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 :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by 백건우

바르도 :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작품. 그의 작품 가운데 '버드맨',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 이어 세 번째로 본 영화인데, 다른 훌륭한 감독들처럼, 알레한드로 감독의 영화도 '전작주의 영화'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영화들이다. 그의 작품은 올해 개봉하는 '디거'까지 포함해야 겨우 아홉 편에 불과할 정도로 과작인데, 내가 본 세 편의 영화를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알레한드로 감독의 작품은 영화 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생각한다.

영화 감독에 따라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주제 또는 세계관의 일관성을 보이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장르와 상관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도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봉준호 감독은 데뷔작부터 사회를 비판하는 알레고리가 녹아 있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메시지다. 같은 사례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복수'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면서, '악의 미장셴'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영화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또한 코엔 형제의 경우, 그들의 데뷔작인 '블러드 심플'에서 이미 그들의 세계관은 완성되었고, 이후 모든 작품은 데뷔작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사소한 사건이 점차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치닫는 아이러니가 결국 불행을 만드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 감독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탐구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창작하는데, 그런 일관성은 보이지 않아도 작품마다 자신의 흔적을 강하게 드러내는 감독들은 많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훌륭하다. '버드맨'에서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인공 리건에게는 자신의 삶이 걸린 심각한 존재론적 위기 상황이다. 이때 리건이 겪는 위기는 단지 '수퍼히어로' 흥행 배우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중년에 이른 남성이 겪는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포함한다.

리건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비현실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때 알레한드로 감독의 특기이자 특징이 나타난다. 알레한드로 감독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영화감독들은(모두는 아니지만) 라틴아메리카 예술이 갖는 독특한 예술적 장치를 공유한다. 그건 '라틴아메리카 환상 예술'로 말할 수 있는데, 문학에서 시작한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은 마르케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라틴아메리카 예술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알레한드로 감독의 영화에서 '라틴아메리카 환상 예술'을 발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버드맨'에서도 보이지만, 이 영화 '바르도'에서는 영화 세계관과 미장셴이 곧 '라틴아메리카 환상 예술' 그 자체로 형성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바르도'의 첫 장면은 마치 꿈인듯, 환상인듯, 상상의 세계인듯 보이는데, 드넓은 황야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 높이 솟구쳤다 내려 앉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는 현실에서 주인공 실베리오가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살아가는 모습, 언론인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성공해 미국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과 그걸 축하하는 과정, 그 사이에 주인공 실베리오가 겪는 수 많은 환상과 사건들은 '라틴아메리카 환상 예술'의 특징을 그대로 담으면서, 실베리오라는 주인공 개인의 이야기에서 멕시코(를 포함한 남미 대륙 전체)의 기나긴 역사의 비극을 압축,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게는 실베리오의 가족(아내와 딸, 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애틋한 가족애, 크게는 미국의 침략으로 국토를 잃은 멕시코의 처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스페인에게 침략당해 수백, 수천만 명의 멕시코(를 포함한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들이 학살당하는 참혹한 제3세계 인민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보여준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자신이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므로, 과거 유럽 국가들의 침략과 근대 역사에서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해(전쟁 후 미국이 얼마간의 돈을 지불했다면서 침략이 아니라 돈을 주고 땅을 매입했다는 개소리를 미국 대사가 지껄인다) 국토의 20% 이상을 뺐기게 되는 사건, 세계 최강국 미국의 바로 아래에서 가난한 나라로 살아가는 멕시코 사람들의 서러움과 분노도 표현하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한 실베리오의 선민의식과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을 꼬집는 장면도 나온다.

실베리오 가족은 미국(로스엔젤레스)에서 20년 넘게 살지만, 입국할 때 이민국 직원에게 '당신은 미국에 집이 없다'는 말을 듣고 미쳐 날뛴다. 실베리오와 그 가족은 미국을 '집(Home)'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미국은 멕시코 사람인 실베리오를 '미국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실베리오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걸 느끼고, 딸과 아들 역시 멕시코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실베리오의 친구, 지인들에게는 '변절한 멕시코인', '미국놈에게 알랑방귀나 뀌는' 타락한 멕시코인으로 비난받는다.

실베리오가 겪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과 입장은 그가 지식인,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존재에서 따라붙는 필연적 결과로 보인다. 그는 멕시코인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과 탐욕을 비난하지만,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가 미국영화평론가협회 상을 받게 되자 그 상을 받겠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지식인의 비판적 자아가 발동하지만, 내면에서는 선진국, 미국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쁨으로 자기 분열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지식인의 이중성, 정신적 나약함을 드러낸다.

알레한드로 감독은 실베리오가 겪는 이 딜레마를 환상적인 기법으로 마무리한다. 그건 영화가 시작하면서 보여준 장면의 연장이자,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같다는 수미일관의 설정에서, 이 모든 내용이 주인공 실베리오의 꿈, 환상이라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촬영한 감독이 '다리우스 콘지'라는 건 나중에 알았는데, 영화감독은 늘 확인하지만 촬영감독을 찾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영상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훌륭한 이미지다. 영상이 예사롭지 않았던 건, 촬영감독이 감독의 연출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영상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한 장면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상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실력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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