벽에서 떨어뜨린다. 그건 이미 과거가 된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투우'의 어린 시절은 '조각'에게는 '죽은 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아이였던 '투우'는 다시 살아돌아와 자신을 '자식'으로 인정해 달라고 말한다. '조각'은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삶을 통해 '따뜻한 피'와 연결되는 순간 자신은 죽는다는 걸 절실하게 깨닫는다. '투우'를 죽임으로써 즉 자식을 살해하면서 '조각'은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고, 전설이 된 암살자로 돌아온다. 가족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를 두고 '조각'은 잠시 망설였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743785_1187454_584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애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